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6장] 전에 하던 대로...

2021. 8. 11. 14:10

한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말했습니다. 중요한 자리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도 아니였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건국 과정에 기독교의 이념과 가치가 녹여있다며 사실상 이 나라를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을 보냈던 선교단체는 <오늘의 캠퍼스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복음화>라고 외치던 단체였습니다. 정말 저의 대학시절은 한국기독교가 결국 정점을 찍고 민족복음화를 이룩할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얼마전 2021년 한국 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설문조사를 발표했습니다. 스스로를 종교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비율이 60%로 증가했습니다. 5년전은 50%였습니다. 1984년부터 한 설문조사의 데이터를 참고해보면 1984년 당시 56%의 무종교인 비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들어서 2004년에는 47%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2004년부터 2021년까지 떨어지던 무종교인 비율은 다시 반등했고, 결국 60%를 찍어버렸습니다. 1984년 첫 설문조사를 하던 당시보다 비율이 증가해버렸습니다. 더 참혹한 설문조사 결과는 연령별 무종교인의 비율입니다. 60대는 41%, 50대는 57%입니다. 반면 40대는 68%, 30대는 70%, 그리고 20대는 78%를 기록했습니다. 말그대로 20대들은 5명 중에 1명 만이 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종교>가 있다고 답한다는 말입니다.

 

갤럽 설문조사에 근거하면 2004년부터 2014년 사이의 어느시점, 그리고 한국교회 자체의 통계를 근거로 하면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의 어느시점에 대한민국의 종교와 기독교는 함께 고점을 찍고, 거기서부터 쇠락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고통이 교회 공동체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건물은 있는데 사람이 없다거나, 교회조직은 비대해졌는데 교회 내의 인구는 고령화된다던가, 교회학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모두가 그에 따라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젊은 세대들의 무종교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음,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구체적인 통계가 한국교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은 점점 가속화될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노년층의 문화와 취미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 가운데 누구보다 당황하는 것은 바로 젊은 세대들입니다. 실제 높은 비율의 무종교인의 세대에 속한 저 같은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 점차 사라집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학교나 청년부는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대형교회에는 젊은 청년들이 몰리며, 적은 교회에는 청년들이 점점 떠나갑니다. 남겨진 이들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새삼 질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성경으로 돌아옵니다. 다니엘서 6장입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리오왕을 모시는 총리 다니엘이 겪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다리오가 선택한 행정시스템은 다음과 같습니다. (1절) 고관 120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2절)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어 나라를 경영합니다. 왕이 가장 정점에 있고, 그 아래에 총리 셋, 그 아래에 120명의 고관이 제국을 경영하는 시스템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총리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을 총리로 선택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3절)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말 그대로 다니엘은 능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다니엘서를 1장부터 차근차근 읽어왔다면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나라를 잃은 백성입니다. 멸망 이후에 본국으로 끌려온 포로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는 밑바닥부터 실력을 입증했습니다. 성경은 그 실력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다고 알려줍니다. 더 나아가 다니엘은 다니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모독하고 무시하는 왕의 통치 속에서도, 실력을 입증받아 미래의 일을 해석하는 자리에 서는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6장은 다니엘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호의적인 왕 다리오가 등장합니다. 다니엘은 굳이 자신을 박해하는 현실 속에서 실력을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다리오가 그의 실력을 알며, 그의 실력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을 굳건히 신뢰하는 다리오왕 아래에서 이제 능력을 맘껏 발휘하면 될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에는 <위기>가 등장합니다. 왕이 하나님도 알거니와, 다니엘도 알기 때문에 다니엘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줄 기대하는 우리에게 전혀 생경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4절)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총리와 고관들은 대다수가 엘리트였을 겁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서울대 나온 사람들,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보기에 다니엘은 포로들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 통치할 때에 동경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김구나 신채호 같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기껏해봤자 한낱 <조센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니엘이 왕의 총애를 받습니다. 끌어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국의 자존심을 짓밟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국 엘리트들은 한낱 포로들 중 하나인 다니엘에게 모욕을 주고 싶어했을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간계를 고안합니다. (7절)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 이른바 다니엘을 제외한 모든 엘리트들이 똘똘 뭉쳐서 왕에게 법률을 제안합니다.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 이유는 (5절) “하나님의 율법에 관련된 조항이 아니고서는 다니엘을 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이 다니엘을 조롱하고 망신주기 위하여 꾀를 부린 것입니다.  

다니엘서 6장은 행복한 날들이 펼쳐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다니엘도 총애하는 왕인 다리오가 있지만, 실제 다니엘이 살던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

 

다니엘서는 포로기 시대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빼앗긴 이후, 하나님을 모시고 있던 성전을 빼앗긴 이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역만리 바벨론 물가로 끌려온 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먼저 가장 겪은 혼란은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느냐”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녕 살아계시다면 땅을 빼앗겼을까? 전쟁에서 패배했을까? 성전이 무너졌을까? 온갖 생각이 떠돌아다녔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혼란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신가”의 질문이었습니다. 혹여나 바벨론이 모시던 마르둑신에 비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무능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회의와 고민이 집결되어 그들이 내린 결론들을 담고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실까요?” 네, 그렇습니다.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실까요? 이방의 모든 신들보다 능하실까요?” 네, 그렇습니다, 전능하십니다. 온 세계의 다른 어떤 신들보다 전능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겪는 포로기의 상황은 왜 도래한 것일까요? 더 나아가 포로기의 상황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다니엘서는 “포로기의 상황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여 쓴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적으로 말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눈에 보이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것 같지만, 믿음의 눈을 들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겁니다. 

