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3]정말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계 6:1-17)

2021. 12. 5. 05:51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2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지난 교회에서 청년부를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딱 저의 또래로 보이는, 그러니까 당시 32-33살 정도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청년부를 방문했습니다. 딱 들어올 때부터 포스가 있었습니다. 신앙이 좋아보였습니다. 당시에는 성찬을 나누는 날이었기에, 당시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짧게 성찬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 성찬을 나눈 이후에, 또한 제가 이어받아 말씀을 전했습니다. 처음 방문한 청년은 마치고 나서 저에게 담임목사님의 짧은 말씀도 좋았고, 예배 분위기도 좋았고, 또한 저의 설교도 좋았다고 평했습니다. 웃으면서 화답한 후에 그에게 교회를 찾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사연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는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귀국한 청년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외국에서 꽤 신앙이 깊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명 정도의 청년부가 모이는 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출석한지 1-2년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청년부에 적응하려던 참이었는데, 당시 청년부 담당하시던 목사님께서 내년에 회장을 해줄 수 없겠냐고 제안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청년부 목사님에게 “방황의 시간을 달라”고 말한 후에 다른 교회를 돌아나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와 같았습니다. 200명 가량이 모이는 청년부는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래알 조직과 같았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예배 외의 활동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청년들 대다수는 간호사와 같은 주일을 매주 지킬 수 없는 지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매주 교회에 출석할 수 있고, 신앙이 뜨거운 지체가 200명 중에 극히 드물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교회에 적응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부탁을 받으니 매우 당황스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모래알같은 청년부를 맡아서 뭘 할 수 있겠냐며 혹여나 자신이 정착할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저는 말했습니다. 당시 제가 담당하던 교회도 20명 정도의 출석을 하고 있었지만 매주 출석하는 지체는 7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예배의 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청년부 또한 2부 활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청년들은 예배만 드리고 교제를 나누지 않고 그저 흩어졌습니다. 또한 저의 설교가 좋다는 말은 감사하지만, 매주 들으면 식상할 것이며, 결국 그 교회와 이 교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결정은 본인의 몫이지만 실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도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마도 회장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겉으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200명이 모이는 그 교회는 잘나가는 청년부처럼 보였습니다. 역동적인 공동체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말을 듣고보니 모래알조직이며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제가 담당하던 공동체도 똑같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 그 친구는 예배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좋고 청년들의 리액션도 좋아 멋진 공동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도 모래알조직이며 예배의 감격이야 곧 적응되면 지루해질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겉으로 보는 바와 실제 사정은 매우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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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우리가 흔히들 <계시>라는 단어를 들으면 새롭고 신선한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롭고 신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응당 우리는 요한이 쓴 계시록을, 이전에 없었던 새롭고 신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마치 종말에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유사한 예언집 장르로 여겼고, 많은 이들은 계시록의 비밀을 풀어보려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계시>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 아포칼립시스는 <드러냄, 벗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성경은 오해를 할까봐 이 단어를 <묵시>로 번역했습니다. 묵시는 기본적으로 <폭로>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한 예를 끌어온다면, 그 청년은 저에게 200명 모이는 청년부의 비밀을 폭로했고, 저는 20명 모이는 청년부의 비밀을 폭로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묵시를 전달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좋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이러이러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담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책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가 보는 바에 감춰진 실상을 폭로하는 책에 가깝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어땠을까요? <팍스 로마나>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습니다. 혹은 자신의 선왕을 신이라 칭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BTS를 갓티에스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향해서 갓(신)이라 칭하는 바와 유사합니다. 따라서 로마 황제, 즉 신이 이룩한 오늘날의 현실은 말 그대로 <평화> 그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모든 방송국의 뉴스는 로마 황제가 이룩한 평화를 과장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 어떤 언론도 그의 빛만 다룰 뿐 그림자는 다루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로마 황제가 이룩한 시대의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찬미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요한이 환상을 보던 시점의 황제 네로, 혹은 요한이 보았던 환상을 기록했던 시점의 황제인 도미티안은 자신을 향한 황제숭배를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했던 강력한 왕입니다. 사람들은 힘껏 그의 통치가 가져온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배경인 에베소란 도시는 황제에 대한 제의가 화려하게 이뤄지던 장소였습니다. 반면 로마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대중들은, 로마 황제를 대신할 새로운 메시아가 동쪽으로부터 와서 (마치 알렉산더 대왕처럼) 로마를 부숴주기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줍니다. 

