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가 선택한 선택들의 총합입니다. 가끔 과거를 반추할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 내가 선택했던 것이 옳았을까? 이전에 내가 취했던 태도가 옳았을까? 돌이켜보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많이 불안했습니다. 또한 많이 조급했습니다. 

 

21살때 소명을 받았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40일째 해나가다가 30일 중반을 넘어가던 특정 지점에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선명한 신호를 받았습니다. 재빨리 신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가 다니던 학교는 한때 아버지가 꿈꾸던 학교였습니다.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신학교를 간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보다 조금 늦게 소명을 받았던 친구가 신학교에 들어가는 장면을 봤습니다. 조급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더 빨리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때 당시 저를 담당하던 청년부 목사님께서 지혜가 있으셨습니다. “동우야,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대원을 가도 늦지 않아. 목사님들 중에서 그런 분들 많단다.” 지혜로운 조언 덕분에 한 텀 쉬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28살에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7년의 시간은 무척 길고 험난했습니다. 7년동안 매번 조급했습니다.

 

신학교에 간 이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급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이 좋지 않고 올바른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28살에 신학교 학부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는 남성인 경우에 최대한 빨리 학업을 마친다면 30살 이전에 신대원을 졸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1살을 준하여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벌써 28살에 고작 신학교 학부 3학년이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가 신대원에 다니고 있는 장면을 볼 때 더욱 조급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신학교 학부부터 시작한 친구들은 벌써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더욱 조급해졌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해서 잘 안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동안 읽어온 책이 별로 없어 잘 안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 이후에 펼쳐지는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대원에 들어가자마자 빚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로는 생활비를 겨우 감당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숙사비를 내고, 학비를 내기에는 철저히 돈이 부족했습니다. 점점 빚이 쌓여갔습니다. 조금씩 쌓여가던 빚이 2학년 1학기 때에는 1500만원에 달했습니다. 그때도 조급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어차피 신학 이후 목회를 하는 경우라면 큰 사례를 기대하기 힘든데 1500만원이 커보였습니다. 더군다나 남은 3학기의 등록금을 또 납부해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재빨리 이를 만회하기 위한 어떤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불안하고 조급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세월이 그냥 흘러왔습니다. 조급했고 불안했던 시절도 한 때였습니다. 그때 했던 고민들과 걱정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는 문제들이 다수였습니다. 말 그대로 시간이 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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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는 말 그대로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들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이방인들 대다수는 바울의 복음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를 일궜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면밀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말할 때에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든,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든,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든,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복음을 전하는 대상에 따라서 복음 자체의 지향점이 약간 바뀔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세계 기독교 전체를 통틀어 말하면 <술과 담배>문제는 본질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는 <술과 담배>를 금하는 문제가 거의 본질에 준하는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미개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당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러 방문을 했을 때에 그들은 좀 더 주체적으로 <술과 담배>를 금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해석했습니다. 적어도 한반도 내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 내의 세상사람들과는 달리 <술과 담배>를 금하자는 입장으로 복음을 설파한 것입니다.

 

