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 (마태복음 4:1-11)

2021. 9. 14. 17:1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2018년 1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크게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청년부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제가 섬기는 교회는 교회본당과 교육관이 나뉘어있었습니다. 동일한 시간에 본당에서는 오후예배가, 교육관에서는 청년부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마쳤으며, 본당에서 예배가 끝나면 교인들이 귀가하는 길에 교육관 앞을 지나가는 구조에 가까웠습니다. 자연스럽게 청년부 예배가 끝나고 일어난 싸움을 교인들 다수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발단은 성탄절 발표회였습니다. 

 

다양한 파벌이 형성되어 있던 청년부 내에서는 왜 누구는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하지 않는지가 그 날을 계기로 터졌고, 결국 준비하는 쪽과 준비하지 않는 쪽이 서로 욕을 주고 받으며 크게 싸워버렸습니다. 물론 묵혀있던 갈등이 터졌던 순간이었습니다. 청년부 담당하시던 부장집사님은 (어른들이 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고, 저는 어차피 터질 문제기 때문에 오히려 말리는걸 말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가슴은 타들어갔습니다. “도대체 나는 청년부 담당 목회자로 무엇을 했을까?”하는 현타가 깊이 찾아왔습니다.

 

더군다나 그 날은 싸움이 끝나자마자 부산기독교성시화운동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에 참가해야했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 앞의 공원에서 열리던 행사였기 때문에 다수의 교인들과 교역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너무 날이 춥고 행사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 교회의 중고등학생들이 특송을 부르기 위해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정치를 하려고 명함을 뿌리고 다니던 어떤 장로님이 와서 여러 사항을 점검하고 중요 인사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특송을 하기 위해 기다리던 모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자, 그 날 설교를 맡은 분께서 뒤늦게 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자기 교회 아이들에게는 관심도 없고 온갖 힘있고 명함있는 목사님 및 정치인, 사회지도층과 인사를 하더군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이후의 행사에 참여하지도 않고 집에 와버렸습니다.

 

그 날따라 점등식을 위해 드높이 솟아있던 크리스마스 트리가 바벨탑처럼 보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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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근차근 마태복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 하나씩 보더라도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마태복음 전체를 크게크게 스케치하면서 도대체 어떤 말을 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2장까지는 족보 이야기를 길게 한 이후에, 아기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 특별히 죽음으로부터 끝내 살아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1장과 2장을 살펴봐도 흥미로운 장면들이 곧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꿈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일들의 미래를 알게 되고,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기예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 또한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암시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가 비범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탄생과 하나님이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확연하게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공개하는 것을 잠시 보류해둡니다.

 

