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tend’

 

영화 기생충은 상징적인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과외선생 기우가 다혜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 속에서 등장하는 매우 상징적인 단어가 ‘Pretend’입니다. ‘~인 척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죠. 기우는 자신이 명문대생인 척하고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전반부는 인척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인척 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 기생충의 결말은 어떤지 아십니까? ‘인척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냄새를 통해 인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게 됩니다. 그들은 명문대생인척 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척 했습니다. VIP고객들을 위한 맞춤 가정부인척, 맞춤 운전기사인척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척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냄새만큼은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인척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바꿔내진 못했습니다. 비가 오자 높은 지대에 사는 부자들은 비오는 것을 즐기며 인디언 놀이를 할 수 있었지만, 인척했던 이들은 자신의 집이 잠겨서 수재민이 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수재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인 이들에게 끌려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괜찮게 살아가고 있는 척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참혹한 결말이 펼쳐지죠. 본 영화는 계급에 대한 고발영화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바뀌지 않는 계급을 고발합니다. 인척하는 사람들에게 부자들은 완전히 농락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하지만 동일하게 본 영화는 인척하는 사람들의 한계를 고발하는 영화입니다. 그들은 명문대생이며, 유학을 다녀왔으며, VIP들을 오래 모셔본 척 하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존재가 단 1도 바뀌지 않는다는 고발영화입니다.

 

 

심판

 

오늘 설교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꽤 오랫동안 청년부 예배가 없어서 까먹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사도신경을 한 구절, 또 한 구절 의미를 따져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의미를 따질 사도신경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심판의 신앙입니다. 단순히 오늘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신이 우리의 현실을 바꿔버려서, 혹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바꿔버려서, 위로받고, 힐링을 받는 차원의 신앙을 넘어서, 성경은,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그 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날이 오면 어떤 이들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사망을 얻게 될 것이라 권고합니다. 어떤 이는 그 날이 오기까지 신앙 때문에 손해보며 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는 때에 신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온갖 신앙을 갖고 살지만 의심과 방황 속에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날, 그가 [살아있는 자]라고 판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이는 그 날이 오기까지 떵떵거리며 살고, 온갖 위로와 힐링을 얻으며 살아가고, 그 누구보다 복되다고 인정받는 사람일지라도, 그 날, 그는 [죽은 자]라고 판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판결하실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부활하신 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어쩌면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기준이 무엇인지를 묻고, 판단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판단기준에 어긋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호화롭고 휘왕찬란해도 그 날에는 빛좋은 개살구처럼 죽은 자로 판결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판단기준에 적합하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고단하고 힘겨울지라도 그 날에는 살아있는 자라는 선언 앞에 그동안 겪어왔던 모든 삶의 노고를 씻고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판단기준은 무엇일까요?

 

 

양과 염소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예수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이를 것이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응당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 날이 오면 예수님의 판단 기준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 중요합니다. 중요하지만 우리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가요? 주일성수 하는 것인가요?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하는 것인가요? 우리의 생각으로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인가요? ‘예수 믿자는 말은 단순하고도 명료한 말이지만 따져보면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묘한 불안감을 지니며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 것 같은데 예수 안 믿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예수 믿는 것 같은데 예수 믿는 것 같지 않아서 마지막 날에 어떻게 될지 떳떳하지 않는 미묘한 불안감과 죄의식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기준에 대해서 명료하고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43절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말씀되어진 비유입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 모든 천사와 함께 세상 끝에 영광의 보좌에 앉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1) , 온 세상의 임금으로 즉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온 인류를 다스릴 권한, 온 인류를 심판할 권한을 지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온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게 됩니다. 마치 목자가 자신의 말을 잘 듣기 때문에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양과, 자신의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관리를 해야만 할 염소로 구분하는 것처럼, 온 민족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한다고 말합니다(33).

 

이는 우리가 살펴본 사도신경의 고백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할 것입니다. 애써 따지자면 양으로 무리들은 살아있는 자입니다. 반면 염소로 구분된 무리들은 죽은 자입니다.

 

오른편으로 구분된, 양으로 구분된, 살아있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4-36)

 

반면 왼편으로 구분된, 염소로 구분된, 죽은 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1-43)

 

그러자 양쪽에서 보이는 반응이 똑같습니다. 내가 왜 살았습니까? 그리고 제가 언제 주님을 돌보았습니까?’ 혹은 내가 왜 죽었습니까? 그리고 제가 언제 주님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 날의 심판은 우리의 예측과 분명 다를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교회에 열심히 나온다고, 누가봐도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고 한들 그 날에 죽은 자에 속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누가보더라도 애매한데,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에 살아있는 자에 속할 수 있습니다.

 

 

말과 삶의 일치.

 

얼마 전 작고하신 유진 피터슨이란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 중의 목사라고 불렸던 분. 자신이 담당하는 교인들이 성경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걸쳐서 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하셔서 <메시지 성경>을 집필하신 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그 분의 번역서가 있습니다. 설교집인데요. 책 제목은 <물총새에 불이 붙듯>이라는 제목입니다. 왠만한 책은 번역되기 전에 원제가 SNS를 통해 공개되고, 이를 통해 어느 정도 내용 유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 책은 도대체 어떤 컨셉의 설교집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제는 ‘As kingfishers catch fire’입니다. 말 그대로 물총새가 불을 낚아채듯. 도저히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제목입니다. 흥미롭게도 제목이 <물총새에 불이 붙듯>인 이유가 서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홉킨스의 시를 읽고 이 이름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물총새에 불이 붙고 잠자리 날개가 빛과 하나가 되듯 우물 안으로 굴러든 돌이 울리고 켜진 현들이 저마다 말하고 흔들리는 종이 자신의 소리를 널리 퍼뜨리듯 모든 피조물은 한 가지 일을 한다.”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제가 하는 고민 중의 하나는 말과 삶의 일치입니다. 제가 하는 설교가 저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너무 거룩하게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또한 제 설교가 제가 가진 것들보다 더 거룩하게 선포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과장은 피할 수 없는 함정이며, 과장을 위장한 허풍과 거짓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담백하게 나 자신을 투영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곤 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이 시를 읊으면서 마치 각자가 자기 본연의 일을 하듯이, 본인의 설교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교인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교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교인들에게 거룩함의 본을 보이기 위해, 오버하지 않고, 자신 고유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진실한 마음. 그 마음은 물총새에 불이 붙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설교하고 싶은 유진 피터슨 목사의 진심이었습니다.

