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 (마태복음 4:23-5:12)

2021. 8. 29. 02:54

저는 한국해양대학교를 나왔습니다. 당연히 저희 집에서 학교를 바라보면 바다가 쫙 펼쳐져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방파제를 건너야 하는데 저는 항상 방파제 위에 올라가 바람을 맞으면서 바닷가를 보면서 학교를 가곤 했습니다. 바다의 넘실되는 물결, 그리고 한켠에 정박된 배들, 그리고 가끔씩 보이는 배에서 깔짝거리는 어부 아저씨들의 모습, 또 해녀 아줌마들의 모습. 언젠가부터 그런 어촌의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 갈릴리 어촌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어느날은 배가 있는 곳 가까이 가서 물끄러미 광경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상상을 했던 것 같아요. 어부인 베드로를 불렀을 때,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서 설교를 했을 때, 여러 상상을 하다보니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과 예수님 당시의 모습이 어마어마한 문하적 차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우리는 반듯한 건물이 있고 나름의 규모가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침에 가서 설교를 듣고,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밥을 먹고, 청년부 예배를 드리는 것 정도를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하지만 바다를 보면서, 어촌의 광경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척 화석화 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응당 예수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유독 제 뇌리에 꽂히는 것은 창녀와 세리였습니다. 문둥병자와 귀신들린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당대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파한 예수님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을 본문을 보십시오. (4:23-25)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생활의 말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지 않습니다. 반듯한 건물, 갖춰진 시스템에, 앉아서 설교만 듣기만 하던 신앙생활이지 않습니다. 갈릴리라는 소외된 지역, (부산지역으로 말하자면 영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을 두루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몰려드는 이들은 온갖 병에 걸려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들은 말 그대로 <잡놈들>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 오늘날의 평범한 교회광경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입니다. 

 

