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 담은 질그릇 (고후 6:3-10)

2021. 12. 15. 15:53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30-10

 

2013년 신학교에 편입을 결정했습니다. 다소 늦은 나이에 학부 3학년부터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다수가 20살 친구들이었습니다. 편입해서 수업을 듣다보니 1학년 수업을 듣게 되었던 이유입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해서 신학을 배운다는 것, 한편으로는 참 축복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힘든 길입니다. 아직 신앙이 굳건하지도 않으며 삶의 애환을 맛보지도 않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기가 썩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신학교의 입학 커트라인은 상당히 낮습니다. 평소에 공부를 안하던 친구들, 역사나 문학 혹은 철학에 관심이 없던 친구들이 신학을 공부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려 수업을 듣다가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토론을 했습니다. 1-2시간은 치열하게 공부를 했고 공부가 끝나면 맛있는 치킨을 뜯어 먹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들은 지금 모두 전도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고 순수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배운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2015년에는 신대원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학교였고, 같은 기숙사였고, 같은 교수님 밑에서 배웠기에 설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학우들의 연령이 확 높아졌습니다. 특히나 지방 신학교에는 평균나이가 40대 초중반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나이는 30살이었는데 말입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순수하게 미래는 생각하지 않던 이들과 앞뒤 재지 않고 공부만 했던 학부 시절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험들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나이가 있어서 그럴까요? 3년 후면 이제 졸업하고 살아내야 해서 그럴까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수업 또한 현실 교회 현장에서 어떤 업무를 해야 할지에 대한 스킬과 팁에 관한 수업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교회가 더 돈을 많이 준다더라, 어느 교회에 가면 미래가 보장된다더라, 개척은 이렇게 해야 된다더라 등등의 현실적인 이야기들. 편입했던 시절에는 줄곧 학우들과 어울렸고 친하게 지냈던 저는, 신대원에 가서는 거의 홀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대화에 발 담그는 것이 부끄럽고 부적절하게 느껴졌습니다.

 

