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3]하나님! 온종일 주무실 작정이십니까? 깨어나소서!

2021. 12. 12. 00:26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마가복음 4장 36절-41절

 

살다보면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의 2012년이 꼭 그랬습니다. 본래 목회자가 되길 꿈꿨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방황을 하면서 바로 목회를 하기보다는 직장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가 나온 학교는 한국해양대학교 물류시스템 공학과입니다. 한때 취업이 정말 잘된다고 소문이 난 학과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마음만 먹으면 취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취직준비를 거의 해오지 않은 제가 졸업을 하고 나서 갈 수 있는 회사는 없어보였습니다.

 

어딜가나 면접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구비해놓은 스펙이 없으니 합격 통보를 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전공한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로 취직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학원과 비슷한 자가주도학습 공간의 튜터로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합격했습니다. 2주간 인턴처럼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식 채용을 하는 날에 계약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제가 살던 작은 고시원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취직을 했다는 이유로 신용카드로 쓴 금액들을 계산해봤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당시 고시텔 방 근처에 아르바이트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틀 내에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봤고 다시 취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미래와 너무 멀어져버린 저의 모습이 처량했습니다. 앞으로의 저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막막했습니다. 한때는 목회자를 꿈꾸겠다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기도했던 순간과, 목회를 하기 전에 세상 바닥을 경험해보겠다며 방황하던 오늘의 순간은 너무 극심한 온도차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시는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웃으며 과거를 회상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때는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곁에 하나님이 계시는지조차도 흐릿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35절) “그 날 저물 때”라는 점입니다. 해가 질 때, 그러니까 어둠이 이 땅을 잠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 이야기의 전조처럼 보입니다. 어둠이 이 땅을 잠식해 빛이 보이지 않듯이, 제자들의 시야 속에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과 매우 긴밀한 거리에서 있었다는 점을 본문은 알려줍니다. 제자들은 (36절)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있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뿐더러, 무리들과도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는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예수님과 매우 가까이 있는 특별한 거리에 있다는 점을 본문은 알려줍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본문은 이 미묘한 간극을 보여줍니다. 어둠이 땅을 덮치던 해 질 무렵, 제자들은 무리에서 떠나 예수님만을 배에 태우고 매우 친밀하고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일어난 사건의 핵심이 등장합니다.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는 어느 정도의 크기였을까요? 매우 작은 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배도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큰 광풍과 물결이 그 배를 위협할 정도로 찾아왔습니다. (38절) 반면 예수님은 고물, 배의 후미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치 큰 광풍과 물결은 본인과는 전혀 무관한 것인양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마주한 위기입니다. 큰 광풍과 물결은 본인들의 생명을, 본인이 타고 있는 <배>라는 공동체의 운명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죽을 위협에 놓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둠이 온 땅을 잠식하듯, 죽음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급하게 외칩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고백이란 없습니다. 구원을 외치는 간절한 믿음의 간구란 없습니다. 그저 즉자적인 생명의 위협에 대한 대응에 불과합니다. (38절)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야기는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네 가지 비유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봤던 예수님의 네 가지 비유를 기억하시나요? 씨를 받아드린 네 가지 땅의 비유,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비유, 농부가 알지 못하는 중에 씨가 자라 수확에 이르게 되었다는 비유, 그리고 지극히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었다는 비유까지. 여기서 핵심은 <씨>와 <수확>입니다. 씨는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땅에 심기워지면 감춰집니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끝내 <씨>는 결국 어마어마한 <수확>에 이르게됩니다. 

 

씨가 땅에 심기워져 감춰진 것처럼, 오늘 예수님은 배에 심기워져 감쳐진 상태로 있습니다. 농부는 씨가 어떻게 자라나서 수확에 이르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배에 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존재이신지, 광풍과 물결 속에서 무슨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자신들의 존재를 가운데 어떤 일을 행하실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땅 안에 씨가 심기워진 것처럼, 제자들이 탄 배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겉으로는 광풍과 물결 속에서 주무시고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 곁에 계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1)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끝내 (39절)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시고는 끝내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에서 줄곧 등장하는 <바다가 하나님께 끝내 복종하더라는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오라 명령하실 수 있고, 가라 명령하실 수 있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2)또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 일어났던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기억나게 만듭니다. 당시 구원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앞서 바람을 명령하시고 바다를 명령하셔서 바다 사이로 길을 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운데로 건너가 끝내 원수인 애굽군대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바람과 바다를 명령하시고 다스리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망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자 구원의 하나님이심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자신의 곁에 있던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바람과 물결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조차도 결국 (자신들과 같이) 죽음에 삼키워질 연약한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울부짖음은 우리가 모두 죽게되었다는 절망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9절) “깨어”나시는 분이십니다. “깨다”는 말은 “일어나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때에도 똑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 일어나셔서, 깨어나셔서, 그 분은 죽음의 원인을 명령하고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제자들을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40절)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물음은 예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시자,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이제는 수긍하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

 

세상을 살다보면 2012년의 저의 모습처럼 삶이 엉망진창처럼, 마치 전혀 목적을 상실한채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거친 바람과 물결의 공포가 우리를 집어 삼킬 것만 같은 위험이 우리를 잠식할 때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껏 우리를 지켜주셨던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잠자고 있는 것만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편 44편 23절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기도 한 구절입니다. “일어나소서, 하나님! 온종일 주무실 작정이십니까? 깨어나소서! 우리에게 닥친 일을 모른 체 하시렵니까? 어찌하여 배게에 얼굴을 묻고 계십니까?”

 

우리의 이 외침은 결국 우리 곁에 은밀히 숨어 동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깨우쳐달라는 기도입니다. 배 안에 계시는 잠자고 있는 그 분이 바로 창조의 하나님이며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예수님은 “깨어” 나셔서 바람과 물결을 명령하심으로 자신이 “창조의 하나님이며 구원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곁에 계신 그 분이, 잠자고 있는 것만 같은 그 분이, 우리의 일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만 같은 그 분이, 사실은 창조주의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을 밝혔습니다. 은밀하게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 끝내 그분의 존재를 밝히 드러내시는 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환한 빛이 도래할 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은 사라지고 희망만이 가득한 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이 주무시는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도 예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꼭 붙드십시오. 

 

그 붙듬이 우리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