전혀 생경한 광경을 떠올려보십시다. 완전히 낙후되고 발전되지 않은 지역들을 돌고 돌면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시며 고치시는 예수님, 그리고 소외된 지역 속에서도 소외된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온 장면. 우리는 마태복음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따라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소외된 사람들이 몰려든 예수님의 이야기가 4장 후반부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 번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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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문맥을 한 번 살펴봅시다.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기본적으로는 율법에 대한 비판으로 알고 있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이죠. 그리고 4장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자신의 정체성인 <하나님의 아들, 기뻐하는 자>를 통해 <사탄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의 이야기를 소개한 이후에, 천국을 설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차근차근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은 단어의 문제입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를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 읽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과는 다른 개념으로 이 단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고 죽어서 천국가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말씀에 근거한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승리한 이후에 (4:17)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는 세례 요한의 말씀과 일치됩니다. 더 나아가 (4:23) 천국복음에 대해서 설파하십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 보기에는 다른 개념처럼 보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단어인 <천국>은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하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4장 23절에 등장하는 <천국복음>은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통치의 기쁜 소식>입니다. 차근차근 이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1세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른바 <하나님의 떠남>을 경험하는 와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다스리기를 대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왕권이 무너져서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시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하늘의 통치>는, 또한 예수께서 선포했던 <하늘의 통치>는 이제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선언입니다. 덧붙여 4장 23절에 등장하는 <통치의 기쁜 소식> 또한 그 맥락 하에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우리 왕좌에 복귀하셨다. 드디어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다스리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잠시 자신의 백성들을 이 땅에 버려두셨을때 이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사망권세>라고 생각했습니다. 마귀, 사탄, 악마를 떠올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대신 그런 악한 권세들에 의해 세상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귀신들림, 혈루증, 문둥병으로 번역된 악성피부병 등등의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 바로 <사망권세>가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응당 하나님께서 오셔서 <사망권세>를 정복하시고, 그가 앉아있던 왕좌를 뺏게 되면, 자연스럽게 귀신들림, 혈루증, 악성피부병 같은 현상은 종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구도 내에서 4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의 대리인이나 다름 없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굳건하게 뿌리내린 정체성을 통하여 그들의 시험과 간계로부터 승리합니다. 첫 싸움에서 승리한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세상에서 몰아내실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설파했던 <하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라는 주장을 자신의 주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드디어 마귀가 패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통치하시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4장 23절에 나오는 <통치의 기쁜 소식>은 말 그대로 <가까이 올 것>이라 예상되었던 하늘의 통치가 실제 예수님을 통해 시행되고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드디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자신을 떠나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사망권세>의 악한 영향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사망권세> 외에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귀신들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 경험합니다. 치유를 받습니다. 해방을 얻습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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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시대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찾아볼 수 없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긴 이후부터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예수님의 가르침(산상수훈)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비판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사망권세, 사탄마귀의 권세가 패배한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를 위해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 지나치게 설명충이 되는 느낌입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마귀가 현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 대다수는 수동적이었습니다. 방어적이었습니다. 혹여나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의 통치>가 늦어질까 우려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기반 하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주류였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말자"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왔다”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말자”는 입장 자체가 폐기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차근차근하게 새로운 태도로 해석해나가십니다. 기본적인 태도는 5장 13절-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탄마귀의 권세가 한 풀 꺾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을 잠식해나간다는 겁니다. (제가 주로 하는 스타크래프트로 비유를 하자면) 상대방의 본진과 더불어 중요한 건물과 핵심병력들이 모두 박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남아있는 사탄권세의 잔여물들을 힘껏 무찌르라는 겁니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하나님의 통치에 기반한 빛이 되어 산위에 있는 동네라고 할지라도 빛을 비추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기반한 소금이 되어, 세상 곳곳에 녹아들어 세상의 맛이 되라는 겁니다. 애초에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에서,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으로 태세전환을 명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지는 율법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면 매우 직선적입니다. 힘있습니다.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때려치우라는 겁니다. 만약 흠을 잡고자 한다면 형제에게 욕을 한 것이나 살인을 한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간음을 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라는 겁니다. 만약 트집을 잡고자 한다면 상대를 성적욕망에 근거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간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모든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에서 <잘못을 하지 않으려던> 태도를 꾸짖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을 총괄하면 (22:37-40)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예수님은 나름의 해석을 덧붙입니다. (5:43-44) 이웃을 넘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전반적으로 정리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망권세가 세상을 통치했습니다. 온갖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이런 과정 가운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상에 물들지 않기를 위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야만 곧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선포에 근거하자면, 이지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이념인 사랑이 온 세계를 잠식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맛본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사랑>을 근거로 세상을 정복해나가는 군사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입장에서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세상을, 사랑과 용서가 충만한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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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잔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것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남들보다 적은 노력으로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들보다 적은 노력을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틈만 나면 보는 것이 수능성적에 따른 배치표였습니다. 또한 수시모집과 관련된 전국 대학들의 전형을 묶어놓은 책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습니다. 고3때 여름에 나간 교육청 컴퓨터 관련 대회에서 2등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연히 제가 들어가게 된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교육청장의 3등상까지 수시모집에 응시할 수 있는 컴퓨터특기자 전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응당 전 수시원서를 집어넣고 기다렸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기억에 남는 일주일이 있습니다. 수능성적이 발표된 이후 수시모집 최종합격이 발표되기까지의 일주일입니다. 먼저 저는 수시모집 1차 발표에서 <후보 1번>으로 합격했습니다. 말이 <후보 1번>으로 합격한 것이지 사실상은 떨어진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습니다. 컴퓨터 특기자 중에 한 명이 떨어질 가능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해양대학교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어서 등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5등급이라는 최저등급기준에 미달되거나. 어쨌건 그러던 와중에 수능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망연자실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성적보다 확 떨어졌습니다. 수리는 3등급을 나올 줄 알았는데 4등급이었습니다. 과탐은 4등급 아니면 5등급은 나올 줄 알았는데 5, 6등급 혹은 6, 7등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의고사보다 훨 더 망쳤습니다. 수시에 떨어진다면 제가 목표로 하던 대학인 금오공대 컴공과는 결코 갈 수 없던 점수였습니다.