30살이었던 그 시절로부터 6-7년이 지났습니다. 참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학우들이 주고받던 현실교회에 대한 논리, 사역자가 이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한 논리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되어 목회자의 직분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개척을 시도하고, 또 누군가는 만나는 사역지마다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누군가는 상황이 잘 풀려서 소위 <성공하는 가도>를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또한 2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우리는 학우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누군가는 잘 되었고 잘 풀렸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잘 안되었고 잘 풀리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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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의 바울은 가장 과대평가된 사역자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바울의 삶을 흠모하고, 모든 목사님들이 바울이 위대한 사역자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는 흠모할만한 사역자이며, 위대한 사역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신약성경 저술의 다수를 기록한 집필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방방 곳곳에 교회를 세웠던 선교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교회에 머물지 않고 다수의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교회개척가인 동시에, 다수의 교회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교회 네트워킹 내지는 인적 네트워킹의 전문가입니다. 그는 분명 흠모할만한 사람입니다. 존경받을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의 모습은 역사가 평가한, 특별히 교회의 역사가 평가한 바울의 모습입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바울이 죽고 나서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바울이 세웠던 교회들, 바울의 영향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만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응당 그들은 바울을 존중했고, 바울의 가르침을 따랐기에 바울은 교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시대 속에 바울이 주류라는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끝내 바나바와 불화한 인물입니다. 바울은 끝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과 말미암아 치열한 쟁투를 벌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웠던 교회(갈라디아교회 혹은 고린도교회)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바울의 편지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실제 논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잠입한 낯선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유력한 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야고보, 베드로, 적어도 바나바에 준하는 인물이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가 갈라디아서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할 경우에 당시의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바나바와 같은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들과 관계가 소원한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만 믿으면 할례는 필요없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이방인은 그냥 할례를 받지 말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야고보, 베드로, 바나바는 <할례를 안받아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할례를 받는게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갈등구도가 이미 깔려져있다고 보자면 고린도교회에 잠입했던 거짓선교사들은 바울이 흔히 알려진 교회의 지도자들(야고보, 베드로, 바나바)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는, 자신들은 그들에게 받은 추천장이 있으니 이제 바울보다는 자신들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촉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짓선교사들의 추천장을 본 사람들은 무척 흔들렸을 겁니다. 더군다나 거짓선교사들의 말을 듣고 보니 바울이 정녕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이냐 하는 부분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추천장이 없었습니다. 또한 실제 예수님의 직계 제자도 아니였습니다. 또한 흔히 알려진 교회의 지도자들과 관계도 좋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그의 사역은 결코 성공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을 비롯한 바울을 지켜보던 이들에게 바울의 모습은 이와 같았습니다. (6:3-5)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말 그대로 풀리지 않는 사역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당시의 그의 선교사역은 성공적이었을까요? 딱히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당시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에 소재하고 있던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폭발적인 전도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선교사역은 일종의 게릴라전과 같았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에 근거하여 교회를 꾸려나갈 소수의 인원이 확보되면 다시 지역을 떠났습니다. 혹은 동역자들을 파송했습니다. 당시에 그 어떤 누구도 바울의 사역을 성공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남긴 편지가 신약성경의 주류가 되며, 교회의 주류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바울을 바라보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바울에게 추천장을 요구합니다. 그에게 사도의 자격을 요구합니다. 그가 세웠던 교회지만, 그럼에도 이제 와서는 물어보는 겁니다. 당신은 진정한 사도가 맞느냐고 말입니다.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맞느냐고 말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었을까요? 자신이 간헐적으로 개척을 통해 세워진 고린도교회의 교우 일부들이 그에게 자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추천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까요? 오늘날로 말하면 박사학위증명서를 요구하는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다른 교회에서 부흥시켰던 사례를 요구하는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잘나가는 유명한 목사님들과의 친분을 요구하는 겁니다. 바울은 결단코 이런 것들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껏 성공적인 사역을 한 경험도 없고, 학위도 없고, 친분도 없이 소수의 무명의 동역자들과 사역을 감당해왔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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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갖게 된 인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보이는 것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에 대한 감각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대적자로 묘사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보여지는 것에는 대단히 경건한 행태를 실천합니다. 반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발견되는 것은 보여지는 것 이면에 있는 그들의 경건하지 못함입니다. 하나님의 경건을 실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죽일 공모를 하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위선>이라 말합니다. 보여지는 것은 거룩할 수 있습니다. 보여지는 것은 착할 수 있습니다. 보여지는 것은 대단히 멋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피를 벗기고 들어가면 그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은 이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최근에 작고하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설교집이 나왔습니다. 그가 즐겨 인용하던 싯구가 제목입니다. “물총새에 불이 붙듯무슨 말인지 명확히 뜻이 들어오지 않는 제목입니다. 하지만 시의 전체적 맥락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 삶이 일치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란 생각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제가 선교단체에 있을 때에는 선배들이 이런 말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자”, “한 줌으로 사라질 것들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자일반적으로 위선은 겉으로 보일 때는 번지르르 하지만 실제로는 내실이 부족함을 뜻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겉모습만큼 내실을 채워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선교단체 때 들었던 구호는 거기서 또 한 걸음 나아갑니다. 아예 더 비천하고 낮고 남들이 흠모하지 않는 삶을 쫓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더욱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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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바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의 삶은 흠모할 것이 없었습니다. 