1장에서 2장까지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3장에서 문득 세례 요한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외치는 인물입니다.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남유다의 멸망과 함께 이스라엘은 (주권과 땅과 성전을 잃고 난 이후) 스스로를 <죄>가운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시기다툼질투도 아니며 음란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자각입니다. 개인이 아니라 민족 자체를 버리셨다는 자각입니다. 그때에 세례요한이 외친 것은 바로 <천국>, 즉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가 눈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새로운 백성을 모집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나라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의 생활방식을 좇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우리가 잘 와닿게 해설하자면 일제강점기 1945년 어느 날이라고 생각해보십시다. 느끼는 사람들은 일본의 힘이 패망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합니다. 이제 곧 새로운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옛 삶, 즉 일본의 통치에 따르던 삶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나라의 백성될 것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의 기억들, 혹은 내가 들었던 일제가 통치하기 이전의 세상의 이야기들, 그리고는 사람들은 나름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일본이 망하든 망하지 않든 지금 일제에 굴복하는 삶으로 만족할 수는 없겠다” 그와 비슷했습니다. 이제는 망했던 그 나라,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그 나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그 나라가 도래할 희망을 다시 가져도 좋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 나라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여기서만큼 다시 시작해봐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동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새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꿈꾸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본인에 직감에 근거한) 눈 앞에 온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더 나아가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갈 백성들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말 그대로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사람들 대다수는 세례 요한의 외침을 곱씹으며 눈 앞에 온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소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 세례 요한에게 (3:14) 바로 예수님이 찾아갑니다. “나도 세례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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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서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당시 1세기 유대사회는 다양한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존재했습니다. 지도자들 대다수는 독보적으로 도덕적이며 신앙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각자 취향과 성향에 맞는 메시아 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을 멀리서나마 응원하거나 혹은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습니다. 아마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가 상호 의지하거나 큰 틀에서 함께 할만한 운동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실제 제자들도 주고 받았던 흔적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날 일을 주목하여 보십시다.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더 나아가 예수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17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참고로 예수님을 향한 이 말씀은 마가복음 및 누가복음에도 기록된 말씀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독보적으로 한 단어를 덧붙입니다. “이는” 마가 및 누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예수께서만 들었던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마태의 경우는 마치 둘러선 모든 이들이 들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마태가 들려주던 모든 이야기들을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아기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 존재입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았습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요셉의 꿈으로 말미암아 나사렛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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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시 여기서 창세기 1-3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매우 흥미로운 문장이 등장합니다. (1:26)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혹자는 영혼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혼이 바로 형상과 모양의 증거라는 겁니다. 혹자는 개인과 개인이 맺는 관계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상호 존재하며 대화와 소통을 주고 받는 존재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증거라 말했습니다. 물론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철저히 창세기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곧 <하나님 노릇>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해야 하는 역할을 인간에게 위임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하는 역할이 곧 하나님이 하셔야 할 역할입니다. 세계의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역할입니다. 

 

참고로 근동지방에서는 신들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이 곧 신 그 자체라 생각했습니다. 영적세계에 존재하는 신이, 이 세상에서는 우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상에게 절을 하고, 우상에게 신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본따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란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땅에서의 <하나님>이나 다름 없는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는 인간에게 뱀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3:5)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이 말에는 큰 속임수가 있습니다. 지금 인간이 하나님 같지 않다는 속임수입니다. 이미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흔들어버립니다.

 

이제 다시 마태복음 4장으로 돌아옵니다. 4장 1절은 예수님의 정체성인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표명된 3장 17절과 함께 엮어서 생각하라는 의미로 “그때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기뻐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세 가지의 유혹을 합니다. (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6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혹 모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입각한 공격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창세기 3장 뱀의 공격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미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유혹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떡을 만들어 배불리 먹고,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하나님 앞에서 입증해보라”고 말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반응은 하와의 반응과 다릅니다. 하와는 자신의 올바른 정체성에 굳게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똑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오히려 해서는 안될 행동입니다. 더 나아가 “뛰어내려서 사자들이 자신을 지켜주는지 확인하는 일”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면 오히려 해서는 안될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위에 굳게 서있으셨습니다.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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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시험에 직면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옳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하고, 교회에서 듣는 설교 자체가 무용지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교회를 다니면서 드는 수많은 시험들 또한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정말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시험>이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특정 어떤 사건을 통해서 그 정체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시험도 있습니다. 애초에 정체성 자체가 없던 겁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던가 혹은 그리스도인이던가 하는 정체성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건에 의해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기를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시험이 아닐 겁니다. 원래 지니고 있던 정체성을 찾아 떠난 것에 가까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각인된 사람의 입장에서 겪는 시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정체성이 흔들리나요? 왜 우리는 시험을 겪는 것인가요? 간단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이 우리를 잠식해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면 이 또한 손에 잡히는 유혹입니다. 금식을 한 상태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겁니다. 보이는데로, 만져지는데로 살라는 유혹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스스로 뛰어내림으로 천사가 자기를 보호하는지 안하는지 보이는 것, 만지는 것대로 살라는 유혹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에 기반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요즘은 코로나 시대라) 떡이나 밥도 안줍니다. 기도가 모두 응답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오는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거나 아니면 월요일날 빡센 업무를 위해 푹 쉬는 것이 더 좋은 일일겁니다. 

