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시나요?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은 부활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덤에 묻힌 자들을 다시 살려주실 것들을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의로운데, 누가 봐도 정직하게 살았는데, 누가 봐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았는데,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옛 일제강점기 시절을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누가 봐도 멋지고 의로운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윤봉길, 안중근, 유관순 등등. 똑바로 살아간 사람들이 죽어간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가요? 뿐만 아니라 그들과는 정 반대로 살아가는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 얼마나 끔찍한가요?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런 세상이 뒤집어지길 기대했습니다. 부활이 꼭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악인들은 떵떵거리면서 살고 의인들은 죽음 당하는 이 완전히 엉망진창인 세상의 정의가 올바로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무덤에 묻혔던 의로운 사람들, 정직하게 살아간 사람들, 하나님 백성 답게 살아간 사람들, 쉽게 말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살아나야만 했습니다. 즉 부활은 엉망진창인 세상에 정의가 바로잡히는 신호였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어봤자 생명이 하나 더 있어서 다시 살아나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바로 엉망진창인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가게끔 복원되는 이야기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치면 해킹된 스마트폰이 초기화되는 이야기고, 컴퓨터로 치면 바이러스 걸린 컴퓨터가 포맷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던 장면을 떠올려봅시다. 예수님이 남기셨던 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를 증언합니다. 그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처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교활한 정치가인 빌라도조차도 예수를 심문한 후에 그를 십자가에 메어달지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집니다. 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의로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재판과정은 매우 졸속 행정으로 이뤄집니다.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로마제국의 법과 제도가 무너져있다는 방증입니다. 로마제국의 법과 제도는 정의를 올바르게 구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말 그대로 그가 살아간 세상 자체가 불의하다는 증거 그 자체였습니다. 가장 의로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정의의 죽음이었습니다. 올바르고 정의롭게 살아간 사람들의 죽음을 대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대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20:1)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왔을 때에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이후 (2절) 베드로와 사랑하시던 제자, 즉 사도 요한이 와서 무덤 안에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6-7절)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남겨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예수님께서 남기셨던 말씀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절)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냅니다. 그리고는 각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혹시나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갖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상상해봅시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요? 죽어서 이제는 볼 수 없던 스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그 정도의 기쁨인가요? 아닙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죽어나가고 간사하고 불의한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사는 엉망진창인 이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복원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았다가 억울하게 죽었던 대표자 예수님께서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억울하게 죽었던 모든 이들이 살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간사하고 교활하면서도 불의하게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이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부활’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스승을 (생전에는) 추앙하다가도, 스승이 죽으면 그 운동은 끝이 납니다. 더군다나 십자가라는 사형제도는 현실 속에서 정치적 반란 주동자로 지목당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스승의 죽음과 함께 그들은 모여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스승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만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대다수의 제자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다시 어부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고, 다시 세리로 돌아가 세금을 징수하고, 다시 혁명당으로 돌아가 반란을 꾀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 세상 가운데 들어오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 가운데 구현되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대하던 엉망진창인 이 세상이 바로잡히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기대하던 부활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부활은 전면적인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모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존재들이 살아날 것을 믿고 기대했습니다. 단지 예수님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불의한 사람들이 심판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단지 예수님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걸맞게 변화되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면적인 부활은 아니지만, 자신이 모시고 있던 스승 예수님에게서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를 두고 ‘부활의 첫 열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세상에 끝에 일어날 종말의 사건이 제자들 가운데로 불쑥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고등학교에 공식적으로 입학하기 전에 모이는 예비소집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대학교에 공식적으로 입학하기 전에 모이는 오티와 같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진 않았으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징조와 같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모여서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즉, 새로운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죽여도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선하고, 올바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향해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이라 규정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아마도 노년에 쓴 편지에 가깝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이미 믿음의 1세대들 대다수가 죽고, 믿음의 2세대들이 모여있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 다니면 좋긴 한데, 교회 다니면 얻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은데, 교회 다니면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도 생기는데, 그들이 그것으로 만족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 가운데서의 삶이 전혀 바르지 않고, 간사하게 살고, 거짓말 하며 살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면서도, 여전히 교회에 와서 좋은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으며,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는 것으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는 바른 삶이 필요없습니다. 간사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거짓말 하며 살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교회에 나와서 좋은 말씀을 듣고, 위로를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를 두고 요한일서는 말합니다. (2:16)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그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는 추구하되 썩어 없어지지 아니할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른 삶은 썩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삶을 살아낸 신앙인들은 죽어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삶은 썩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삶을 살아낸 신앙인들은 죽어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은 썩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어도 결국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즉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들은 바, 눈으로 본 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실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관념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보고 만지고 겪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바른 삶, 정직한 삶,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 충분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신앙, 즉 실제적인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는, 이 세상이 결국 바로 잡힐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른 삶을 손해보는 것 같지만 손해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한 삶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손해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손해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라는 이야기는, 이처럼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코 손해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저는 아내는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세 군데의 직장에 원서를 넣었고, 세 군데 모두가 면접을 오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직장의 면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직장의 면접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세 번째 직장의 면접에만 응시했습니다. 세 군데의 직장을 모두 비교해보면 조건 혹은 자격 측면에서 세 번째 직장이 다른 두 군데의 직장보다 하등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세 번째의 직장 면접에 응시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경험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매우 드물지만, 매우 분명하게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아내는 설교를 듣는 그 순간 바로 자신이 일반적으로 묻고 따지는 채용 조건에 매몰되지 않고 좀 더 영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고민 끝에 세 군데의 직장 중에서 가장 부족해보이는 세 번째의 직장에 면접을 응시했고,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시나요? 저는 제 아내가 적어도 직장선택의 과정에 있어서 부활을 믿고,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선택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참 흥미롭게도 아내는 나름 신앙적인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불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면접을 갔음에도 떨어지는 치욕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은 이후 딱 10일째가 되던 날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채용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아내는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행동했고, 실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어떤 삶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보기에 어리석은 선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선택을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힘겹고 어려운 위기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끝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실제 삶에서 ‘부활’이 일어나는 광경을 목도하는 삶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말은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은 곧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태도는 영원할 것입니다. 죽는다 할지라도 결국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예수님을 쫓아가봅시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