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는 말 : 한국교회의 영원한 핫이슈, 동성애.

 퀴어 문화축제, 학생인권조례. 한국교회 교인들의 카톡방을 불나게 만든 사건들이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해서 우리를 고민에 빠트리는 사건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도 유대인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자유인도 없이 모두가 동등하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동성애라는 특정 이슈 앞에서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이런 현실 속에서 동성애를 대하는 지혜로운 방법은 없을까? 그저 동성애를 죄라고 선언하며, 모든 성적소수자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해야할까? 아니면 동성애는 죄가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선물이며, 성적소수자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야할까? 이에 대한 좋은 답변이 있다. 무려 20년전인 1995년 미국 땅에서 쓰인 책, 리차드 헤이스의 역작 신약의 윤리적 비전이 우리에게 좋은 해답들을 제시한다. 본인은 본 책을 통해서 성적소수자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지도 않으면서’, ‘성경에 있는 그대로 동성애를 죄의 행위로 받아들이는리차드 헤이스의 성서적, 목회적, 윤리적 지혜를 제시하고자 한다.

 

2.리차드 헤이스, 그리고 게리.

 리차드 헤이스는 본 책에서 게리라는 한 친구를 소개한다. 그는 AIDS로 죽어가고 있는 성적소수자 친구였다. 그는 1898년 여름 리차드 헤이스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성적소수자였다. 하지만 동성애 옹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성서해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의 조심스럽고 섬세한 성서해석태도는 그들의 성서해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많은 동성애 옹호자들의 글이 그가 경험한 동성애 집단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의 글들의 논지와는 전혀 다른, 성적소수자의 이야기를 집필하기로 리차드 헤이스와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19905월 세상과 작별하고 만 것이다. 그때 누렸던 벗과의 약속, 그리고 죽음에 대한 아쉬움, 거기서 리차드 헤이스는 시작한다. 그가 이루지 못했던 작업들을 이루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3.성서 속의 동성애 읽기.

 리차드 헤이스는 성서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한다. 오히려 동성애를 위시한 심각한 토론의 열정을, 성경에서 수없이 많이 다루고 있는 가난한 사람과 소유를 나누는 일에 투자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지막이 보이면서 글을 시작한다. 먼저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19:1-29)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그 구절이 동성애 성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에 대해 딱 들어맞는 구절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오히려 에스겔의 신탁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함(16:49)’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다음은 레위기를 다룬다. 레위기 또한 동성애를 단호하게 부정한 것으로 언급하고, 정죄한다(18:22, 20:13). 하지만 리차드 헤이스는 구약의 율법과 계명이 신약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고 선을 긋는다. 따라서 그는 이 계명이 어떻게 신약에서 기능하는지를 알기 위해 신약(고전 6:9-11, 딤전 1:10, 15:28-29)으로 넘어간다. 특별히 그는 고전 6장에서 레위기 구절이 인용되고 있음을 밝힌다. 하지만 문맥 자체의 초점이 성도덕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또한 대부분의 신약인용은 동성애 자체를 탓하기보다는 포괄적인 음행을 지적한다고 명시한다. (물론 포괄적 음행 안에 동성애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로마서(1:18-32)로 넘어간다. 사실 동성애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맥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 문맥 아래에서 동성애 행위를 명시적으로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에서 레즈비전 성관계까지 포괄하는 문맥으로 모든 죄악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복음이라는 종말론적 도구를 해설하는 배경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리차드 헤이스는 로마서 문맥의 핵심을 짚어낸다. 동성애를 비롯한 온갖 죄악의 목록은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란 사실 말이다. 그는 이 문맥 전체를 신화-역사적 범주에서 사고된 인류 전체에 대한 일반화된 정죄라고 규정한다. 한마디로 이 문맥 아래에서의 동성애는 2차적이며, 예화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이 리차드 헤이스의 주된 논점이다.

