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름수련회 번째날 저녁, 저의 뇌리 켠에는 마치 영화필름처럼 과거의 나날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알게 모르게 나의 삶을 인도해온 하나님의 흔적들이 스쳐지나갔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선교원에 다녔습니다. 기독교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어린이성경 전집을 사주시곤 틈틈이 읽게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교회에 나가게 기억, 중학교 시절 교회도 다님에도 불구하고 특별반이 되어 <성경> 시간에 원목실에서 전도사님께 신앙교육을 받았던 기억 등등. 도저히 이해할 없는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체험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믿겨지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삶에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밖에 없었습니다.

 

날로 저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며 삶을 인도하는 신으로 인정했던 같습니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럴 밖에 없었던 미묘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과거로부터 지금껏 나를 인도하셨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앞으로의 나의 인생도 능히 인도하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함께 주로 다니던 친구에게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로 전도할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된 사실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행할 있는 분이라 생각했던 하나님의 이미지가,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대학교 시절 내내 저를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미지였습니다. 창녀와 세리와 함께 어울리시는 , 병자와 귀신들린자를 비롯한 약자와 스스럼 없이 지내시는 , 못난 제자들과 함께 친구처럼 지내시는 .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행할 있는 분이라 생각했던 제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막상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약간의 괴리가 있었습니다. 마침 저는 해양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가 익숙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아침바다 배를 타고 출항하는 어부들이 익숙했습니다. 

 

저를 처음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이미지는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행하실 있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대학생 시절에 저를 사로잡았던, 그리고 지금껏 저를 사로잡은 하나님의 이미지는 창녀와 세리와, 귀신들린 자와 병자와, 못난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하나님입니다. 

 

-

 

룻기의 이야기는 매우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번째 설교때 말했던 것처럼 흉년으로 말미암아 이방땅으로 피난갔다가 완전히 망해버린 가문이 다시 베들레헴 땅으로 귀환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은혜로 말미암아 재기에 성공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도 과정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은 과정들 속에 <하나님의 흔적> 있다고 고백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서 절정부를 끌어가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룻기 4 전반부의 장면입니다.

 

룻은 보아스를 이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유혹하면서) 룻은 보아스만이 자신과 나오미를 구할 있다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순간 룻의 유혹에 넘어가 달콤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룻과 나오미에 대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3:13) “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문제를 법적으로 끌고가겠다는 겁니다. 나아가 과정에서 보아스보다 앞순번에 룻에게 법적 책임을 질만한 사람이 있으니, 사람을 불러서 문제를 완수하겠다는 겁니다. 룻은 보아스를 유혹했습니다. 보아스는 유혹의 진의를 알아듣고는, 룻과 나오미를 법적으로 책임져보겠다고 결론짓는 것이 바로 4장의 배경 이야기입니다. 

 

(4)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보아스보다 앞순번을 갖고 있어 룻과 나오미를 책임져야 사람이 지나간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4:3-4)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다음은 나요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자신보다 순번에 있는 사람이 나오미와 룻을 책임질 있다면 그렇게 것이며, 책임지지 못하겠다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별다른 숙고, 판단 없이 가볍게 말합니다. “내가 무르리라그러자 보아스가 말합니다. (4:5)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그냥 단순히 책임만 지면 되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책임을 지게 된다면 모압여인과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에게서 아들을 낳으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죽은 남편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됩니다. 이전에 말했듯이 여기서 모압여인은 625전쟁 직후의 중국여인과 유사합니다. 일제해방 직후의 일본여인과 유사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책임을 져야 하게 되니 사람이 말합니다. (4:6) “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다시 생각해봅시다. 보아스는 어떨까요? 보아스 또한 손해를 감내해야 합니다. 그의 재산의 일부를 룻과 나오미를 먹여 살리는데 써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여인 따위인 룻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되, 아이는 죽은 이의 계보에 등록됩니다. 그대로 손해보는 장사입니다. 아무리 룻이 아름답고, 행실이 곱다 하여도, 단순한 사랑 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9-10)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

 

