나는 어떤 사역자가 될 것인가?

2015. 6. 9. 20:14



I.우리 동네 목사님.

 

한 시를 읽었다.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란 시. 참 와 닿았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강단에서 시를 읊어주었다. 그리고는 간단한 시평을 덧붙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동네 목사님’은 인기가 없는 목사님이다. 성도들이 원하는 것에는 침묵하는 목사님이다. 장마통에 교인들이 교회에 오지 않으면 그들을 향해 저주라도 하거나, 그나마 모인 교인들에게 복이라도 빌어줬으면 좀 나았을 테다. 손뼉 치는 찬양과 큰 소리의 기도에 대해서 회의적일지라도, 그럼에도 손뼉 치며 찬양하고, 소리를 높여 기도했으면 나았을 테다. 아니, 적어도 성경말씀이 100% 순도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강조했으면 조금이라도 상황은 좋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성경보다는 삶에 밑줄을 쳐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예배시간에 늦을 만큼 학생회 아이들과 목사관 뒤편에서 푸성퀴를 심는데 열중했다. 그는 삶 속에 기적적으로 들어와 구원하시는 ‘초월적 하나님’보다는, 삶을 통해 십자가에 메달리기까지 진리를 살아내셨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폐렴으로 인한 둘쨰 아이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을 테다. 또한 성도들은 이 모든 ‘우리 동네 목사님’의 기행을 ‘능력 없음’, ‘믿음 없음’, ‘은혜 없음’이라는 판결을 통해, ‘이제 우리 마을을 떠나야하겠습니다, 목사님.’이라고 말하는데 까지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좇아가는 목사님보다는, 어떻게든 초월적 하나님을 통해 민중에게 아편을 제공하는 하나님을 믿으려 발버둥치는 목사님을 원했을 테니까.

 

기형도 시인은 이러한 ‘우리 동네 목사님’을 자신의 시를 통해 그려냈다. 기독교가 진리 주장에 있어서 독단적이고, 비타협적이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이 시대 속에서 ‘우리 동네 목사님’은 요원할 따름이다. 진리에 대한 독단성, 비타협성, 폭력성은 내려놓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그 폭력성이라는 십자가 골고다 언덕길을 담담히 걸어 나가는, 진리 넘치는 예수의 모습을 회상케하는 ‘우리 동네 목사님’의 모습. 시인이란 원래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특별한 장면에 꽂히는 법이다. 우리 동네 교인들은 ‘우리 동네 목사님’을 쫓아냈지만, 그에게 능력도, 믿음도, 은혜도 없다고 판단해버렸지만, 그럼에도 기형도는 이 ‘우리 동네 목사님’을 잡아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시 속에 오롯이 그려 넣었다. 그가 읍내 철공소 앞에서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보다가 어느새 날이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마치 예수께서 겟세마네 언덕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담담히 십자가의 소명에 자신의 삶을 모두어 바치는 장면과 흡사하다. 그리고 또한 지금, 여기서, 영원히 울려 퍼지는 ‘신학도’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운다.

 