이와 연관된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전도자였던 D.L 무디 목사는 영국교회의 초청을 받아 영국에 들린 참에 찰스 스펄전 목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펄전 목사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에 당황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담배를 필 수 있습니까?”라고 D.L 무디 목사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무디 목사의 배를 쿡쿡 찌르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비만일 수 있습니까?”라고 웃었다고 합니다. 영국은 영국의 상황에 맞게 탐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범하지 말아야 할 죄라고 여겼습니다. 미국은 미국의 상황에 맞게 담배를 그리스도인들이 범하지 말아야 할 죄라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시대와 문화와 상황에 걸맞는 메시지를 갖게 됩니다. 바울의 복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들 고유의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절기와 같은 문화 말입니다. 바울은 꽤 깊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고민은 참고로 사도행전의 베드로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를 깊이 관찰하고 고민한 끝에 잠정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이방인들이 할례 받기 이전에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다면, 이방인들이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기 이전에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니 굳이 할례, 안식일, 절기를 강요하지 말라는 결론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문화와 풍습을 따르지 않고도, 예수를 믿으며 살아갈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상을 해봅시다. 바울의 복음을 듣지 못했던, 유대인 세계에서 자라났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우연히 갈라디아 교회의 소식을 듣는다면 어떨까요?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할례, 안식일, 절기를 지키지 않는 전혀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무척이나 생경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교회는 당회를 할 때 장로님들과 담임목사님이 둘러앉아 같이 담배를 필 수 있도록 재떨이를 갖다놓는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어떨까요? 중요한 임원들끼리의 회의가 호프집에서 열린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어떨까요?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기독교가 나타났다며 당황할 것입니다. 물론 최대한 침착하며 “기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복음을 듣지 못했던 유대교 세계에서 자라났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 천천히 알아본 것 같습니다. 아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다수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봤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대다수의 여기 계신 어른분들이 교회학교 아이들을 볼 때의 느낌 같을 겁니다. 혹은 청년부 청년들을 볼 때의 느낌 같을 겁니다. 바라보면서 흐뭇하기도 할거구요, 또 바라보면서 어라 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점도 보일 것이고요, 생각보다 저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점도 보일 겁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습니다. 아마 일단 신기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온갖 로마의 신들과 이방종교의 신들의 배경 속에서 자라나던 이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창조주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을 거에요. 정말 신기했을 겁니다. 반면 할례를 받지 않는 문제, 오랜 역사 속에서 내려온 유대교 전통을 준수하지 않는 문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이상해보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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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도 갈라디아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조급함, 그리고 불안함입니다.

 

자신들은 단순히 예수만 믿는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고 안식일과 절기를 준수합니다. 양자를 함께 비교해보면 마치 자신들이 질 낮은 복음을 믿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이 믿는 복음은 마치 질 높은 복음을 믿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복음을 믿고 난 이후에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되지 않음, 성숙되지 않음,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없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유대인들의 <질 높은 복음>을 믿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고심 끝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질 높은 복음>을 믿기 시작하려 했던 시기가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편지를 썼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말합니다.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에 따르면 <정신나간 갈라디아 사람들이여!>입니다. 바울이 반복적으로 갈라디아서를 통해 강조하려는 바는 무엇일까요? 먼저 바울은 말합니다. (3: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냐?” 애초에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했던 때를 되짚어보라는 겁니다. 할례를 받아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절기와 안식일을 지켜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방인이었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믿게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화를 내고 있습니다.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애초에 성령에 의해서 시작했던 복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할례, 안식일, 절기와 별개로 성령께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조급함 때문에, 불안함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따라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덧붙여 바울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역사적 인물의 예시를 듭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고서, 절기를 지키고서, 안식일을 지키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3:6)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말 그대로 정당하다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따라서 할례, 절기, 안식일과 무관하게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이들은 (3:7) 아브라함의 반차 위에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런 반복적인 논증을 통해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6:9)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조급하지 말라는 겁니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미 받은 복음, 듣고 믿어서 받은 성령 안에서 충분히 안심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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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2000년 중후반 정점을 찍고 계속 내려오는 중에 있습니다. 잘 안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데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해결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고민들이 결국 우리를 복음의 본질에 마주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더욱 예수를 섬기는 것에 이르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고민들은 인간적인 고민들로 귀결됩니다. 조직을 개편한다거나, 시설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왕왕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유대인들의 복음을 부러워하던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형 이상의 교회들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 지난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지의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고민입니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온갖 교회 세미나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교회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목양을 해야 할지에 대해 온갖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과 이야기들이 우리를 복음의 본질에 마주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 또한 유대인들의 복음을 부러워하던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에 기웃거릴까요? 왜 인터콥 같은 불건전단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의 감격, 한창 뜨거울 때 느꼈던 하나님의 임재, 기도 응답의 확실성 등등이 흐릿해지자 제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흔들려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추종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뭔가 새롭고 신비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신앙을 따라갑니다. 

 

어쩌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모두 조급함과 불안함의 문제입니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빌립보서 1:6, 새번역)”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시며, 이곳 가운데 교회를 세워주시고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앞으로 코로나19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반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다. 너무 불안해하지도 마십시다. 적어도 우리 신앙의 문제는, 또한 우리 가나안 교회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가나안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의 묘한 방책과 섭리가 있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주인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의 묘한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다. 너무 불안해하지도 마십시다. 우리 안의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