 

가끔 저는 목회자로 살면서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해지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항상 남에게 권면하고, 항상 남에게 가르치고, 항상 남에게 말하다보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선생된 자들은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하자면 아마도 지옥에 가면 단일직군 퍼센테이지는 목회자들이 가장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정도로 목회자로 산다는 건 나 답지 않게, 영화 기생충에서 말했던 것처럼 <Pretend>하며 살기 쉬운 것이니까요.

 

 

주여주여한다 한들...

 

오늘 본문을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과 연결된 본문 하나를 더 들춰봐야 합니다. 바로 마태복음 7장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으로 행해야 할 가르침에 대해 구구절절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22) 여기서 예수님에 의해 배제된 사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람의 변명을 유심히보십시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지금 가르침을 분명히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선지자의 노릇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며, 교회의 리더들이며, 어떤 이들은 목회자들입니다.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귀신을 쫓아 냈다고 하더라도, 많은 권능을 행했다하더라도, 또한 마치 믿음이 있는 것처럼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따른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끔찍할 수도 있는 이 말씀의 앞절에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7:18-19) 즉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너는 좋은 나무냐? 아니면 찍어버릴 수 밖에 없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에 분류된 사람들,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예수님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제공한 적이 없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적도 없으며,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지도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염소에 분류된 사람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 또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들은 마치 마태복음 7장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주여, 주여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노릇도, 귀신을 쫓아 내기도, 권능을 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라면 응당 마실 것, 먹을 것을 내어주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나그네로 오셨다면 영접했을 것이며, 헐벗으셨다면 옷을 주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위기에 빠졌다면 돌보았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로 판결된 사람들도, 죽어있는 자로 판결된 사람들도 예수님께 대하여 그렇게 했던 기억이 없다고 말할 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인척 하는 신앙.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작은 자를 돌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작은 자를 잘 돌보십시오. 아니면 간혹 예수님께서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자를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혹 예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심방하러 오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만 오늘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마태복음 7장의 말씀과 견주어 볼 때 단 한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니 나무에 열린 열매 저거 니꺼가?’ 우리는 신앙을 처음 배울 때 ‘Pretend’의 신앙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신앙을 가집니다. 신앙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와 조금씩 성숙해나가면서 신앙인의 모습을 가진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고백하고 봅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일단 조금씩 봉사하고 봅니다. 헌금을 낼 때의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돈부터 내고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방법도 모른채 그냥 말씀을 읽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때론 그걸 갖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기도의 무게를 다 알기도 전에 우리는 기도하는 척, 헌금의 무게를 알기도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는 척, 신앙의 무게와 깊이를 알기도 전에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는 척 합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부터가 ‘Pretend’입니다. ‘인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신앙인들은 신앙있는 척, 여기 또 저기에서 신앙의 열매들을 따오기도 하고, 사오기도 하고, 해와서 우리의 삶에 걸쳐다 놓습니다. 기도하는 척, 말씀읽는 척, 신실한 척, 거룩한 척, 섬기는 척, 선한 척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에겐 다양한 신앙의 표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헌금액수도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섬기고 있는 직책이 있을 수 있고, 내가 다녀온 신앙의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게 진짜 너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제대로 한다고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교회에서, 그리고 믿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여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했던 내 삶의 모든 행동과 실천과 말들이, 믿음을 증명해봤자 아무런 쓸모도 소용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도 여전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갈망처럼, 그리고 저의 끝없는 고민처럼, ‘물총새에 불이 붙듯말과 삶이 일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나무에 달린 열매가 실제 자신의 열매였습니다. 그랬기에 마지막날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가 바로 산 자다!’ 반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소홀했다고 사망을 선고받았다는 말은, 교회에서, 그리고 믿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여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했던 내 삶의 모든 행동과 실천과 말들이, 믿음을 증명해봤자 아무런 쓸모도 소용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달랐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말과 삶의 괴리를 부둥켜 안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나무에 달린 열매는 실제 자신의 열매이지 않았습니다. 성탄절 트리처럼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그의 본질은 열매가 없는, 찍어 버려져야 할 나무였습니다. 그랬기에 마지막날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는 죽은 자다!’

 

매번 자문해봅시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사도신경의 오늘 이 구절을 고백합니다.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우리는 매주 고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합니다. ‘우리는 그 날에 살아있는 자일까 혹은 죽은 자일까.’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이어져야 합니다. ‘내 신앙은 진짜 내 신앙일까 아니면 단순한 흉내에 불과할까.’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이 예수님을 향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우리의 인생 전체가 예수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물론 이 말은 완벽함, 완전함을 요구하는 말이진 않습니다. 적어도 진실되고 솔직하게 내가 가진 신앙의 열매들이 나의 것인지를 자문해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열매가 작을 수는 있습니다. 볼품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열매를 갖고 와서 우리의 열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날에 우리의 열매가 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우리는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매주 반복되는 주일에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자문하십시오. 당신의 신앙은 진짜입니까? 당신의 믿음의 고백은 신앙 있는 척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의 진솔한 고백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