 이어서 그는 동성애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남녀연합의 이야기와 상반되는 반종교적 성례와 같다며,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또한 이는 바울 자신만의 독특한 논조라던가, 혹은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특별한 계시가 아니라, 헬라주의 유대교의 일반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한마디로 리차드 헤이스는 동성애를 지적하고, 죄악으로 몰아가며, 그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로마서 1장 문맥에서 동성애를 언급하지 않았다. 당대 헬라주의 유대교의 일반적인 신학적 이해를 고스란히 인용해서 복음을 해설했다. 동성애는 단지 인용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로마서 1장은 동성애를 하나님에 대한 격렬한 저항적인 죄로써 기술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을 떠난 일반적인 사례들 중의 하나로써 제시할 뿐이다. 다음은 리차드 헤이스가 정리한 동성애에 대한 로마서 논지의 4가지 관찰이다.

  1. 바울은 본문 속에서 인류의 보편적 타락에 대한 전 세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이교도 죄인들의 개인적 삶의 역사를 해설하고 있지 않다.
  2. 동성애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왜곡시키는 생생한 이미지를 특별히 잘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동성애 행위를 특별히 주목하여 끄집어낸다.
  3. 그렇다고 동성애가 특별히 비난받을 격렬한 죄는 아니다. 탐욕, 수군거리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과 동등한 인간죄악의 결과들 중 하나일 뿐이다.
  4. 동성애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부정적인 일상의 모습들 중의 하나가 바로 동성애일 뿐이다.

 리차드 헤이스는 다음과 같은 정리 이후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동성애는 물론 악이다. 죄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동성애를 하는 이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책망하기 위한 독특한 자리에 위치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를 특별히 책망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망각한 위험한 환상 속의 삶에 다름없다고 리차드 헤이스는 끝을 맺는다.

 

4.정경이 말하는 동성애.

 지금까지 동성애를 말하는 본문을 리차드 헤이스는 해석해냈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로써 리차드 헤이스는 성경이라는 정경이 말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해서 정리한다. 먼저 그의 입장은 단순하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를 위해만드셨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의 성적인 욕망은 결혼관계 안에서만 충족될 수 있도 명령되었다. 따라서 모든 성적인 갈망을 충족하는 일로써의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죄악이다.

 이어서 리차드 헤이스는 성경이 타락한 인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인간은 마음이 어두워진 존재이다. 우리의 감각은 왜곡되고, 우리의 의지는 변질되었으며, 순종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따라서 죄의 본성 자체가, 죄의 행위 자체가 우리의 자유를 통해서 선택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죄는 우리의 자유를 넘어서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각 개인의 삶과, 그에서 솟아나는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따라서 동성애는 우리의 자유를 넘어 역사하는 일반적인 죄의 일종인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성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비판한다는 사실을 리차드 헤이스는 지적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독신생활도 권유하고 있다. 성은 우리에게 있어서 핵심적 사안이 아닌, 부차적 중요성을 지닌 사안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적 욕구의 충족이 아닌, 정의와 자비 그리고 믿음이다. 따라서 동성애적 성향과, 그에 따르는 성적 욕구의 충족은 필히 정당화 될 수 있는 유의 것이 아니다.

 

5.정경 안에서 동성애 해석하기.

 리차드 헤이스는 이러한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공동체’, ‘십자가그리고 새 창조라는 초점 이미지를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먼저 공동체라는 초점 이미지 아래에서 동성애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정경은 개인의 사적인 도덕성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그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건강, 온전성, 순결성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공동체는 순결해야만 한다. 죄를 떠나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죄악된 행위가 개인적 윤리에 위배되는 소소한 잘못을 넘어서, 공동체의 정결성을 헤칠 수 있는 심각한 실수임을 발견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는 이러한 정결성을 위한 순결한 삶을 지지해주는 기반이 된다. 따라서 동성애 또한 이러한 윤리를 가능케하는 공동체의 틀 아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어서 십자가아래에서 동성애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십자가와 동성애를 연결짓는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의 죽음이 불의한 자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뛰어넘는 아들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십자가의 이야기는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 기능할 수 있다. 리차드 헤이슨는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을 정죄해선 안된다. 우리는 희생적인 섬김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이 AIDS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때에 교회를 향한 특별히 긴급한 요청이다(595)’라고. 또한 십자가는 동성애적 욕망과 성향 아래에서 고민하며 씨름하는 리차드 헤이스의 친구 게리와 같은 이들에게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말한다.

