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 이제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2021. 11. 21. 11:21

2006년 처음으로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목회자의 소명을 받고 나니 그제서야 목사가 하는 사소한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수요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전도사님 한 분이 올라오셔서 잠깐의 찬송인도를 하셨습니다. 또한 부목사님들이 각 예배때마다 교회 내의 인원들을 계수하셨습니다. 하나, 하나 눈에 보이지 않던 업무들이 보일 때마다 스스로 물었습니다. “잘할 수 있을까?” 찬송은 별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설교는 대충 따라하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선교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또한 성령의 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단순히 찬송부르고 설교를 하는 것을 넘어서) 교인들에게 어떻게 영향력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믿게 만들 수 있을까요? 신앙이 미지근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뜨겁게 도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읽기와 기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동기부여를 하면 좋을까요? 대학생 당시 선교단체는 다양한 독려활동을 <동기부여>라는 이름으로 규정했습니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효율도 없어보였습니다. 따라서 성령에 대해, 성령운동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하는 유일한 동력, 미지근한 신앙인들이 뜨거운 신앙을 갖게하는 유일한 동력, 이 모든 것은 인간적인 <동기부여>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의 불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처럼 보였습니다. 성령을 사모했습니다. 기도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몇몇 마음 맞는 친구들과 깊이 예배하며 성령을 충만히 경험했습니다. 은사와 능력들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배우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령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긴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성령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동기부여든, 성령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목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은 <목사들의 목사>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현대사회를 살면서 궁극적으로 목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많이 남기신 분입니다. 그 분의 자서전에는 목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인생에 행하시는 일을 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나 자신의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서 하시는 일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고 싶습니다. (469)”

 

목사가 해야 할 일, 아니 목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한 마디 정도 더 덧붙인다면, 사람들은 도저히 하나님이 행하시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고 있는 묘한 느낌을 스스로 느끼고,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시다”고 선언하는 것, 바로 그 일이 목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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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요한계시록을 살펴볼까 합니다. 지금껏 제가 성경을 풀어가는 방식에 여러분이 적응이 되셨다면 대략 느끼실 수 있겠지만, 저는 성경 각 권을 해설할 때 모든 본문을 치밀하게 주석하는 편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가지의 소신이 있다면 성경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오늘날 성경 각 권의 문장과 단어와 의미들을 다 간파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각 권의 주제 메시지를 다룰 수 있는 몇 문단을 선별하여 각 권이 말하고 있는 전반적인 메시지를 중심으로 강해를 해나가는 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단어와 각 문장이 뜻하는 바를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대충, 어설프게, 계시록이 전반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계시록을 살펴볼 때에 짚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이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1:9) 요한은 지금 예수의 환난, 나라, 참음에 동참하는 한 명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다가 밧모라는 섬에 갇혀있을 때에 본 환상이 오늘날의 <계시록>으로 기록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요한이 아마도 섬에 갇혀있을 때의 시기는 60년대 후반입니다. 반면 계시록 자체가 담고 있는 도시의 정황, 교회의 정황을 살펴본다면 90년대 후반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60년대에 요한이 봤던 환상을 기초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메시지를 발전/심화시켜서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합니다.

 

60년대 후반에는 네로 황제가 다스렸습니다. 90년대 후반에는 도미티안 황제가 다스렸습니다. 둘 다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기독교에 대해서 엄청난 박해를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우리가 정치사회적인 관점으로 상상을 해본다면, 특정 종교에 대해서 박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권력이 강화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황제 모두 강력한 황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독재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그는 밧모섬에 갇혀있습니다. (혹은 밧모섬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강력한 황제의 권력입니다.

 