성경에는 씨를 계승할 없게 억울한 과부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룻도 그런 과부들 하나입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아들도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씨를 계승할 방도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룻말고도 그런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말이란 여인네입니다. 잠시만 룻기를 접어두고 창세기 38장으로 가보십시오! 거기에 비참한 여인 다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 오난, 셀라 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그리고 엘에게 다말이란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7) 엘이란 사람이 여호와 앞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십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그가 죽은건 본인의 잘못이지, 아내인 다말의 잘못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씨를 주기 위하여 당시의 <형사취수제> 풍속을 따라서 엘의 동생 오난에게 씨를 빌려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난은 다말과 관계를 가지되 씨를 주지는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10)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오난마저도 죽게 됩니다. 여기서 다말의 기구한 인생을 보십시오. 사실 나오미보다 기구한 인생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남편을 잃게 됩니다. 남편의 동생마저 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막상 씨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첩첩산중입니다. (11) 마지막 하나 남은 셀라를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셀라마저 죽을까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에게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수절> 명합니다. 기한없는 <수절>이며, 사실상 영원한 <수절>입니다. 이제 다말은 씨가 없이 죽게 되는 불쌍한 과부의 운명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유다가 다말의 고향에 방문하게 됩니다. <> 없이 영원한 <수절> 상태에 있던 다말은 꾀를 부립니다. 창녀로 변장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아버지인 유다를 꾀려 합니다. 결국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는데 성공을 하고 둘은 잠자리를 하게 됩니다. 다말은 자신의 남편인 엘에게 받지 못한 <> ,그리고 동생인 오난에게 받지 못한 <>, 그리고 시아버지 유다의 방해 때문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인 <셀라>에게 받지 못한 <>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여 드디어 얻게 됩니다. 

 

분명 이야기는 오늘날의 문화와는 너무 달라서 우리에게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설교자가 다루기에도 선정적인 부분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씨가 없는 과부>, 이른바 소망이 없는 여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이 없는 여인, 씨가 없는 과부는 어떻게든 씨를 받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아버지 유다란 늙은 남자를 속여서 씨를 얻은 유다와, 늙은 남자 보아스를 유혹하여 결국 자신과 나오미를 책임지게 만들고 끝내 씨를 얻게 룻의 이야기는 서로 닮아있습니다.

 

-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우리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합시다. 우리가 소설의 작가라면, 적어도 소설이 펼쳐지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모든 것을 있겠죠. 그러면 우리가 소설 속에서 <> 캐릭터를 만든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떤 캐릭터를 만들 같나요? 일단 신의 능력치 중의 필요한 것은 <전능성>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할테니까요. 나아가 신이라면 모든 것을 알아야 것입니다. <전지성> 필요하겠네요. 또한 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면 안될 같습니다. <무소부재> 능력도 있어야 하겠거니와 시간도 능히 거스를 있어야 것입니다. 더군다나 가능하면 <>하다면 좋겠죠? 외에도 신의 속성으로 넣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누군가가 소설 속에서 <> 소개하는데, 신이 한낱 마굿간에서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사람은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을 보내기도 전에 태어났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걸 <성육신>이라는 위대한 사건으로 포장하지만, 당대에는 (특히 요한복음에 보면) 이를 <음란한데서 태어났다> 규정합니다. 저속하게 말하면 간음을 했거나 강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게 비춰졌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 태어나서 하는 역할이 꼴랑 목수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만능노가다꾼입니다. 어떤 이들은 헤롯성전이 지어질 당시 예수 또한 거기에 노가다꾼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곱씹어보십시오. 누군가나 <> 이야기로 창작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볼품이 없습니다. 너무나 하찮은 설정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감정을 가득 안고 세상으로 <> 막상 드라마의 절정에서 하는 행위는 <십자가에서 살해당함>입니다. 그의 생애를 곱씹어보십시오. 제가 앞에서 말했듯이 한낱 어부들과 어울리는 삶입니다. 한낱 귀신들린자, 병자, 창녀, 세리와 같은 세상에 찌꺼기와 같은 취급을 받던 이들과 어울리는 삶입니다. 병을 고치지 않았냐고요? 귀신을 내어쫓지 않았냐고요? 말씀이 능력있지 않았냐고요? 정작 그것만으로 그가 <>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볼품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정말 보잘 없는 존재였습니다. <>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다시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룻기 4 18-22절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룻기는 전형적으로 굶어죽기 좋게 보였던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이 꼬여버린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굶어죽기 좋게 보였던 과부의 계보에서 탄생하게 만드셨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나아가 오늘 본문의 시작은 <베레스> 계보입니다. 베레스는 누구일까요? 바로 앞에서 보아스-룻과 유사한 관계라고 말했던 유다-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그것도) 둘째 아들입니다. 룻기는 의도적으로 베레스와 룻의 계보를 엮어 다윗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 그들의 염원인 왕국을 건설한 메시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시원은 바로 베레스입니다. 

