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왕상 3:1-10)

2022. 11. 27. 02:37
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2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저는 목사이다보니 간간히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또한 스스로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회에서 ‘성경’을 잘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잘 가르치고, 성경대로 설교를 잘 하면 그곳이 좋은 교회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성경’이 전부냐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찬양과 기도가 뜨거운 교회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또 최근처럼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주차시설, 자모실 시설,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 시스템 등등이 ‘좋은 교회’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좋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치 교회가 좋아지기 위해서라면 결국 ‘교회 운영을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마치 좋은 마트를 찾는 것처럼, 좋은 미용실을 찾는 것처럼, 좋은 극장을 찾는 것처럼, 좋은 교회 또한 우리가 철저히 소비자의 입장에서 고르는 느낌입니다. 사실 오늘날 현대인 대다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교회를 선택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그것이 옳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교회는 마트, 미용실, 극장과 같은 ‘운영주체’가 잘해야 하는 어떤 곳이 아니라, 축구팀이나 야구팀처럼 구성원 모두가 함께 발을 맞춰서 잘해야 하는 곳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교회를 <마트, 미용실, 극장>처럼 여기기보다는, <축구팀이나 야구팀>으로 여기게 되면 조금 답변의 결이 달라집니다. 교회에는 주차장이 좋아야 해, 설교가 좋아야 해, 자모실 시설이 좋아야 해, 음향이 좋아야 해 등등의 답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수많은 교회 중에서 좋은 교회를 선택하는 소비자의 입장이 아니라, 수많은 교회 중에서 내가 속한 우리 교회를 가꿔나가는 팀원의 입장에서 서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무엇을 위해 노력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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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다윗과, 솔로몬.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인물입니다. 다윗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 혹은 수많은 시편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할 때에 ‘다윗’과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솔직한 마음으로 예배하자는 류의 말들을 서로 주고 받습니다. 또한 솔로몬하면 지혜가 떠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특별히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답없는 실갱이를 할 때에, 친자확인검사도 없던 시절이지만 솔로몬은 가장 지혜로운 판결로 그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다윗과 솔로몬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본문에서 다윗을, 그리고 솔로몬을 어떻게 평가하고, 또 기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오늘 적어도 열왕기상이라는 성경 본문이 묘사하는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민낯을 좀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열왕기상 3장입니다. 이에 대해 해설하기 전에, 앞서 열왕기상 2장의 문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은 다층적인 인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게 예배하는 예배자 다윗에 대한 기록에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반면 어떤 성경본문은 교활한 정치가 다윗의 면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적인 사울, 혹은 블레셋, 혹은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대할 때에 다윗의 모습은 마치 태종 이방원과 유사합니다. 좋게 말하면 매우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나쁘게 말하면 소름끼치게 교활한 정치인입니다. 특별히 열왕기상 2장 초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죽음을 앞둔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은 다윗의 양가적인 모습 모두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먼저 솔로몬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킬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이는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예배자 다윗의 면모입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요압과 시므이를 살해하라는 명을 남깁니다. 이는 다윗이 권력을 잡았을 당시에 미처 처치하지 못했지만, 후일에 솔로몬이 권력을 잡게되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이들을 재빨리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왕권이 강화되지 않았던 시대, 호시탐탐 이스라엘 민족을 노리던 이민족이 있었던 시대, 그 시대 속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치가 다윗의 면모입니다.

 