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는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시록은 온갖 상징과 수수께끼를 풀어서 <미래를 관통하는 예언>으로 읽어야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시록은 지금, 현재,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네로 황제든 도미티안 황제든)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아니라, 바로 죽임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온갖 정치, 사회, 교회의 문제들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계시록을 진지하게 읽게 된다면 우리의 눈 너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눈을 드십시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기록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봤던 바처럼 (1:9) 요한은 밧모 섬에 갇힌 채로 있습니다. 그는 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10절) <주의 날>에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가 본 환상 속에서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사자에게 편지를 쓰라고 분부하십니다. (참고로 많은 경우 현대적인 우리의 시선에 근거하여 편지를 수신하는 <사자>들을 각 교회의 지도자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장르적 특성상 여기서 일곱 교회의 <사자>들은 바로 각각의 교회를 담당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각각 일곱 교회의 <사자>, 이른바 영적 존재인 교회를 담당하는 천사에게 보낸 편지는 요한에 의해 기록되어 각각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 및 소아시아 지역 다수의 교회에 보내집니다. 이는 역설입니다. 본래 상상해보면 소아시아의 교회가 사도며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던 요한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뢰고 지침을 구해야 할텐데, 요한은 자신의 환상 속에서 교회들을 담당하는 천사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소아시아의 교회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는 계시록의 기본적인 셋팅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는 이미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천상의 일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시록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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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국 내의 기독교 여론조사기관인 바나그룹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의 목회자 502명중에서 192명이 전임목회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10개월 전에도 비슷한 조사를 했는데 약 9% 가량 증가한 수치라고 합니다. 바나그룹의 해설에 따르면 코로나팬더믹 이전에도 목회자들 사이에 번아웃 증후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코로나팬더믹 18개월여가 지난 지금은 성도들의 문제 및 교회 내의 재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팬더믹이 전 세계 사회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또한 교계에 미친 영향도 꽤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더믹 이전에도 목회자 중의 다수는 번아웃에 시달리며 목회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누구보다도 소명의식이 있어야 할 직업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구약성경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근래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바벨론 포로기인 기원전 500년부터 페르시아 시기까지, 더 멀게는 헬라제국이 유대를 다스리던 시기까지 구약성경이 우리가 갖고 있는 책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전에는 한낱 단편모음집이거나 혹은 구전모음집이었던 구약성경이, 한 편의 책으로 기록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따져보면 정치적/사회적 요인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이 책으로 기록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학적 요인입니다. “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하게 두셨을까? 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이방에게 넘겨주셨을까? 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거하던 성전이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왜 우리는 포로로 끌려왔을까?”

 

