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교회나 훌륭한 목사님을 원합니다. 크게 부흥시키고 교회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들 훌륭한 목사님을 원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학교 시절에는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를 성공시킨다는 말 자체를 <천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관심을 갖는 일조차도 <천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런 저런 말을 듣고 보니, 또한 성도들이 살아온 신앙의 여정을 차츰차츰 알게 되다보니 어느새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시덥잖은 목사가 담임으로 오게 되면 전반적인 분위기가 축 쳐집니다. 뭘 하나 해도 제대로 되질 않습니다. 분란과 뒷담화만이 교회를 뒤덮습니다.

 

반면 좋은 목사님이 오면 전반적인 분위기가 활짝 핍니다. 뭘 하나 해도 제대로 되는 것만 같습니다. 덩달아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의 신앙도 좋아집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목사 하나 바뀐다고 교회 분위기가 좌우된다는게 정상이냐?” 네, 정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부산경남지역의 교회가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왕왕 듣습니다.  담임목사 교체기에 교회는 정말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끄러운 것은 담임목사 교체가 잘못 이뤄졌을 때입니다. 이전 담임목사 시기와 새로운 담임목사 시기를 겪은 부교역자들이 가장 힘들어합니다. 새로운 목사님을 보좌해야 하기도 하지만, 또 교회가 왜 새로운 목사님 때문에 힘들어하는지도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 어떤 목사님이 좋은 목사님일까요?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겉과 속이 다른> 목사님은 좋은 목사님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경력이 과장된 것 같은 목사님은 좋은 목사님이 아닙니다. 저도 이 바닥에 있는 동종업계 종사자다보니 대충 이력을 보면 <과장된 경력>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더 좋은 교회에 청빙받기 위해 경력을 과장하는 경우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박사학위라도 같은 박사학위가 아닙니다. 쉽게 돈만 내면 딸 수 있는 학위가 있고,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학위가 있습니다. 또한 이전교회 사역경력도 조금만 공을 들여 평판을 알아보면 단순한 몇 줄의 경력 너머의 진실을 알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좋은 목사 고르는 법>을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줄 것 같습니다. 경력이 과장되지 않은 목사님을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담백하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차근차근 걸어간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학위를 받기 위해 관심사에는 없는 공부를 애써 하며 학위를 따고, 경력을 쌓기 위해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교회에서 애써 사역을 하고, 잘되고 부흥한 일만 말하는 그런 목사님은 일단 제쳐두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자신만의 길과 스타일을 꾸준히 다듬으며 걸어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마 좋은 목사님이라고 추천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진국 같은 목사님을 찾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많은 교회가 좋은 목사님을 청빙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담임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과한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담백하고 진국같은,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과 닮은 좋은 목사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바 많은 교회들은 사업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 경력을 부풀리며 아등바등 했던 사람들이 모여 담임목사를 청빙합니다. 자연히 그들이 살아온 바에 근거해서 <성공한 경험이 있느냐> 혹은 <화려한 경력이 있느냐> 혹은 <얼마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있느냐>에 근거해서 사람을 판단합니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왕왕 있습니다. 목사를 뽑을 때마저도 세상적인 잣대를 근거로 사용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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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냐 의구심을 지니실 겁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의 배경이 <좋은 목사>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교사들은 바울을 일컬어 (10:10)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실제 몸을 보게 되면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바울도 이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어느정도는 수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있으면 너희에 담대한” 존재라고 자신을 소개하니까요. 말 그대로 <겉으로 볼 때에는 보잘 것 없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 <편지로는 담대하고 힘있는 척>한다는 겁니다.

 

한 번 상상력을 돌려보면 어떨까요? 그때 당시에는 직접 편지를 쓰기보다는 대필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만 하더라도 <더디오>라는 대필자의 이름이 로마서신 말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대의 거짓교사들은 <바울>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유약한 사람이고, <바울> 뒤에 있는 대필자가 실세라고 말했던 것은 아닐까요? 즉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실제 보면 알겠지만 <목사 깜냥>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글 잘쓰는 사람을 뒤에 두고 속이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바울은 (11:22) 스스로를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말은 고린도교회에 바울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학위나 경력을 말하지 않고 사역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반면 거짓교사들은 고린도교회에 도착해서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신의 경력사항을 소개하며 자신들은 진짜 참된 목사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바울은 경력도 불분명하고, 말도 못하고, 기껏해야 대필자를 통해 편지로만 목사인 척 하는 거짓목사라 매도했습니다.