 결국 그 유일한 희망은 새 창조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아직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욕망과, 옛 집착적 삶과 싸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욕망 아래에서 넘어진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제시된 유일한 삶이다. 따라서 동성애 성향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고 리차드 헤이스는 말한다. 성령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투쟁하며, 하지만 그럼에도 욕망에 굴복하는 자신을 십자가 아래에서 수용하면서, 그렇게 사는 삶 말이다. (덧붙이자면 동성애는, 우리 모두가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살아갈 때에 발목을 잡는 결점, 약점 중의 하나일 뿐이다.)

 

 6.동성애에 대한 신약의 증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동성애 행위를 반대하는 규정을 명확하게 밝히는 구절이 없음을 명시해야 한다. 또한 성서의 주된 관심이 동성애 행위에 대한 반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전체의 이야기는 성적 욕망에 대한 무절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스케치를 제공한다. (상투적이라 함은, 동성간의 연애 이야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성경 속에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해석들을 뽑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리차드 헤이스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창기와 세리들과의 식탁교제처럼 대단한 스캔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힌다.

 또 누군가는 동성애에 대해서 ‘1세기 교회에서 이방인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에서 성적소수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리차드 헤이스는 신실한 이방인을 통해 신실한 이방인의 돌아옴을 증언하는 [명확한 성서적 증언]을 견할 수 있었던 1세기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신실한 동성애 그리스도인들의 돌아옴을 증언하는 [명확한 성서적 증언]을 발견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따라서 리차드 헤이스는 동성애를 인간 삶의 질서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중의 하나로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동성애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근거는 없을까? 먼저 리차드 헤이스는 교회 전통이 1900년이 넘게 동성애를 경멸해왔음을 밝힌다. 그리고는 전통으로 성서를 읽을때에는 오히려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렇다면 이성, 과학을 통해 읽으면 어떨까? 여기서도 난점이 발생한다. 과학계의 연구결과에도 이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선천적 특질이라 말하는 한편,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향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리차드 헤이스는 알코올 중독동성애를 비교한다. ‘알코올 중독은 선천적인 성향이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기질도 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알코올 중독에의 성향동성애적 끌림의 성향이 흡사 비슷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선천적 성향을 흡수하며 알코올 중독을 향해 나아갔을때에 정당화되지 않는 것처럼, ‘선천적 동성애적 성향또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그렇다면 동성애와 동성색을 나누는 스크록스의 성서해석은 어떨까? 리차드 헤이스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먼저 스크록스는 헬라 문화에 흔히 있었던 소년을 이용한 남색이라는 문화를 통해서 신약 성경의 본문이 대부분 이러한 헬라 문화에 대한 비판-본문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리차드 헤이스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헬라 문화에 그런 유의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한들, 바울의 기록이 그러한 묘사로 활용되지도 않았고, 문맥상 그렇게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른 대안은 없을까?

 리차드 헤이스는 우리의 관념들을 파괴하는 사례들을 제시한다. 바로 게리와 같은 신실하고 효과적인 삶과 사역을 살아내는 동성애 그리스도인이라는 실질적 사례 말이다. 이 사례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동성애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자세를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7.교회론적으로 접근하기.

 신약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용인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게리와 같은 신실하고 효과적인 삶과 사역을 살아내는 동성애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교회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우리는 먼저 동성애를 다룬 로마서 문맥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 동성애를 증오하는 사람 또한 동성애 행위를 하는 이들과 동일한 핑계할 수 없는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이후에야 우리는 동성애적 행위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적 성향을 띄고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교회론적 입장을 다룰 수 있을테다.

 먼저 리차드 헤이스는 동성애자를 위한 민권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퀴어 퍼레이드라던가, 혹은 학생인권조례 같은 영역을 말한다. 우리는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실시하면서도 여전히 교회일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리고 초대교회 전통이 견지했던 화해의, 화목의 길일 계속 따라 걸어야 한다. 우리는 동성애 행위에 반대할지라도, 그럼에도 동성애 성향의 지체들을 향한 지지를 견지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좁은 길이라고 리차드 헤이스는 주장한다.

