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7]예수천당 불신지옥 (계21:1-8, 22:18-21)

2022. 1. 2. 00:12

선교단체 CCC출신입니다. LTC라는 훈련을 통해 사영리라는 복음전도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실제 캠퍼스에서 실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는 세 명의 친구들을 수련회에 데리고 갔던 적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좋하지도 않고, 복음 전하는 것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생에서 몇 번 <복음>을 전했던 일이 있습니다. 또한 사역을 시작한 이후에는 교회에 호의를 갖고 있는 새신자들에게 <복음>을 차근차근 해설해 줄 기회가 다소 있었습니다. 우연히 <교회>는 오게 되었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이 뭐냐는 질문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 말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가장 원초적인 복음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다수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원초적인 복음의 내용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복음의 구호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지옥에 대한 얘기를 했던 적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 주제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논박을 한 적은 있다한들 지옥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박을 했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들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수천당 불신지옥>라는 구호에 대한 불편함은 다들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이 어떤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좀 해설해보려고 합니다.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의 진의, 또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의 진의를 조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를 살펴보려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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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읽어보기에는 조금 난해하거나 난이도가 있을 법한 책입니다. (다만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신앙으로 읽는 부활신앙>이라는 책입니다. 구약성경에 대해 공부하신 김근주 교수님이란 분이 집필하신 책입니다. 책의 주된 논지는 간단합니다. <구약>에서 한 번 <부활신앙>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과연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다니엘, 엘리야 등등)은 과연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덮어놓고 신앙적으로만 따진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공을 들여 생각해보면 무척 의미있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또한 정곡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이후에 태어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과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고 있던 <신앙>은 과연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까요? 먼저 이 책이 기본적으로 짚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자세히 집중해서 들어주십시오.) 구약을 연구하는 저자가 보기에, 또한 학계의 기본적인 합의된 공통의견에 따르면, <구약성경>에는 내세에 대한 이야기, 즉 죽었다가 부활을 한다거나, 혹은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본문을 그나마 분석해보면 <죽으면 모두가 죽는다>에 가깝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국에 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러면 구약에는 부활이 없는거네! 천국과 지옥이 없는거네! 그러면 부활신앙이란 것도 없겠네!” 하지만 책은 꼼꼼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졌던 신앙의 본의를 파해쳐갑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녔던 신앙은 “죽음이 협박한다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 책은 구약과 다양한 외경들을 연구하면서 신약의 <부활신앙>의 본의를 궁구합니다. 그리고는 부활신앙 또한 이렇게 정리합니다. “죽음이 나를 사로잡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국엔 온 땅을 통치할 것이라 믿는 신앙”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의 결말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은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졌던 신앙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 이른바 내세 혹은 부활에 대한 이해는 구약과 신약이 다소 다른 점이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은 동일합니다. “죽음이 나를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

 

따라서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신앙은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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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자주 듣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생명책>이라는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후반부에는 바로 <생명책>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12절)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들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 근거하여 본문을 읽으면 <생명책>에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지른 온갖 행태들이 기록되어 있고, 이에 근거하여 천국으로 배정받던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지던가 둘 중의 하나의 운명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보십시다. 전체적인 문맥은 요한계시록 19장 11절부터 봅시다. (11절)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죽임 당하신 어린 양께서 우주적인 전쟁의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쟁의 전면에 나서자 결국 세상에 만연한 악의 세력은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19절)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절) “짐승이 잡히고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힙니다. 덧붙여 이들은 짐승의 표를 통해 인간들을 유혹하던 세력이라고 해설이 따라옵니다.

 