솔로몬은 두 가지 유언을 듣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열왕기상 2장 후반부에서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던 예배자 다윗의 유언은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반면 ‘잔혹한 정치가 다윗의 유언’만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정적들을 제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언에는 없는 인물인 제사장 아비아달의 제사장직을 박탈하고 낙향시켜버립니다. (그 또한 역모의 싹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처럼 열왕기상 2장 후반부는 ‘잔혹한 정치가 다윗’을 꼭 닮은 솔로몬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3장이 2장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개역개정 본문은 생략하고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3장 1절 시작하는 단락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3장 1절이 시작하는 단락에서 숨어있는 문장을 읽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의 못된 모습만 꼭 닮아서 모든 정적들을 싸그리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성경본문은 말합니다. (히브리어 본문 순서대로 말하자면) “그리고 혼인조약을 맺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그래서 파라오의 딸을 다윗 성으로 데려왔죠.” 우리는 여기서 ‘혼인조약’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대신에 이집트를 의지하겠다는 솔로몬의 통치전략이며, 외교정책입니다. 이집트와 혼인관계를 맺어서, 이집트 파라오의 부마가 되면, 이집트가 이스라엘 왕국을 지켜줄 것이라는 솔로몬의 불신앙이 고스란히 드러난 문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의 신앙적인 모습은 전혀 닮지 않은 왕으로,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 다윗의 교활한 정치가의 모습은 완전히 꼭 닮은, 정말 나쁜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파라오의 딸을 다윗 성으로 데려왔죠.’라는 말은 잠깐, 임시적으로, 다윗 성에 모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문장은 가관입니다. 잠깐 임시적으로 다윗 성에 데려온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집, 즉 솔로몬의 왕궁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본문은 솔로몬의 왕궁 뿐만 아니라, 주님의 집, 즉 여호와의 성전이, 그리고 주변의 성벽이 지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본문이 은연 중에 폭로하는 솔로몬의 관심사는, 바로 솔로몬의 왕궁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 건축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이어지는 2절과 3절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여러 곳에 있는 산당’이라고 번역합니다. 

 

우리로 따지자면,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속신앙이나 토속신앙을 가진 분들이 산이나 계곡 곳곳에 돌을 쌓아두고, 촛불을 피우고 제사지내는 곳이 있습니다. 즉 그때 당시에 ‘여호와의 성전’이 건축되지 않아 많은 이들이 그런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계곡에서 돌을 쌓아놓은 곳, 촛불을 피워놓은 곳, 이런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떨까요? 은연중에 우리의 신앙에는 무속적이고 토속적인 이교신앙이 묻어날 것입니다. 당대 백성들 또한 우상숭배의 문화, 이교신앙의 관습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솔로몬 때문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의 왕궁 건설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열왕기상 2장 후반부부터 3장까지는 구구절절 성경본문이 솔로몬의 인생을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신앙적이지 않은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는 결코 훌륭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난도질하다가 갑자기 미안해진걸까요? 문득 3절에서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다” 조금 더 문맥의 늬앙스를 살려서 의역하자면, “아, 물론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긴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완전 무시한 것도 아니였어요”에 가깝습니다. 다만, 본문은 솔로몬이 그렇게까지 나쁜 인물로 보진 말라고 나름 변명을 덧붙이면서도, 사실상의 방점을 이후 문장에다 찍습니다. 좀 더 늬앙스를 살리자면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윗의 법도를 무시한 것도 아니였습니다만…그는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솔로몬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상숭배의 문화와 혼합되는 것에 전혀 경각심이 없었습니다. 재빨리 성전을 짓고 신앙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또한 일반 평범한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우상을 숭배했던 가나안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예배하던 장소인 산 높은 곳에 있던 산당 올라가, 바알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게, 아세라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더군다나 4절 초반부를 히브리어 본문의 늬앙스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그는 매번 예배할 때마다 기드온 산당으로 갔습니다.”에 가깝습니다. 우상에게 제사드리던 그곳에서, 솔로몬은 전혀 경각심 없이 예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거기서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일천마리의 송아지를 잡은 것일까? 일천 번이나 제사를 드린 것일까? 솔직히 모호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천번제’라는 제사의 형태는 이 본문 외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일천번제’라는 방식이 가나안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제사방법은 아니었을까요? 물론 성경은 이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결과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그 형식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사가 아니었기에) 기뻐하실만한 제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솔로몬이 하나님께 했던 기도의 문장을 살펴봅시다. (6절)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이는 사무엘하 성경본문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은 무척이나 거북함을 느껴야 합니다. 다윗은 간음한 인간입니다. 살인을 교사한 인물입니다. 또한 정적을 매우 거침없이 제거했던 인물인 동시에, 매우 교활한 정치가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을 긍휼히 여겨주셨고, 그런 교활하고 추악한 다윗의 면모 중에서도 ‘예배자’로 서 있었던 모습을 ‘높게’ 보시고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즉 솔로몬이 다윗의 인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기도한다면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은 간음과 살인교사와 교활한 정치가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먼저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그 은혜를 지금껏 허락하셔서 저에게까지 왕의 보좌를 허락해주셨나이다’ 하지만 솔로몬의 기도는 마치 다윗이 신앙적으로 무척 훌륭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은혜를 허락하실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보자면 열왕기상이 기록한 솔로몬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0점 아닙니까? 그는 꼭 지켜야 할 다윗의 유언인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라는 유언을 싸그리 무시합니다. 반면 그는 교활하게도, 정적들을 살해하라는 다윗의 유언은 고스란히 이행합니다. 또한 이집트와 혼인동맹을 맺습니다. 여호와의 성전보다는 자신의 왕궁 건설에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상숭배와 결합하는 것에 대한 자각조차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우상숭배 문화가 드려지는 곳에서, 전혀 장려되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자신의 왕좌조차도 다윗이 하나님께 잘했기 때문에 얻어낸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고백에 기반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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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배우고, 교회에서 목회자의 삶을 사는 것. 사실 참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장려하고 싶은 일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는 것이 독이 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청소년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에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일 처음으로 1년치 교회재정에 대한 보고서를 보게 되었을 때는 스스로 근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걸까? 교회에 회비를 내는 것일까?’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교회 내에 일어나는 일을 많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에게 실망은 더더욱 커져갑니다. 하나님만을 위해, 매우 신앙적이었던 일들이 사실은 극히 인간적인 일들이었고 세속적인 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몰려옵니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겪는 마음의 고통이 꼭 그렇습니다. 알면 알수록 시험에 듭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봉사하는 손길들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어? 중직자 선거 때문에 그러는거 아니야?’하는 생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피자와 치킨과 같은 간식을 먹는 장면이 흐뭇하게 느껴졌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 교회 헌금으로 사치를 부리는거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독입니다. 아는만큼 나쁜 것만 보입니다. 아는만큼 아니꼬운 것만 보입니다. 