 

제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이 바닥에서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가끔 기분 나쁜 사실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모여서 돈 얘기 할 때입니다. 주식이나 코인 얘기 할 때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고민을 토로하는 후배전도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차라리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크게 벌어라. 왜 굳이 합법적으로 단돈 몇 만원 벌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냐?” 목회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 교회가서 사례 많이 받고 스펙 쌓는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 꽤 있습니다. 일부러 꽃길만 걸으며 스펙을 다지는 사람들 꽤 있습니다. 특히나 자신의 아버지가 목사님인 경우에는 설계 이후에 코스로 사역지를 밟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에 의해 사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저는 역으로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묻습니다. “아니 그럴거면 쌈박하게 나쁜 짓을 왕창 저질러서 돈을 많이 벌든지, 왜 하필 돈도 안되는 목사 하면서 그런거나 추구하면서 살아요?”

 

신앙인으로 사는 일, 손해보는 일입니다. 일단 주일 반나절을 날리는 일입니다. 내가 버는 돈의 일부도 교회에 나눠줘야 하는 일입니다. 별로 취향에 맞지 않는 목회자들의 기나긴 말들을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어야만 하는 지겨운 일입니다.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이런 스스로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앞에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청년부에서 일어난 다툼, 더 나아가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에서 봤던 속칭 큰 목사님들의 행태에 큰 현타가 왔던 그 날, 저는 왜 목회자로 살아야 하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온갖 생각이 혼재된채 집에 도착했습니다. 무척 피곤했던 날인 동시에, 워낙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분노가 가시질 않았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깊은 현타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제 눈 앞에 문득 들어온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오언 스트래헌과 캐빈 밴후저란 사람이 쓴 <목회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형광팬을 들었습니다. 샤프를 들었습니다. (저의 책 읽는 습관입니다.) 그리고 서론과 1장 혹은 2장까지 쭉 읽었습니다. 순간 잠자고 있던 영혼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 앞을 사로잡고 있던 청년부의 싸움,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펼쳐진 바벨탑에서 벌어지는 고위층들의 잔치는 더 이상 제 뇌리에서 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내가 무엇으로부터 부름받은 존재인지 자각하는 순간 다시 영혼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제서야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평안히 행복하게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다시 청년부에 돌아가 싸움을 수습해야겠다, 바벨탑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올리고 있는 목사들의 세계에서 의미있는 목회자가 되어 봐야겠다 하며 선한 마음을 다시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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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안녕하십니까? 

 

매주 반복되는 교회의 예배 속에서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고 계십니까? 물론 목회자의 역량 부족으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개인기도생활을 하건, 큐티시간을 갖던, 아니면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갖던, 혹은 찬양유튜브를 감상하건,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들이 있으신 편입니까?

 

결국 신앙생활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뛰어내리라”는 세상의 요구 속에 맞서느냐의 싸움입니다. 이 모든 싸움은 바깥의 싸움처럼 보입니다. 술을 마셔도 되냐, 담배를 펴도 되냐,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냐, 꼭 십일조를 해야 하냐 등등 수많은 질문들은 사실상 지엽적인 질문입니다. 가장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맞는가, 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맞는가”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이는 바깥의 싸움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내면 깊은 곳의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공개한 직후에, 의도적으로 사단의 세 가지 시험 기사를 덧붙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모든 시험은 결국 정체성에 근거한 싸움이라고 선언해버립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체성을 굳건히 붙잡느냐의 싸움이 전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에서 “정체성”을 굳건히 붙잡고 버티셨습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정체성을 붙잡는데 실패했던 아담과 하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정신차리십시오. 진지하게 영혼의 고민을 시작하십시오. 정체성이 없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것,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만약 정체성이 있다면 한 번 스스로 점검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정체성이 가장 흔들리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정체성에 가장 흐릿해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순간을 우리는 타락이라 부릅니다. 반면 예수님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던 순간을 우리는 구원이라 부릅니다. 우리 평생의 싸움은 아담과 하와의 길을 걷느냐, 예수님의 길을 걷느냐의 싸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더욱 내면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면 깊은 곳을 스스로 관찰하십시오. 여러분은 정녕 하나님의 백성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