II.후기 근대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독특한 나라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세워진 나라이다. 어떤 면에서는 ‘생존 공동체’와 유사한 모습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념’이라는 잣대로 판단했다. 이념이라는 잣대 아래에서 상대는 적이 되고, 우리는 ‘생존 공동체’가 되었다. 그렇게 ‘이념’이라는 잣대로 똘똘 뭉치고, 또한 격렬히 싸워내며 그렇게 하나의 ‘대한민국’이 형성되었다. 그 여파는 오늘날도 여전하다. 대통령 선거는 국가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가 아니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하고, 누군가는 살아야만 하는 격렬한 이념대립이 선거를 통해 표출된다. ‘친일파, 빨갱이, 적폐, 국가 전복 세력’과 같은 있어서는 안 될 언어들이 남발한다. 이는 물론 오늘날 우리의 사회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일종의 치열한 경쟁사회이다. 그리고 이런 경쟁 사회 속에서는 무한히 많은 일상생활인들이 적으로 변모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 한반도에서는 ‘음모론’이 끊이질 않는다. 본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어떤 특별한 존재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았던, 하지만 그 위협을 이겨냈던 ‘생존 공동체’였기 때문일 테다. 어쨌건 우리는 이러한 독특한 사회 분위기를 살아가면서 ‘근대 사회’를 배워왔다. 우리는 타인을 적으로 돌리고, 증오하고, 그들을 우리로부터 배제해나가면서 ‘근대 사회’를 일궈왔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끝없이 적들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가난과 질병이 적이었다. 또한 점점 나아갈수록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문화 혹은 술, 담배와 같은 문화가 적으로 등장했다. 혼전순결 담론도 그와 비슷했다. 최근에는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 등등의 이단이 적으로 등장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가 생존공동체인 ‘대한민국’이라는 삶의 정황을 지니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적에 맞서서 우리 스스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규합하는 ‘대한민국’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교회에는 끝없이 ‘대적’이 필요했다. 그러한 문화는 아마도 수많은 교단이 난립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터. 다양한 교단들이 ‘진리’라는 잣대 아래에서 갈라졌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해나갔는데 여념이 없었다. 초교파연합운동이라 할 수 있는 ‘Again 1907'집회조차도 음주 문화, 대학가 문화, 성 문화, 타종교에 대한 베타적인 기도제목으로 똘똘 뭉쳤으니 알만하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의 사회는 ‘후기 근대’ 이른바 ‘포스트-모던’으로 들어서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사회의 독단성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등장한 사회이다. 이른바 독단성을 가능케 했던 ‘진리에 대한 획일화’에 대한 치열한 비판의 결과였고, 그로 말미암은 ‘독단적 진리’라는 토대의 붕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들의 대화 속에서, 또한 우리들의 문화 속에서 ‘포스트-모던’은 흔히 발견된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라는 말이라던가, ‘그래, 네 생각은 이해해. 사람마다 각자 다르니까.’ 등등의 말들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상 가운데 우리가 젖어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기독교 문화’와 충돌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고민 없는 기독교 문화에 젖어있는 청년들은 ‘기독교가 진리이다.’라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혹은 깊은 성령체험 또는 은혜체험 이후에 ‘기독교가 진리이다.’라는 말을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모던식 사고로의 회귀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 방향 모두 옳은 방향은 아니다. 전자는 기독교의 진리성을 위협하고, 후자는 기독교의 선교성을 위협하는 행위이니 말이다.

 

이러한 시대 현실 속에서 리차드 보캄의 『세계화에 맞서는 기독교적 증언』에서 주장하는 견해를 한번 톺아볼 필요가 있다. 리차드 보캄은 그의 저서 속에서 포스트-모던의 시대 정황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방법을 나름 제시한다. 그가 주장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바로 기독교의 진리는 일종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독단적인 진리로써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억압과 독단을 베푸는 시대 정황 속에서 ‘핍박받는 증언자의 증언’으로써 이야기된다고 리차드 보캄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레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을 기억하게 된다. 그의 설교, 그의 목회 방식은 전혀 억압적이지 않다. 폭력성과 독단성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동네 교인들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처사에 의해 압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서 ‘삶’으로 묵묵히 진리를 증언해낸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그 길을 굳굳이 걸었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야말로 후기 근대 대한민국사회에서 요구되는 목회자상이 아닐까? 아니, 후기 근대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목회자상이 아닐까?

 


III.십자가를 따라 걸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와서 죽으라며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길로 정의했다. 목회자의 길도 이 길의 연장선상에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와서 죽으라’며 부르신다. 사실 목회자의 길은 꽤나 평탄해 보인다. 대부분의 20대 중반 전도사들이 차를 몰고 다닌다. 3포 세대를 넘어서 7포 세대까지 나아가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전도사들은 꽤나 빠른 나이에 결혼에 골인하고 가정을 일궈낸다. 그리고 채플에 초청되고, 신학교에 초청되는 강사들은 대부분 스타강사들이거나, 중형교회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유복한 삶을 산다. 그들은 우리에게 ‘목회자라는 직업이 가지는 안정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진다.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있을까?’