 

하지만 딱 일주일이 지난 이후 수시모집 합격이 발표가 났습니다. 제 앞에 한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저와 함께 합격한 2명의 신입생이 누군지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태도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수능성적이 발표된 이후 수시결과가 발표나기 전까지의 저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수시결과가 합격으로 발표된 이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 친구를 대하는 태도, 학교에서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 교회에 가는 태도 전부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던 기도권사님의 손길이 여전히 기억이 납니다. 이름도 모르는 권사님을 위해 그때 당시에는 선물이라도 사야 되지 않겠냐고 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고작 대학합격 발표가 저의 삶의 태도를 바꿔놓았다면, <사망권세를 패배시킨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발표는 얼마나 삶의 태도를 급격하게 바꿔놓을까요? 적어도 1세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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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지나친 설명을 곁들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매우 명확합니다. 간단합니다.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팔복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를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 말 그대로 울고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 본문을 보면 땅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굳이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땅을 빼앗길 만큼 강단이 없는 유순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입니다.

 

8복에서 언급하는 처음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피해자>입니다. 사망권세의 피해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지 않아서 고통받았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후에 나오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청결한, 화평하게 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은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지 않은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던 의로운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던 의로운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선언합니다.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고통은 이제 멈춰질 것입니다. 사망권세를 깨트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들의 삶에 도래하여 귀신을 쫓아낼 것입니다. 질병을 치유할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던 의로운 사람들은 그들이 고대하고 기다려온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 가운데 영향을 발하는 장면들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매우 어려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참혹한 현실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프고 눈물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아픔 속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웃음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망권세가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망권세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던 이들이 치유와 해방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다시 한 번 팔복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힘들던 사람들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됩니다. 이제 드디어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어려운 가운데 선하게 살려고 애썼던 사람들은 기나긴 인내 끝에 복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고대하던 하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곁에 예수님을 통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사망권세의 세력이 패배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을 뒤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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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 다룬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크게 보면 두 가지의 메시지를 엮어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망권세의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던 사람들, 사망권세의 억압 속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 드디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드디어 그들 곁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의 메시지입니다.) 덧붙여 예수님은 그들을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로 충만한사망권세의 세상을 사랑과 용서로 충만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으로 바꾸는 과정 가운데 초청하셨습니다. 살인하지 않을 것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삶이 아니라, 이제는 미워하는 원수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간음하지 말 것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삶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가정(특별히 아내)에게 충실할 뿐더러 이웃에게도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이런 두 가지 메시지의 전환은 단 하나의 기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수련회때 제가 설명해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다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를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스타크래프트의 비유를 따르자면) 우리는 중요한 본진과 건물과 병력 대다수를 잃은 적의 잔당들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망권세의 잔당들은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1세기 유대사회에서는 귀신들림과 질병으로 힘을 발휘했던 그들은, 오늘날에는 남녀갈등을 통해 힘을 발휘합니다. 세대갈등을 통해 힘을 발휘합니다. 이념 사이의 갈등을 통해 힘을 발휘합니다. 인터넷 여론을 통해 악마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코인열풍 혹은 주식열풍 혹은 부동산열풍 가운데 투기를 조장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1세기 유대사회나,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사회나,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흐름에 근거하여 서로를 혐오하기도 하고, 인터넷 댓글을 통해 누군가의 인격을 짓밟기도 하며, 돈을 더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룰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팔복 가르침은 따라서 오늘날도 유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망가트리고 있는 사망권세의 잔당들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예수님의 선포를 귀기울여들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 조용히 나아가십시오.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할 때에 귀신에 들린 것처럼 우리의 삶을 망가트렸던 우리 내면 세계의 잘못된 세계관이 교정되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침을 받고, 남을 향한 이유없는 증오와 혐오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덧붙여 그런 피해를 입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든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분투하며 사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다”며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살 것을 권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기울여들으십시오.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른바 주기도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실하게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삶의 파괴되고 엉망진창이 된 모습들을 충분히 고칠 지혜와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선언에 우리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세상이 민주주의의 역동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본주의의 룰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통치의 기쁜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