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죽임당하신 어린양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2021. 11. 28. 09:05

2010년에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선교단체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이상과 가치들을 구현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교는 영도에 있었습니다. 부산지구에 속해있었지만 다소 떨어져있었기에 대다수의 캠퍼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움직이곤 했습니다. 응당 저의 이상과 가치들을 구현해보기에도 딱 적합한 캠퍼스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캠퍼스 선교단체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성과주의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치 보험판매를 하는 것처럼 꽉 짜여진 교육, 실적평가가 숨을 갑갑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운영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낼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습니다.

 

선교단체의 대표를 맡고 딱 1년간 사역한 이후에 <평가회>를 하면서 제가 던졌던 화두는 간단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냐?” 캠퍼스가 활발하고 사람이 바글바글하다고 잘되는 것인가? 또한 선교단체의 프로그램에 잘 참여하고 활동을 많이 하면 신앙이 좋은 것인가? 더 나아가 열심히 하는 리더들은 정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인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부흥하고 잘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매주 행사를 통해 다이나믹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들이 정녕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고개를 갸웃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는 것, 참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성과를 측정하고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바에 의해서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나름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저조차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 현혹되고 속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여전히 마음 한켠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는 부흥하는 교회에 대한 환상이, 또한 매주 새로운 일을 진행하는 다이나믹한 교회에 대한 환상이 여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땅> 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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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에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전파괴 이후 남겨진 바리새인 공동체와 누가 적자인지 따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 공동체는 의도적으로 로마제국과 야합했습니다. 비밀리에 황제숭배를 거부했던 교회 내의 이방인들을 고발했습니다. (본래는 로마제국 내에서 유대인들만이 황제숭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했습니다. 또한 저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서 추방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또한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며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숭배하기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로마제국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는 대대적인 광풍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만약 죽기 살기로 교회를 말살시키기 위한 광풍이 거세게 불어왔다면 내적으로 더욱 탄탄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박해는 간헐적이로 일상적인 불편에 가까웠습니다. 간헐적이고 일상적인 불편이 오히려 교회를 와해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를 다니던 성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다. 유대인들은 나름의 권한을 갖고 성도들을 일상에서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회당이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보다 적통이라는 주장이 힘있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또한 유대인들의 회당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황제숭배도 면제해주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불법적인 종교로 간주하고 때로는 처벌을 가하곤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가장 괴로웠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점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국의 힘은 유대인의 회당을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는 흐름이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인정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들 일부가 끌려가서 사법적 처벌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거나 혹은 일상의 삶을 방해할 때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실까요? 또한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정녕 믿을만한 분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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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살펴봅시다. (4:1) 첫 번째 환상을 본 후에 다시 요한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의 열린 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열린 문>에서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4절) 천상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와 교회의 12사도를 모두 합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24개의 보좌와 각각의 보좌에 앉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절) 보좌에는 <벽옥과 홍보석> 같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빛나는 분이 앉아계시며 (5절)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일곱 영이 거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7절-9절)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처럼 생긴 네 개의 생물이 앞뒤에 가득한 눈을 갖고 보좌 주변에서 보좌에 계신 분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대 로마제국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로마황제는 자신의 제국이 마치 온 세계인 것처럼 뽐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탁월한 통치로 로마제국에는 영원한 평화가 도래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를 두고 <팍스 로마나>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궁정의 보좌에는 황제가 앉아있었고, 그를 둘러싼 장로들이 황제를 보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고용된 이들은 황제가 그만하라고 하기 전까지 황제의 업적과 제국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눈으로 볼 때에는 로마제국의 권세, 황제의 권세가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들려주는 <하늘나라>의 광경은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 너머에서 정작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곳에는 로마황제가 아닌 하나님이 계십니다. 황제를 보좌하는 이들보다 더 고결하고 영광스러운 장로들이, 또한 온 세상의 피조물을 상징하는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보좌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늘나라의 광경 속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5: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두루마리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세상 가운데 구현될 완벽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봉인되었기에 여전히 우리가 보고 느끼고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황제와 같은 거짓 통치자들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빨리 두루마리의 봉인이 해체될 것을 대망했을 것입니다.

 