결국 전체적인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군대들이 하늘로부터 땅에 침공하여, 결국 끝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사탄마귀의 나라, 세상의 나라를 정복하고 땅의 왕이 되시는 이야기입니다. (20:2) 결국 “옛 뱀, 마귀”는 결박되어 무저갱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로 말하면 왕위에서 탄핵되어 감옥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또한 (20:4) 목 베임을 당한 자들, 이른바 순교한 이들의 영혼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표를 받지 않으며 살아남았던 이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동안 왕 노릇”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즉, 쉽게 이야기하자면 요한계시록의 핵심요지는 <땅의 나라, 사탄의 나라>가 <하늘의 나라, 예수의 나라>로 교체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 가운데 바로 <생명책>에 대한 본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12절) “생명책”에 의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데요. 그 죽은 자들이 누구냐면 (13절) “바다가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를” 내준다고 말합니다. 이 죽은 자들은 <바다>, <사망>, <음부> 이른바 사탄마귀의 나라, 땅의 나라를 상징하는 장소와 연루된 자들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일본제국이 한반도에서 쫓겨나고 핵심 인물들이 심판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본제국에 기생하여 부정이익을 탐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본 이야기는 <생명책>에 근거해서 모든 인류가 심판받는 이야기가 아니라, <땅의 나라, 사탄의 나라>에 기생했던 이들이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들의 공생관계에 있었던 (14절) <사망과 음부> 자체가 완전히 <불못>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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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살펴본 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순교를 각오하며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시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왕노릇할 것입니다. 왕노릇한다는 말은 결국 <재판관>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일본제국과 친일파의 비유를 사용하자면, 그 날에는 임시정부의 문지기조차도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천황을 심판하고, 친일파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는 <순교를 각오하며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은 결국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날에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되며, 그들이 지켜왔던 가치가 옳았음을 입증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바다> 혹은 <사망과 음부>와 공생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짐승의 표를 누구보다 빨리 받고 어차피 멸망할 바벨론 제국에 기생해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친일파>와 같이 옳은 것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순간적 이익을 따르는 삶을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바벨론 치하에서는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포도주와 감람유를 즐기며 온갖 부귀영화와 호화로운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결국 <땅의 나라, 사탄의 나라> 이른바 바벨론이 패망하게 되면서 다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또한 순교를 각오한 이들이 <재판관>으로 앉은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바벨론>이 완전히 없어진 것처럼, 그들이 기생했던 <사망과 음부>와 함께 <불못>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어로 쉽게 말해보겠습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던 이들은 천국에 갈 것입니다.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을 넘어서 지옥에 떨어질 이들, 이른바 자신을 괴롭히던 이들을 심판할 권세까지 얻게 될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문화와 질서에 기생하며 사리사욕을 챙기며 자기 밖에 모르던 이들은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잘나갈 적에 괴롭히며 못살게 굴었던 천국 백성들에게 심판을 받는 치욕까지 겪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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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목사로써 저는,  여러분이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나요?”라고 물으면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신앙생활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며 위로를 해줄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한 명의 목사이기에, 여러분이 찾아와서 “목사님, 예수 안믿으면 지옥에 가는건가요?”라고 물으면 예수를 안믿으면 그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고 결국 지옥에 가지 않겠냐며 신앙을 잘 붙들라고 권면을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명의 목사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를 연구하고 이를 가르치는 한 명의 성경학도, 성경연구자로 말한다면, 저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성경은 “순교를 각오하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던 이들”에게는 분명 천국을 약속하지만 (목사인 저를 포함한) 우리 같은 나일롱신자들에게는 천국을 약속한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세상의 권세에 기생해서 사리사욕을 탐했던 이들”에게는 분명 지옥의 심판을 약속하지만 (목사인 저를 포함한)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고 악의 권세로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누릴 기회조차 없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지옥의 심판을 약속한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 이른바 절대적인 <선>이라 말하기도 어렵고 절대적인 <악>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존재에 대해서는 성경이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극단적으로 대립적이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의 환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그려내는 세상은 철저히 이분법적 세상입니다. 마치 다양한 대선후보가 있지만 결국에는 1번 아니면 2번이 아니고서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는 우리 현실처럼, 마치 우리에게는 다양한 삶의 현실이 있겠지만 결국에는 예수를 따르느냐 아니면 세상을 따르느냐 두 가지의 가능성 밖에 없지 않냐는 가정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나름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매우 극단적인 요한계시록과 같은 이야기 속에서 나온, 매우 극단적인 구호입니다. 따라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평범하게 교회도 다니며 신앙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는 분명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는 분명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매우 절대적으로 명암이 극히 구분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온갖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며 대부분이 이도 저도 아닌 회색지대에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진리라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 적어도 우리들의 현실에는 맞는 말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비해서는 너무 극단적인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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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21:1) <새 하늘과 새 땅>이 사탄과 마귀가 통치하던 <하늘과 땅>을 대체하게 됩니다. 또한 사탄과 마귀가 기거했던 악의 처소인 <바다>는 <사망과 음부>와 함께 아예 사라져버린 상태입니다. 그 날에 도래하는 현실은 간단합니다. (3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그 날에는 (4절) “모든 눈물”은 사라지며 “사망” 혹은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 것”과 같은 부정적인 현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 날에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싹 사라지며, 모든 긍정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자리잡습니다. 그 극대화는 22절에서 빛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만나주시기에 <성전>이라는 특정장소는 폐기되어버립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땅의 나라 <바벨론>으로 상징되었던 세계는 결국 망할 것이며,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요한이 겪은 신비적인 환상의 체험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압도적이고 폭압적인 권세인 로마제국은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환상을 보게 된 요한은 이를 모두 말한 후에 (22:18)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당부하기를 “이것들 외에는 더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자신이 겪은 환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라는 나름의 <인봉> 표시입니다. 그리고는 이 환상을 공유한 후에 요한은 (짧게나마) 우리를 예배로 초청합니다.