 

다니엘서 1장부터 5장까지는 하나님께서 땅을 잃고, 성전을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다니엘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바벨론이라는 이방땅 위에서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다니엘의 성공 이야기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능력을 발휘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가나안땅을 넘어서 온 이방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증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기본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더 나아가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서 1장부터 5장까지 반복적으로 그려오던 다니엘에게 불리했던 정치사회적 환경이, 다리오왕의 통치로 말미암아 호의적으로 변했음을 일러줍니다. 이전의 왕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괄시했습니다. 다니엘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리오 왕의 시대가 들어서자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다리오 왕의 시대가 들어서자 다니엘도 능력과 신앙을 인정받아 총리의 자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따라서 다니엘서 6장의 이야기는 한국교회가 정점을 찍고 쇠락하던 오늘 우리의 시점에서 되짚어보기에 너무 적실한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다수의 정치인이 교회를 다니며, (농담삼아)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어떤 교회에서 주차장 봉사를 시작했다고 하는 한 정치인 안수집사님의 이야기가 떠돌아다닐 정도로, 교회는 한때 막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기업가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연예인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젊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기독교 문화>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음악을 하는 대다수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악기를 배운 곳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 무대를 마련해서 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 곳도 교회였습니다. 신앙이 독실하건 독실하지 않건 한때 한국사회는 사실상 한국교회가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마치 곧 한국사회를 복음화하고, 기독교 복음이 한반도를 잠식할 것처럼 여겨졌던 때가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니엘서 6장의 시대가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를 곱씹어보며 우리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정말 좋기만 했을까요? 

 

-

 

다니엘서 6장은 좋기만 할 것 같은 시대가 도래했지만 결국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괄시하는 왕이 다스리던 시대나, 여호와를 존중하는 왕이 다스리던 시대나 똑같습니다. 다니엘을 한낱 포로 정도로 생각하는 왕이 다스리던 시대나, 그의 능력을 탁월하게 생각하고 총애하여 총리로 세운 왕이 다스리는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여전히 위기가 닥쳐옵니다. 

 

(10절) 다니엘은 엘리트들이 야합해 만들어낸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영향력 있는 높은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신앙을 타협할 것인지, 아니면 신앙을 위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영향력 있는 높은 지위를 잃을 수 있는 모험을 감수할 것인지. 오늘 성경 본문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다니엘 주변의 다수의 유대인들이 다니엘에게 조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마치 다니엘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더 나아가 다른 유대인들이 그에게 조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의연하게 마치 그런 조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늬앙스로 다니엘의 다음 행동을 묘사합니다. (10절)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는 다니엘서에서 반복되는 메시지의 되울림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다니엘서는 신앙의 모험을 다룬 책입니다. 신앙의 모험은 인생의 모험입니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모험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할 수 있는 모험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이런 모험을 감내합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위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의 목숨을 잃게 하실지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나의 지위와 권력을 보존해주시지 않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결의가 담겨있습니다. 기실 따지고보면 현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미 땅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창씨개명을 통해 본래 이름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서 6장의 다니엘이 빛나는 이유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다니엘이 지위와 권세를 누릴 위치에 오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과 같이 하나님만을 붙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은 신앙의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사자굴에 끌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를 총애하는 왕이 있다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다니엘서 6장은 분명 1장에서 5장까지 이어지던 반유대적 정책과는 전혀 다른 친유대적 정책을 펼치는 왕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다니엘서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반유대적 정책을 펼치는 왕이 다스리던, 친유대적 정책을 펼치는 왕이 다스리던, 하나님의 백성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셨다는 겁니다. 상황과 환경과 조건이 매우 개선된 것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결국 똑같다는 겁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며 한국사회에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때나, 지금처럼 교회가 쇠퇴하고 사람들이 떠나가며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지는 시점이나, 바뀐 것은 없습니다. 매우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은 사실 허상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우리는 다니엘처럼 신앙의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뀐 것은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십시다. 한국교회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와 오늘날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찍는 시점을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고작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에 있을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에 근거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우리가 “신앙의 모험”을 감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까지 유행하던 수많은 메시지를 되짚어보면 당시 한국교회의 욕망은 간단했습니다. 말 그대로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기독교인이 재벌이 되고 기독교인이 국가대표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다니엘서 1장에서 5장까지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괄시하는 왕들을 폐위시키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다리오왕을 앉히는 것이 한국교회의 목표였습니다. 크리스텐덤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뜻하는 크라이스트와 왕국을 뜻하는 킹덤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기독교 왕국입니다. 한국교회가 한창 부흥할 때 우리의 꿈은 한낱 크리스텐덤, 기독교 왕국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해야 하는 싸움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싸움이지 않습니다. 정말 해야 하는 싸움은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국가대표선수의 종교가 무엇이어야하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돈과, 권력과, 지위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에 나오는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선택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되짚어보면 한국교회가 쇠락한 이유,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잃은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하물며 우리 목회자들조차도 하나님을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 한낱 돈과 권력과 지위와 같은 세속적 욕구에 굴종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말씀을 갈음하려 합니다. 세상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리의 생이 80년이라고 보면 80년동안 정말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할 것입니다. 크고 굵직하게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의 생애동안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고 흥왕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각광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생에동안 (지금처럼) 교회가 쇠퇴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며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현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다리오가 왕이 되든, 안되든,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바로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상황을 보니 코로나 팬더믹은 장기전이 될 것 같습니다.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질 것 같습니다. 교회의 교세 뿐만 아니라 재정적 상황도 점점 안좋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맙시다. 우리가 정녕 싸워야 할 것은 교세를 어떻게 키우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재정적 상황을 어떻게 개선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신뢰도를 어떻게 회복시키며 떠난 이들을 어떻게 붙잡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든 문제가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느냐?” 상황과 환경과 조건이 시시때때로 바뀌지만 우리가 여전히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거기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왕이 되던 간에 하나님은 하나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관건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