 

바로 로마 황제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죽임당한 흔적이 있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묵시입니다. 은폐된 비밀의 폭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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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보좌에 등극하실 때에 일어났던 환상을 살펴봤습니다. 

 

하늘에는 일곱개의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두루마리에 담긴 것은 하나님 통치의 비밀이었습니다. 일곱 개의 인을 모두 풀게 되면 이 세상의 진정한 비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고 계시느냐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됩니다. 죽임당한 흔적을 지닌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차례대로 인을 제거하시는 장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인봉을 해체합니다. 그때에 나타난 것은 흰 말입니다. (2절) 그는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하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 인봉을 해체합니다. 그때에 나타난 것은 붉은 말입니다. (3절) 그는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하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인봉을 해체합니다. 그때에 나타난 것은 검은 말입니다. (5절) “한 데나리온(하루 일당)에 밀 한 되, 보리 석 되”밖에 얻지 못합니다. 사치품이라 할 수 있는 감람유나 포도주 가격은 변동이 없지만 일반 대중들의 삶에 밀접한 연관이 되는 물가가 급등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인봉을 해체합니다. 청황색의 말이 나타납니다. (7절) 사망이란 존재가 나타나 “음부”, 즉 지옥의 힘을 빌어 땅 사 분의 일을 해할 권한과 힘을 얻어 검, 흉년, 사망, 짐승에 의해 살해합니다.

 

첫 번째 인봉부터 네 번째 인봉은 하나로 묶여있는 은유입니다. 똑같은 <말>이 등장합니다. 또한 하나의 인봉을 땔 떼마다, 보좌 앞에 있는 네 생물이 각자 돌아가면서 말을 불러 나타나게 만듭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비밀의 폭로입니다. 은폐된 진실의 폭로입니다. 어떤 진실일까요? 바로 첫 번째 등장한 승리를 애타게 갈망하는 흰 말은 로마제국입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승리를 쟁취하고 평화를 이룩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그는 사실 평화를 제하고 서로 죽이는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귀족들이 아닌 평민들이 소비하는 제화의 물가가 급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국 칼, 흉년과 같은 재앙과 참사에 근거해 사람들이 죽음에 빠진다 한들 그걸 막지 않습니다. 겉으로 평화를 외치는 제국의 목적은 오히려 대중들 1/4이 죽는 참사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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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도 유사합니다. 냉전체제 이후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대해 승리를 거뒀습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는 점차 세계를 잠식하여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혹은 북한에까지 마수를 뻗쳤습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결국 세계무역주의를 낳았고, 세계는 전례없는 활발한 교루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인류는 전례없는 번영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자본주의와 세계무역주의를 기반으로, 또한 번영한 인류를 기반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을 숙주로 삼아 팬더믹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코로나가 끝나도 유사 팬더믹은 자주 찾아올 것”이라 전망합니다.

 

더군다나 최근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복고에 대한 향수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 혹은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피식대학 유튜브 컨텐츠처럼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옵니다. 오늘날 대선의 양당 후보만 보더라도 과거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독재자의 오마쥬와 유사합니다. 각 정당의 이념에 근거한 실적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스트롱맨 두 명이 각 정당의 후보가 되었습니다. 