 

저는 지난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특히 2019년 어간에 무척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아는게 많아질수록, 보이는게 많아질수록, 사람들이 싫어졌습니다. 미워졌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정말 예수를 믿을까 하는 회의적인 감정이 가득 올라왔습니다. 더군다나 그때는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건축을 시작하게 되면서 신앙인들의 무척 저열한 욕망들의 민낯을 더욱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니,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하나님께 했던 기도의 제목은 단순했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도제목은 점점 바뀌어갔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후 저는 더 이상 마음이 피폐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5년간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1년간 푹 쉬었습니다. 코로노가 터지면서 교회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 재밌게도 사람을 안보니까, 그렇게 미워하던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더군요. 참 재밌게도 교회를 안가니까, 그렇게 마음이 힘들었던 교회가 다시 좋아지기 시작하더군요. 1년 동안 사역을 휴식하면서 제 마음이 참 많이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나쁘게 보려면 얼마든지 나쁘게 보이고, 좋게 보려면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쩌면 그때 그 시절은 제 마음이 너무 분주했기에, 제 마음 안에 미움과 다툼이 너무 가득했기에, 유독 사람들이 더 나뻐보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1년간 푹 쉬면서 제 마음 안에 미움과 다툼이 물러가자, 그때 지긋지긋했던 그 사람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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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성경본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본문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성의없이 읽고 넘어갔더라면,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감동할만한 기도를 했고,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지혜’를 선물로 내려주신 본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기도를 하자는 마음의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본문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수록,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솔로몬의 흠집이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가나안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우리 교회 건물을 본다면 ‘와 교회 참 멋지네’라고 지나가지만, 막상 날마다 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리고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 교회가 많이 낡았네, 고칠 것이 많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왕기상 2장부터 조금 꼼꼼히 읽는다면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이면에 있는 솔로몬의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모습, 어떤 의미에서는 왕으로 권력을 행사할 모습에 대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모습의 솔로몬이,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내용을 전제로 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담긴 짧은 문장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입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7절-9절)