결실이 없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바 이면에는 귀하고 값진 것이 틀림없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흥미로운 비유를 하나 사용합니다. (3:13) 모세가 한때 영광으로 말미암아 수건을 썼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영광이 머물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잠깐 사라질 영광을 수건으로 가린 것, 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한낱 수건으로 하나님의 곧 사라질 영광을 감췄던 것처럼, 바울의 삶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춰져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삶은 마치 수건처럼, 그 영광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역설적으로 작동합니다. (10) “예수의 죽음(이른바 복음사역으로 인한 환란)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우리 몸에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12)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하사고 생명은교회공동체 안에서 역사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당하셨습니다. 이를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이사야는 (53: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구원을 제시하는 방식은 고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삶 또한 철저히 이 방식을 따라갑니다. 성공의 길, 화려한 길, 멋진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 실패의 길, 좌절의 길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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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추천서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스스로를 추천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 추천해서 겪은 일들이 바로 환난과 궁핍, 고난과 매맞음, 갇힘과 난동,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 먹지 못함이라고 나열합니다. 그는 고통 가득한 현실을 향해 스스로를 추천하며 나아갔습니다. 이런 질그릇 같은 형편없는 삶을 향해 나아간 바울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인 보배를 증명해보였습니다. (6:6-7) 그 가운데에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살아냈다는 겁니다. 그의 삶은 영광이 충만한 삶인 동시에 욕됨을 받아내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악한 이름으로 매도당하는 삶인 동시에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혹자는 바울을 향해 추천서도 없는 거짓사도이며 속이는 자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그는 속이는 자가 아닙니다. (8) 참된 자입니다. 또한 그는 아무런 추천서도 가질 수 없었던 (9) 무명한자라고 매도당합니다. 하지만 그는 유명한 자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으며 징계를 받은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근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사람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 것도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바로는 바울의 삶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그가 진정한 사도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울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숨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숨겨진 채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찾아왔습니다. 한낱 말구유의 밥통에 숨겨진채로 하나님이 누워계셨습니다. 정치범을 못박는 십자가라는 무시무시한 사형틀에 숨겨진채로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은 이처럼 질그릇입니다. 의도적으로 보배를 질그릇 안에다 두고는 질그릇을 툭 던지십니다. 바울은 질그릇 같다며 비난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질그릇이기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겉을 보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기보다는 질그릇 안에 담겨진, 숨겨진 영광을 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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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들 스스로를 증명하고 입증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젊은층들은 SNS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삶을 사는지 증명하고 싶어하며, 또한 SNS를 통해 자신보다 더 행복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삶을 사는 이들을 부러워합니다. 젊은층들만 그럴까요? 어느 순간부턴가 각각의 교회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영상장비를 설치하여 세련된 영상을 올리고, 또한 교회 온 곳에다가 현수막을 내겁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영상을 제작하고 현수막을 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교회가 자랑하기 위함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도 인천의 목사 부부가 오미크론 감염의 고리가 된 사태가 있었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이해가 안되지만 그 분이 담당했던 사역이 이주민 사역들이더군요. 불법 체류자나 혹은 기타 특수한 상황이 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어쨌건 우리 안에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방어하고 싶은 반응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교회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반응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에는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비난을 듣기 힘겹다는 정서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칭찬을 들어야 하고, 교회는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하고, 미움을 사서 안된다는 일종의 <착한 아이 증후군>을 교회 전체가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교회든, 목사든, 그리고 성도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면 우리를 판단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추천장을 요구합니다. 더 나은 교회임을 입증해보라고, 더 잘난 목사임을 입증해보라고, 건전하고 이로움이 되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해보라고 말합니다. 이런 입증의 요구를 받고 있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다르게 대응합니다. 자신의 삶은 마치 질그릇과 같다고 말할 따름입니다. 보잘 것 없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정면돌파합니다. 하지만 질그릇과 같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모습 가운데 감춰진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가 있기에 자신은 그런 비난을 감수하겠다고 말합니다.

 

정녕 오늘날 교회가, 목사가, 성도들이 받아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지 않을까요? “우리에겐 보배가 있는가?, 우리에겐 예수가 있는가?, 질그릇 같은 우리의 삶 안에는 정녕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 앞으로 어떤 목사가 되어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더 학위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더 경력을 쌓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더 스스로를 어필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는 부담감과 불안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때 신대원에 다니던 동기형들이 주고 받던 어느 교회가야, 어느 학위를 따야, 어떤 경력을 쌓아야된다는 말들이 이제야 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왕왕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런 고민과 질문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정녕 제가 나이를 먹어서일까요? 정녕 제가 현실을 알아가기 때문일까요? 사실은 제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은 제 안에 예수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은 보배가 사라지고 있으니 질그릇 같은 나의 삶을 어떻게든 놋그릇이라도, 은그릇이라도 치장해보려고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대림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그 날처럼,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내일일 수도 있고, 먼 훗날 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날 우리는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해 판단받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보배가 있느냐. 우리 안에 예수가 있느냐.

 

보이는 것에 의해 사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삶,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마지막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서도 보배를 증명할 수 있는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