 

한때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비해서는 민주주의가 낫다고 외쳤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인류를 번영하게 만들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이한 것은 코로나 팬더믹입니다. 한때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인 우리가 얼른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잘 먹고 잘 사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제라면 다 좋다고 말하던 시절도 예전입니다. 컴퓨터 한 대에 500만원 했던 시절도 예전입니다.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닙니다. 집집마다 컴퓨터가 한 대 이상 있습니다. 다들 잘 먹고 잘 삽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못살았던 시절 누렸던 <행복>을 그리워합니다. 선진국이 된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이한 것은 또한 <상실감>입니다. 과거에 누렸던 행복을 빼앗긴 것만 같은 현실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는 선진국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제가 잘 먹고 잘 살게 된 모든 이유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여 급속도로 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저는 맥북으로 설교를 쓰고, 아이패드를 보고 설교를 하며, 아이폰으로 전화를 하는 세계시민이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정녕 그렇게 해서 우리 삶에 평화가 도래했냐고 묻는다면, 정녕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이 행복해졌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흰 말이 승리하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흰 말이 도래한 이면에는 다른 말들이 있었습니다. 물가의 인플레, 죽고 죽이는 문화, 그리고 팬더믹과 같은 재앙들. 그것이 계시록이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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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요한계시록은 두 개의 인을 떼는 장면을 차례대로 들려줍니다.

 

다섯째 인봉을 땔 때의 장면을 살펴보십시오. (9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10절)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로마황제가 이룩한 <팍스 로마나>로 말미암아 잘먹고 잘살며 다들 행복해졌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실은 로마황제의 치하에서 죽임당한 자들이, 로마황제가 이룩한 제국을 규탄하며 하나님께 <공정한 심판>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여섯 번째 인봉을 땔 때의 장면을 보십시오. (15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바위 틈에 숨어서 (16절)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곧 어린 양 예수께서 행하실 공정한 심판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마치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 얼굴을 가리던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은 어린 양 예수께 얼굴을 가리며 자신들이 심판당할 일을 면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인봉부터 네 번째 인봉까지가 현재 우리 앞에 놓여진 로마제국에 대한 비밀의 폭로였다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인봉은 장차 도래할 하나님 통치에 대한 비밀의 폭로입니다. 제국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들의 기도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상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내 하늘에 상달된 기도가 정점에 이르게 될 때에 결국 제국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즉 로마제국에서 잘먹고 잘사는 자들은 끝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로마제국을 비롯한 모든 제국은 일시적이나, 천상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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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누가 왕인가?” 눈 앞에 있는, 세상이 힘껏 찬미하고 있는, 눈만 뜨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로마황제가 진정한 왕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죽임당하신 어린 양 예수께서 진정한 왕입니까? 

 

또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영원한가?” 자신의 힘과 권세를 자랑하고 온 세계를 정복하려 애를 쓰던 로마제국이 영원합니까? 아니면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주의를 채택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열강들이 영원합니까? 아니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천상의 하나님 나라가 영원합니까?

 

살다보면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차를 타고 다닐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결혼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이긴 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놓인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역을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걱정 없이 좋은 자리의 목회지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안정된 교회에서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고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아마 저는 이런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만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를 “삯꾼”이라 부릅니다. 목사는, 이런 문제를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양 예수의 길을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야 목사에게도 권위가 생겨납니다. 좋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선택했을 때에, 앞날이 훤히 보이는 미래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고려할 때에, 우리는 그를 <목사다운 목사>라고 부릅니다.

 

목사만 그럴까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똑같지 않을까요?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에만 매몰되어 산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를 고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나라가 영원하지 않기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좁고 험한 길을 선택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좁고 험한 생명의 삶,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것입니다.

 

오늘 어린 양 예수께서 제거하신 인봉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앞에 있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 생각보다 별 것 아니지 않을까요? 우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 영혼의 문제, 그것이 사실상 전부이지 않을까요?

 

대림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왕으로 결국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오신 이후에 변명하면 늦습니다. 깨어있으십시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그가 바로 온 세상의 왕이시며 주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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