 

베레스는 누구입니까? 씨가 없어 자멸할 위기에 놓였던 불쌍한 과부 다말의 둘째 아들입니다. 다말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창녀로 변장해야 했습니다. 시아버지를 유혹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쌍둥이를 낳게 되었을 때에 베레스는 둘째임에도 불구하고 형을 제치고 나온 존재입니다. (38:27-30)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손에 매었더니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손에 홍색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베레스에서 시작된 계보는 결국 씨가 없어 자멸할 위기에 놓였던 불쌍한 과부와 유사한 룻으로 이어집니다. 룻은 결국 보아스를 유혹해야 했고, 그로 말미암아 보아스와 사이에 <오벳> 태어나고, 오벳이 이새를, 이새가 다윗을 낳게 됩니다. 계보가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딛고 있는 처절한 삶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고고하고 정돈된 삶에서 하나님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처절하고 처참하며 비천한 곳에서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지체높고 잘나가는 귀부인에게서 역사를 펼쳐가지 아니하시고, 씨가 없어 고통받는 과부들을 통하여 역사를 펼쳐나가십니다.

 

다윗은 첫째가 아닌 말째였을까요? 다윗은 처음부터 왕으로 등극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의 묘한 취향은 다말에게 있습니다, 룻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아닌 다윗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특한 취향은 결국 마굿간 말구유에 오신 노가다꾼의 아들 예수로 이어집니다.

 

-

 

오늘 계 이야기는 그냥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야기로 생각할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역사적 정보의 나열이라고도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계보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고유한 취향> 해설해주는 계보입니다. 하나님은 강자의 하나님이 아닌 약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부한 자의 하나님이 아닌 가난한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유능한 자의 하나님이 아닌 무능한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특한 메시아적 계보를 이끌어가실 때에 가장 중요한 기점에다가 <유다와 다말>이라는 성적으로는 충분히 부도덕해보이고 비난의 여지가 있지만, 씨가 없어 한이 쌓여버린 여인의 사연을 두셨습니다. 또한 <보아스와 >이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유대인 늙은 남성과 모압인 젊은 과부의 미묘한, 하지만 무엇보다도 절망 속에 베들레헴으로 귀환했던 과부의 많은 사연을 두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독특한 취향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 예수의 공생애 이야기,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무식한 어부들과 함께 거니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년간 혈루병 앓는 여인과, 죄사함을 많이 받아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과, 창녀와 세리와, 온갖 귀신들린 자와 병자들과 친분을 나누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안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독특한 취향이 발현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좋아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가슴을 치며 자신에게는 자격이 하나도 없다며 울부짖는 세리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온갖 금과 보화로 치장된 성전을 바쳐드린 헤롯을 좋아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한낱 렙돈 밖에 바쳐드릴 것이 없었던 과부의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룻기는 역설적이며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경영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씨를 기대할 없는 과부에게서 메시아를 끌어내는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하십시오. 시아버지를 꼬셔야하는 막막한 과부 며느리,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방땅까지 끌려왔던 막막한 과부 며느리, 그들에게서 하나님은 메시아 계보를 시작하셔서 다윗을 보내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마주하고 있는 지금 순간은 미래에 어떤 일을 만들어낼까요?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현재의 순간은 여러분 미래에 어떤 열매를 끄집어낼까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씨가 없는 과부를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8:28)” 우리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일하신 방식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을 있습니다.

 

-

 

저는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할까합니다. 대학시절 저를 사로잡았던 이야기는창녀, 세리, 어부, 귀신들린 , 병자와 어울렸던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는 애초에 내가 만났던 하나님의 이야기, “전지전능하시고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삼 깨닫게 사실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는 방식이, 바로 <창녀, 세리, 어부, 귀신들린 , 병자와 어울리는> 예수님의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고난을 선으로 바꾸시고, 불행과 고난 속에서 결실을 뽑아내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문가셨습니다. 절망 가득했던 다말에게서, 절망 가득했던 나오미와 룻에게서, 메시아의 계보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저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어떻게 흘러갈지 이해할 없습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한 막막한 삶의 자리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고백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정녕 하나님이 계십니까? 만약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아는, 다름 아닌 과부 다말에게서, 그리고 이방인 과부 룻에게서 나왔습니다. 다말의 하나님, 나오미의 하나님, 룻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