 

(요한이 먼저 선창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오리라>하시거늘

(그리고 예언의 말씀을 듣는 우리가 후창하게 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고 이 예배가 마친 이후 요한은 축도로 계시록의 말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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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지막에서야 알 수 있는 바는 요한계시록의 극단적인 환상이 바로 <예배>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미래에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설교자가) 선포하고 (회중이) 화답하는 예배>의 문서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담고 있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믿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며 <우리의 죽은 후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구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과 신앙 가운데 적절히 타협하며 미적지근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그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만들기 위한 <예배를 위한> 구호입니다. 

 

따라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으니 천국가겠네” 혹은 “내가 오늘 예수를 안믿으니 지옥가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언젠가 최종적으로 이 세계 가운데 도래할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날이 오면 예수께서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예수로 말미암아 힘들고 어렵고 고통받았던 이들이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견뎌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이들이 비로소 인내의 기쁨을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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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예배>에 대해서 몇 마디의 말을 하고 오늘 설교를 갈음할까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반복되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어떤 생각을 갖나요? 혹자는 <설교>를 듣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설교>가 선포되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설교자>가 누구인지 영향을 많이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찬양과 기도>가 너무 중요하며 뜨겁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배인도자가 누구인지에 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도 이왕이면 좋은 설교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왕이면 몰입할 수 있는 찬양과 기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설교와, 제가 인도하는 예배가 말 그대로 은혜로웠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예배>의 핵심이 무엇이냐 물으면 설교도 아니고, 찬양도 아니고, 기도도 아닙니다. 너무나 뻔한 말 같지만 <예배>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설교의 호불호와 별개로, 찬양과 기도의 몰입도와 별개로, 예배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적어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는 <바벨론>이 곧 망할 것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는 <돈>, <권력>, <명예> 따위가 하나도 필요 없게 느껴져야 합니다. 적어도 예배를 순간에는 <하나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없어도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충분히 타협적일 수 있고, 우리의 현실은 충분히 회색지대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예배에서만큼은 우리의 오감이 극단적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예배>에서만큼은 요한계시록이 그려내는 극단적인 서사가 매우 옳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거기에 생명이 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순간 지옥이 예비된 어마어마한 극단적인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적어도 예배에 있어서만큼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셔야 하고, 예배의 관건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가 끝나면 각자의 현실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타고다니는 차가, 매월 들어오는 월급이, 또한 진로, 취업, 승진, 결혼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매우 매우 커보이는 현실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저 또한 교회를 성도들의 숫자에 따라 비교하며, 현실 교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과 힘있는 사람들에게 줄세우는 목사들끼리의 정치에 푹 빠져 살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목회를 하는 순간조차도 예산을 계산하고, 선물비용을 계산하며, 행정처리비용을 계산하는 지극히 세속적이다 할 수 있는 일에 몰입하며 살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예배 이 시간만큼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시다. 적어도 오늘 예배 이 시간만큼은 <하나님>만 우리의 전부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을 다 털어넣어드리겠다고 고백해봅시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적어도 예배에서만큼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세상에서 우리가 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예배에서만큼은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받으셔야, 세상에서 우리가 그나마 하나님 눈치라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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