 

처음 전도사로 사역을 나가던 시절, 나보다 적어도 40살은 많아 보이는 권사님이 나에게 허리를 굽히셨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셨다. ‘아이고, 전도사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눈치를 챘다. 바로 이 ‘전도사’가 된다는 일이 결코 주님을 따르는 일과 상반된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전도사님’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100여명의 청중이 내 이야기에 20~30분 집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10여명의 아이들이 매주 나에게 15분씩 집중하고 있다는 것. 나는 과연 예수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을까? 오히려 나의 목은 굳어지며 점차로 완악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 염려와 함께 또한 내 안에서는 ‘탁월한 사역자’, ‘대형교회 목회자’, ‘탁월한 집필가’를 향한 욕망이 솟구쳤다. 나는 과연 전도사로써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 동네 목사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던 끝에 나에게 답을 주던 이는 바로 내가 섬기던 학생회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다. 매주 만나기만 하면 나를 피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담배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담배냄새가 가시고 나면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붙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문제아’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들에게 ‘성공에 대한 욕망’은 찾아볼 수 없다. ‘비전’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들에게 성공을 말하고, 비전을 말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폭력이다. 이들은 그냥 그렇게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간다. 어떤 친구는 소년원에 갈 뻔했다. 그런 이들이 모인 곳, 바로 내가 섬기던 학생회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들에게 예수의 삶을 가르쳐야만 했다. 아주 쉽게. 매우 단순하게. 그래서 이렇게 규정했다. ‘초코파이 10개가 있고 우리가 11명일 때 자신이 초코파이를 먹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초코파이 10개가 있고 누군가가 6개를 차지하려고 할 때 그에 맞서서 초코파이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가르치며 살던 어느 날, 두 명의 친구 간에 시비가 붙었다. 둘은 서로를 때리기 시작했다.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나는 중간에서 말리려고 했다. 그 어떤 말로도 화해를 일궈내기는 어려워보였다. 온갖 해서는 안 될 말들을 쏟아냈다. ‘너희들 싸우면 나 전도사 사직서 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쪽팔리는 짓이냐?’ 등등. 하지만 그들은 화해를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때 ‘누가 초코파이 포기할래? 누가 예수처럼 초코파이 포기할래?’라고 물었다. 잠시 짧은 순간이 지났고 그들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는 어느새 둘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감정에 휩싸였음을 고백했다. 그때 나는 겉으로는 위엄 있는 척했지만, 마음으로는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말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삶으로는 그렇지 않던, 오히려 많은 성도들에게 ‘전도사님’이란 소리를 들으며 목이 곧아지던 스스로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토록 예수의 이야기가 삶을 바꿀 혁명적인 이야기였단 말인가?’ 그때 이후로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겉으로는 양아치에 불과한 그들에게, 문제아에 불과한 그들에게, 나는 들어야만 했다. 배움을 얻어야만 했다.

 


IV.우리 동네 사역자를 희망하며.

 

나는 매주 내 삶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마다, 또한 선생님들과의 보이지 않는 논쟁에 지칠 때마다, 또한 나의 사역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란 시를 읽는다.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십자가로 굳굳이 걸어가는 그의 결기를 읽는다. 그리고는 그의 힘없지만 예수의 영에 휩싸인 발걸음을 고요히 묵상한다. 그 길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누구 앞에서 ‘나 전도사요.’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살아내지 못하고, 신학을 공부한다면서도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삶을 일궈내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전도사님’이라고 불림받기를 좋아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며, 타인 위에서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우리 스스로를 십자가에 메달아 올리는 길이다. 가장 예수를 믿지 않는 것 같은 이들에게 ‘예수 따르는 삶’을 배워가며, 가장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이들에게 ‘나의 문제’를 지적당하는 그 길이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비로소 예수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배우는 우리의 모습만이 진정 강단 위에서 예수를 가르칠 수 있다. 그 어떤 사변적인 말이 아니라, 단순한 진리를 구현해낸 삶으로 말이다.

 

물론 나도 다양한 사역들을 해보고 싶다. 대안적 목회도 해보고, 탁월한 기독교 저술도 집필하고 싶다. 또한 신학교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배출될 수 없는 기독교적 인재도 길러내고 싶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길, 하늘에서 부르신 길은 ‘십자가 위로 올라가 죽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 길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 없음을,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사역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화려해보이기만 하는 역할들로 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정녕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나지막이 ‘그래, 죽어보겠습니다. 한번 죽어보겠습니다. 끼리에 엘레이손’이라고 읊을 수 있을 뿐이다. 그래, 나는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 동네 사역자’가 되고 싶다.

본 글은 M.Div 과정에서 요구하는 과제의 용도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