 

여기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던 바울의 <의리>는 접어둔채로 <거짓교사>의 말에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왜 휘둘렸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바울을 썩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욕망은 <부>와 <권력>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잣대를 교회에도 적용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목사>라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직계제자이거나, 예수의 수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직통 계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번지르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바울은 온갖 박해로 말미암아 몸이 망가져있었습니다. 겉으로 볼때에, 적어도 고린도교회의 잣대에 근거하면 훌륭한 목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11:9)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돈>과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심 때문에, 혹여나 바울이 <돈>을 받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권위가 깨어질까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잣대인 세속적 욕망인 <돈과 권력>을 기준으로 바울을 이미 평가절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짓교사들이 와서 경력을 들이대며 바울을 대체하고 목사직을 엿보고 있는 상황이 바로 고린도후서의 맥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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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화려한 경력의 목사를 원합니다. 경력과 학력을 뻥튀기하지 않으면 면접에까지 갈 수 없다고 다들 말합니다.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는 담임목사가 될 길은 닫혀있다고 다들 말합니다. 물론 좋은 목사를 뽑겠다는 심정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이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이라는 사실이 슬플 따름입니다. 더 슬픈 것은 그런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서 목사들이 자신의 경력을 관리한다는 말이겠지요. 저보다 10살 정도 많은 목사님들에게서 경력을 세탁하고 부풀리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참 슬펐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겉모양에 불과합니다. 실상은 썩어있습니다. 세속적인 잣대를 여전히 교회로 끌고 옵니다. 중직자를 뽑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헌신한만큼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닌 말 때문에 여전히 교회 안에 세상적인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면 우리는 한 번 되돌아봐야 합니다. 한때 서울에 잘나가던 차세대 목사님들의 학력이 모두 SKY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해외유학이 아니고는 담임으로 청빙하지 않겠다는 교회도 많습니다. 좀 더 지적인 목사를 청빙하고 싶은 선한 의도겠지요. 하지만 선한 의도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이 교회 안에 작동한다면 우리는 그때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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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을 자랑하고, 이스라엘인을 자랑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랑하는 거짓교사들, 그리고 베드로 및 야고보와 바나바 같은 이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자랑하는 거짓교사들. 그들에 비하면 바울은 <바보>입니다. (11:1) 바울은 스스로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11:16)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며, 혹은 <어리석은 자>로 여긴다면 자신이 조금이나마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점잖게 <어리석은 자>라 말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딱 와닿는 말로는 <바보>입니다. 자신은 바보이며, 바보라는 사실을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겠다면 한 번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겁니다. 자랑을 들어보라는 겁니다.

 

그의 자랑은 이와 같습니다. (24절) 유대인에게 40대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25절) 돌로 맞은 일도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배를 타다가 파선했습니다. (26절)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과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들 중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27절) 또한 그는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삶을 견뎌냈습니다. 톰 라이트라는 신약학자는 바울의 이런 삶이, 결국 바울에게 일어난 온갖 합병증의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많이 두들겨 맞고 고생을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눈에도 병이 낫고, 간질 비슷한 것도 생겼으며, 말을 더듬어 어눌하게 보였다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삶의 연약한 서사들을 이야기하며 말합니다. (30절)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이런 바울이 12장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아닌 자신이 아는 한 사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본인이 겪었던 셋째 하늘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울의 <약함>을 자랑하는 이야기와 대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겪은 환상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겪은 환상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7절로 이어집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의 화려해보이던 환상은 결국 단순한 깨달음과 결합됩니다. (9절)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에게 주어진 환상마저도 <그리스도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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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린도후서에서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거짓교사들이 말하는 복음은 겉으로는 복음의 모양새를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거리끼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말하지만 결국은 혈통을 자랑할 따름입니다. 그들의 스승을 자랑할 따름입니다. 화려하고 유창한 언변을 자랑할 따름입니다. 거짓교사들이 담임목사가 된 교회를 상상해보십시오. 좋은 대학을 나왔습니다.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능한 말을 내뿜으며 교회업무에 철두철미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가 외치는 설교는 감동적이고, 도전적이고, 지적인 자극을 줍니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자기 희생이 없습니다. 약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몸 자체가 만신창이입니다. 그가 복음을 설파하며 겪었던 모든 고난으로 말미암아 몸이 떨리고, 말을 더듬고, 눈이 좋지 않습니다. 때로는 간질로 말미암아 <귀신이 들렸다>는 오해를 받는 때도 있습니다. 대필자와 함께 차근차근 작성한 편지로는 카리스마와 위엄을 뽐내지만, 실제 만나보면 썩 목사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경력이 있습니다만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엄청난 공부를 했습니다만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약함만을 자랑할 따름입니다. 그 이유는 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약해지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스스로 겪는 아픔과 고난을 자랑합니다. 그 과정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강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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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의 삶이 술술 풀려갈 때 정녕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나요? 정녕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잘 풀리고 계획대로 풀려갈 때에 오히려 우리는 신앙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삶이 술술 풀려가고, 기도가 잘 응답된다고 말하며, 좋은 경력과 자질을 갖춘 목사는 훌륭한 목사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여된 목사는 목사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우여곡절이 많았고, 눈물과 애환이 가득했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했던, 그런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히 채워진 진짜 목사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누가 좋은 목사인지를 묻고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는 단순히 좋은 목사만을 이야기하는데 머물지 않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삶이 술술 풀려가고, 기도가 잘 응답된다고 말하며, 좋은 경력과 자질을 갖춘 목사가 좋은 목사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삶이 술술 풀려가고, 기도가 잘 응답되며, 화려한 경력을 추가하며 살아온 그리스도인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지 않을까요? 겉모습은 누구보다 건실하고 복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여된 쭉정이 같은 신자는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이 많았고, 눈물과 애환이 가득했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했던 목사가 진짜 좋은 목사라면, 우여곡절 끝에 눈물과 애환이 담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운 신자들이야말로 진짜 신자가 아닐까요?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꿈꿔야 할 삶은 어떤 삶일까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