목회의 소명과 별개로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어렴풋이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 이후 20살이 되자마자 참여했던 수련회에서 성령세례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의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세상이 흘러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인생이 흘러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 있는데, 내 기도가 무기력한 것만 같고, 내 신앙고민이 해결되지 않아보이는 것 같은 겁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해갈되지 않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고 싶은데, 그게 어떤 길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목사들이 목회를 그만둘 생각을 할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심히 설교 준비해서 설교하는 만큼 하나님이 역사한다면 누가 그만둘려고 할까요? 내가 아픈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 흘리는만큼 그들이 낫고 회복된다면 누가 그만둘려고 할까요? 제가 짧게나마 느낀바 목회는 철저히 인과관계를 벗어난 일입니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잘되지도 않고, 내가 게으르다고 해서 안되지도 않는 일입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사람을 모을 수는 있을 겁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조금 열정적으로 일을 기획하고 수행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고유한 스케쥴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눈에 그런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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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각처에 있는 꽤 규모있는 도시의 교회를 지칭합니다. 하지만 이는 각각의 교회를 향해 쓴 각각의 편지라기보다는, 소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쓴 하나의 편지가 아닐까 보는 점이 적절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각각의 도시의 특징이 두드러진 지점이 있긴 하지만 주제적인 공통점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주제는 일치됩니다. 1)잘못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2)끝까지 견디면 보상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그리고 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의 문제가 니골라당, 사탄의 회당, 발람, 이세벨로 공통적인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곱 교회 중에서 첫 번째 에베소와 마지막 라오디게아에게 가장 크게 책망하시고, 두 번째 서머나와 여섯 번째 빌라델비아에겐 책망하지 않고 칭찬만 하시는 점에서 이는 문학적인 구조로 이뤄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서울, 대전, 대구, 부산에 각각 편지를 쓰는데 각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교회 전반을 통틀어 하시는 말씀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소아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로마제국 및 유대인과 함께 얽힌 문제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도 엿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함락된 이후 훗날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재건됩니다. 하지만 매우 초라했습니다. 시간이 또 지나서 헤롯에 의해 성전이 화려하게 증축됩니다. 매우 화려했지만 그와 함께 부패한 세력이 사실상 성전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사실상 헤롯 및 로마제국과 손을 잡은 부패한 세력이 성전을 다스리고 있었기에, 성전이 곧 파괴될 것이라는 예견은 파다했습니다. 그리고 70년에 결국 로마제국이 성전을 차지한 젤롯당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성전을 박살내게 됩니다. 이때 이후로 사두개인과 젤롯당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남겨진 유대인들은 딱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로마 전쟁 국면에서 사실상 로마의 편을 들게 됩니다.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회당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토대로 유대인 세계의 주도권을 잡으려 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묘한 알력다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방인 공동체인 교회가 매우 수상한 면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특유의 유일신 사상 때문에 로마로부터 황제숭배를 면제받았습니다. 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뒤섞인 교회는 황제숭배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지 않았음에도, 황제숭배를 거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리새인 유대인 공동체는 교회의 행태를 로마제국에 일러바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도권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 남겨진 바리새인 공동체는 로마제국과 손을 잡고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범사회적으로 압박을 가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한 이유로 고발하여 법적 처벌을 받게 만듭니다. 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은 회당에서 쫓아내어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유대인이 아니라며 또한 로마제국에 고발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교회 내의 유력인사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권력과 힘을 확보하기 위해 우상숭배와 이후에 있는 권력층과의 식사에 적절히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니골라당, 사탄의 회당, 유대인, 발람, 이세벨로 지칭된 모든 문제들은 이와 같은 넓은 범주의 로마-유대인-그리스도인 사이의 알력다툼을 상징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더라도 이를 감내하라는 겁니다. 그들은 사탄의 회당이나 다름없으니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게 빌붙어 교회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제국 내의 권력을 도모하는 방식을 중단하라는 겁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식사를 통해 제국 내의 권력과 인맥을 쌓는 일은 철저히 그만두라는 겁니다. 이는 결국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의 편지에 나와있는 단어인 (2:9) “환난과 궁핍”을 견디는 일을 의미합니다. 또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두고 (3:17) “나는 부자라”는 자기고백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낮아지는데 처하라는 겁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계시록이 일곱 번이나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말은 간단합니다. “이기는 자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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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1장 4절에 있습니다. “이제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이는 반복적으로 고백되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1)먼저 <이제도 계셨고>라는 단어는 출애굽하기 전에 모세에게 나타나 “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장면을 떠올립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계신 이>라는 의미로 여호와 하나님께 <이제도 계신 이>라는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계시록은 이를 예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출애굽하기 전에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2)이어서 <전에도 계셨고>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첫 장에 나오는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니>라는 문장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지금도 여전히 창조의 능력과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창조 당시에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3)마지막으로 <장차 오실 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미래에 도래할 분이라는 의미이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시제는 미래가 아닌 현재 분사입니다. 따라서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오고 계신 이”에 가깝습니다. 창조의 일을 담당하셨던 <전에도 계신 이>께서, 구원의 일을 담당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던 <이제도 계신 이>께서, 우리에게 <오고 계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직 모두 오진 않았지만, 우리는 그 분의 오심을 맞이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반복적으로 <믿음의 눈을 열어> 오고 계신 이를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들을 수 없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가 있다면 적어도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들을 수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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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교회가 점점 쇠퇴하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숫자와 영향력이 점점 떨어지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목회자들 및 평신도 지도자들은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지만,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묵묵부답인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 각자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목사인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또한 하나님이 전혀 대답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경청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그 분이 천상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 또한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힘껏 외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이 외침을 듣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뜰 수 있는 자는 주님의 오고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밧모섬에 갇힌 요한은 한낱 갇힌 몸이었지만 천상과 교회를 연결짓는 하나님의 통치를 눈을 열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보다도 유념할 것은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환상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눈을 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계시록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그저 확신을 갖고 행하면 보상이 있다는 말 외에는 없습니다. 그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십시오. 그저 주변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십시오. 또한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의 유혹을 거절하십시오. 세상의 핍박에 개의치않고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십시오. 

 

저 먼저 목사인 스스로에게 계시록의 말을 빌어 다짐해보겠습니다. 매주 설교를 잘 준비하겠습니다. 매주 진정성있게 설교하겠습니다. 맡겨진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또한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때로 상담이 필요하다면 잘 들어드리고 또한 잘 권면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이미 맡아야 할 책임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의 차례입니다. 계시록은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도저히 하나님의 통치가 잘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운행하고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오고 계신 이께서 말씀하십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끝까지 견딤을 통해) 이기는 자에게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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