(2절) 힘있는 천사조차도 큰 음성으로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물을 때에 요한은 그제서야 당황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지각과 식견으로는 일곱 인을 모두 해체할 존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3절) 하늘 위에서도, 땅 위에서도, 땅 아래에서도 합당한 존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즉 하늘나라에서도 마땅한 존재가 보이지 않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마땅한 존재를 찾을 수 없었고, 하물며 지옥세계에서조차도 그런 존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는 소아시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여 (4절) 큰 목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이는 하늘을 향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그때에 봉인을 해체할만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로가 찾아옵니다. (5절)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셨으니 그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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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진지하게 갖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긴 하는걸까?”하는 신정론적 물음에 시달립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이들도 그러했고, 오늘 계시록처럼 신약성경을 기록한 이들도 그러하며, 신앙이 없다 한들 세상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한 모든 이들 또한 “전능하고 선한 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걸까?”하는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득한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을 뚫고 온 땅 가운데 도래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입니다. 이를 두고 인을 뗄 자를 찾아 헤메며 크게 울부짖은 요한의 큰 울움은 사실상 신정론적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오실까? 도대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관심은 갖고 계시는걸까? 이 세상 가운데 고통과 악을 허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덧붙여 “인을 떼시기에 합당한 자”를 찾고 헤메는 것은 결국 <메시아>에 대한 소망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포로기 이후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와 민족들은 어려운 시기마다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어떤 한 인물이 등장하여 그들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길 대망합니다. 오늘날 대통령선거에 반복되는 구호들 또한 메시아 대망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단순한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메시아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가득한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상 가운데에서 가져올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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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가르쳐준 (5절)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했다”는 선언은 그가 승리를 거둘만한 힘과 권능을 가진 대단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요한은 그 목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며 힘과 권능을 두루두루 갖춘 강력한 메시아, 사자와 같은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나타난 메시아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6절)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에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그에게 솟은 일곱뿔은 완벽한 권능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과 뿔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양과 사자 또한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 서 계신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은 힘과 권능을 두루두루 갖춰 세상의 악한 권세로부터 승리를 거두신 분입니다. 그야말로 두루마리의 일곱 인봉을 모두 해체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사자처럼 보이지 않는 분, 일곱 뿔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분,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은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은 노래의 주제를 바꿔부르기 시작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뒤이어 온갖 천사들이 화답하여 제창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마지막으로 하늘 위, 땅 위, 땅 아래, 바다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힘껏 마지막 후렴구를 따라부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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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요한이 공개한 두 번째 환상인 하늘보좌 환상은 언제 일어날 일을 묘사한 환상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가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공개한 두 번째 환상은 바로 이미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묘사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늘의 통치를 우리가 사는 땅 가운데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일은 하늘의 통치의 구현은 커녕, 이스라엘의 타락이었습니다. 하늘의 통치를 구현할 다윗의 왕국은 멸망하고 성전이 붕괴되며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통치는 영영 구현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런 위기상황을 묘사하는 그림언어가 바로 <일곱 인으로 봉하여진 두루마리>입니다. 포로기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신들은 망하여 포로로 끌려왔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언젠가 그들은 힘과 권세를 갖고 세상의 악을 정복할 하나님의 메시아, 다윗의 뿌리 유다 지파의 사자가 도래할 것을 대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도착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바로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희생으로, 자기를 내어주심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희생이야말로, 십자가야말로 예수께서 가지신 힘과 권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죽임 당한 어린양입니다. 또한 그는 유다 지파의 사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때 당시 천상에서 있었던 일을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을때, 비로소 두루마리의 인봉은 해체될 수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하늘보좌 앞에 있었던 이십사장로와 네 생물이 찬양하며, 천사들이 찬양하며, 또한 이를 알고 있는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화답했습니다. 비로소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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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비일이라는 성서학자가 쓴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영어원제는 <We Become What We Worship>입니다. 인간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오늘날 누구보다도 빨리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한 우리 사회가 점차 비인간화되는 이유는 그만큼 돈, 즉 자본주의를 숭배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얼굴이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따지는 자본주의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바알과 아세라 뿐만 아니라 돈, 권력, 명예와 같은 온갖 우상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권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을 꼭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1세기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가 로마제국과 유대인의 협잡 가운데 힘겨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양한 정치상황과 환경의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힘겨웠으며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기를 촉구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실상 그들은 로마제국의 힘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내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로마제국의 관습과 타협하여 권세있는 유력한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의 힘을 빌어 교회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이 가득했습니다. 로마권력의 승인을 받아 평안한 교회 생활을 하고자 하는 세상적 방법에 근거한 욕망이 가득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배였습니다. 세속적 질서와 단절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것이 바로 (지난 주에 살펴봤던) 첫 번째 환상과 두 번째 환상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죽임당하신 예수가 온 세상의 주인이라 선포합니다. 그의 고난과 희생, 자기를 내어주는 십자가만이 온 세상을 정복한 독보적인 힘과 권세라고 노래합니다. 따라서 오직 죽임당하신 어린양 예수를 예배하라고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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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저는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글을 잘 쓰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성경의 말씀에 두루두루 박식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성공적인 목회로 이름을 알리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성공과 명예에 대한 열망이 제 안에 가득합니다.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된 존재이지만 여전히 제 안에 성공과 명예에 대한 열망이 그저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강렬하게 불타오를 때에 저는 흠칫 놀라며 당황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내면 한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희생, 자기 내어줌의 십자가가 아닌, 여전히 세상적 가치를 숭배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하늘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제국 왕국에 앉은 황제입니다. 우리가 느끼기에 더 힘있어 보이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돈입니다. 명예입니다. 권력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천상에 울려퍼지는 찬양의 소리입니다. 여전히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고 있는 우리에게 천상에서 울리는 찬양의 소리는 “죽임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자본주의 아래에 무한경쟁체제에서 승리하는 길만이 살아남는 길이라 생각하는 우리에게 천상에서 울리는 찬양의 소리는 “죽임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금일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네 번의 주일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아 <대림절>이라 말합니다.우리는 예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시기를 기다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여 이전의 하늘과 땅을 대체하며, 로마황제와 같은 세속적인 권력을 죽임당하신 어린양 예수께서 완전히 대체하시기를 기다립니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돈, 권력, 명예를 쫓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돈이 최고라는 비인간적인 생각들은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십자가를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그 날까지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세상에 대한 숭배가 공존하는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왕이 되셨던 그 날에 천상에 울려퍼지던 찬양소리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날에 천상에는, 또한 온 땅에는 찬양의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누가 온땅의 진정한 주인입니까? 돈과 권력과 명예를 온통 거머쥔 로마황제입니까? 자기를 내어주심의 십자가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자 로마황제를 닮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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