 

쉽게 말해 삶으로 보자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0점짜리 솔로몬이,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께 잘 해드렸기 때문에 복을 주실 수 밖에 없었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기도의 내용만큼은 정말 순전한 솔로몬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아직 아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왕 역할을 못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다.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한 사람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처음 기도의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은혜를 줬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었던 것인데, 마치 다윗이 잘했기 때문에 은혜를 줄 수 밖에 없었다는 망발을 내뱉고 있습니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더러운 입을 꼬매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끝까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는 솔로몬의 신앙적이지 않은 삶에 대해서 눈을 감습니다. 솔로몬의 기도 초반부의 잘못된 내용에 대해서는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저는 아직 아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왕 역할을 못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문장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눈 또한 반짝거립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이와 같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솔로몬의 그 기도가) 하나님의 눈에는” 저는 10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가 보시기에 좋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그의 잘못된 삶의 행실, 그의 잘못된 기도내용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름다운 기도의 한 문장에만 눈을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미운 모습도 있지만 눈을 감으셨습니다. 역겨운 모습도 있지만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마지막 기도의 문장에만 눈을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참 좋았습니다, (솔로몬의 그 기도가) 하나님의 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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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복음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봐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보호하신다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쁜 모습에는 다소 눈을 감아주시고, 우리의 좋은 모습에는 눈동자를 반짝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남녀간의 사랑이 꼭 그와 같습니다. 간혹 제 아내에게 자기 친구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절대적으로 비교하면, 제가 목사다보니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결혼할 때에는 조금 더 잘생겼고, 날렵하고, 젊었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다보니 그런 장점조차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그런 저의 안좋은 모습에는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모습에만 눈동자를 반짝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가 가끔 그런 말을 합니다. “진짜 객관적으로 보면 안 좋은 남편인데 나는 좋아” 저는 하나님의 우리 성도들을 향한 사랑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다 나쁜 놈입니다.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삶과 말과 신앙이 순도 100%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나쁜 점 모습은 다소 눈을 감아주시고, 우리의 좋은 모습에 눈동자를 반짝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모습에만 눈동자를 반짝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에는 눈을 감으시고,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키고, 진짜 사랑스럽게 빚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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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그러니까 소비자의 입장에서 ‘좋은 교회’말고, 우리가 다 함께 만들어가자는 입장에서 함께 공유할 법한 ‘좋은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쁜 모습에는 눈감아주시고, 굳이 사랑스러운 모습에만 눈동자를 반짝이는 모습을, 우리가 따라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서로 좋게 봐주는 겁니다. 정말 좋아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애써 따지면 나쁜 것 구구절절 100가지라도 말할 수 있겠지만 좋은 것 1가지 때문이라도 서로 좋게 봐주는 겁니다. 이는 서로 잘못한 일을 운운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허물이 있어도 덮고 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에 관한 기본적인 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하물며 부모님이라도 자식에게 실수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실수한다고 해서 나쁜 부모님이냐면 그것은 아닙니다. 실수는, 허물은, 그대로 따로 해결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좋게 보자는 말입니다. 실수했다고 나쁜 사람 취급하지 말고, 다소 허물이 있다고 나쁜 사람 취급하지 말고, 서로 좋게 보자는 말입니다. 실제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성도’라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거룩한 사람’, 우리 중에 정말 거룩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누가 보기에도 거룩한 사람이 1명이라도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서로서로 ‘거룩한 사람’으로 퉁 치고 넘어가자는 겁니다. 거룩하지 않은 모습에는 눈을 감고, 한 가지라도 거룩한 모습이 있다면, 거기에 눈동자를 반짝여보자는 겁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리 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0점짜리 솔로몬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한 자락의 순전한 기도내용에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리 또한 우리 서로를 좋게 봐줍시다. 좋게 봐주는만큼 서로 격려도 하고, 응원도 해줍시다.

 

서로 좋게 보다보면, 어느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섬기는 가나안 교회가 어느새 참 좋은 교회였구나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