 또한 리차드 헤이스는 동성애자가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응당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알코올 중독자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시기하는 이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부모를 배역하는 이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교회는 죄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죄를 끌어안고도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자하는 부족하고도 연약하지만 참으로 위대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동성애자를 배척해야한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심각한 죄악인 폭력에 대해, 그리고 물질주의에 대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 들어온 동성애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동성애적 성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심판 행위를 행하는 죄인들이라고 그들을 매도하기도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어떤 집단에의 배척이 아니라, 끝없는 대화이다. 그리고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길이기에.

 이어서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동성애적 성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가능할까?’는 질문에 리차드 헤이스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죄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하셨다. 동성애 성향의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길은 동성애적 성행위가 아니라, 마치 독신과 같은 금욕생활에 들어가는 길이다. 이는 아직 자신의 짝을 만나지 못한 독신자의 삶과도 일치한다. 때로는 넘어질 수 있다.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방향성은 분명히 해야한다. 치열한 분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리차드 헤이스는 서두에 언급된 게리의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다. ‘동성애자들이 신앙 공동체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공동체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변화, 훈련, 학습의 장소이지, 단순히 위로받거나 탐닉을 추구하는 장소가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607)’ 하지만 이는 동성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만은 아니다.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한 모든 이성애 성향을 지닌 미혼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한 명령이다.

 또한 이어서 리차드 헤이스는 교회가 동성애자의 결합을 재가하고 축복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성경에 말한 성적욕망에 대한 인간의 대책은 이성간의 결혼혹은 금욕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누군가는 그런 처사가 폭력적이지 않는가?’라고 묻기도 한다. 이에 대해 리차드 헤이스는 결혼하기 원하지만 원하는 상대를 만나지 못한 이성애적 성향을 지닌 미혼 그리스도인과 비교한다.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함을 일궈내지 못하고 꾹 참아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길을 순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리차드 헤이스는 이런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정리한다. 물론 때로는 폭력적으로 보이지만 그가 말하는 논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서 죄의 굴레에 메여 있지만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순종을 위해 자유롭게 된 인간 존재라고 말이다. 따라서 동성애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리차드 헤이스가 제시하는 미래는 1.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힘입어 이성애적 성향으로 변화되는 축복을 입은 사람2.연약함을 안고 훈련하며 금욕생활을 하는 축복을 입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아직의 사이를 강조하며, 각기 다른 사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선사하신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명시한다.

 마지막으로 리차드 헤이스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동성애에 대한 질문이 아닌, 사역에 필요한 은사와 은혜를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안수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동성애적 성향은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본성적 죄의 성향에 다름없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부모를 거역하는 이들, 음란한 이들, 수군대는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바탕으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받을 것인지, 안수를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주라고 해법을 제시한다.

 

8.나오는 말:이념이 아닌 그리스도로 하나되는 교회를 꿈꾸며.

 리차드 헤이스는 보수적이다. 사실 그의 논지를 따라가보면 ‘동성애’라는 질문에 대하여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성서적 답변을, 그리고 ‘인간’과 ‘세상’에 성서적 답변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답변을 제시했다. (일종의 우문현답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리차드 헤이스의 대답이 전혀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의 입장이 동성애 성향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폭력적으로 보일 여지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본인은 본 챕터를 읽고 정리하면서 ‘보수적이어도 충분히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리차드 헤이스는 동성애적 성향을 합리화시키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맹점에 대해 나름 ‘학문적 진정성’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면서도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이들을 억압하고 괄시하는 이들에게도 ‘목회적 입장’을 제시한다. 어쩌면 그의 보수적인 동성애 성향의 신실한 그리스도인 ‘게리’와의 만남 덕택일 테다. 분명 리차드 헤이스는 ‘게리’에게서 ‘약함 가운데서 온전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많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동성애에 대한, 그리고 동성애적 성향과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폭력과 혐오와 경멸이 만연하다. 사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제목이 하나 있다. 바로 리차드 헤이스가 게리를 만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게리를 만날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게리는 동성애에 대한 포비아적 태도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약함 가운데 온전함을 일궈내는 복음의 능력을 현현하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성애라는 뜨거운 이슈가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교회, 인간, 세상,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것이다. 숨어있는 게리들이 그들을 만나주기를, 예수께서 친히 포비아적 태도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게리를 선사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중략)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리차드 헤이스, 신학의 윤리적 비전, 유승원, IVP(2002), 573-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