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저는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교회 다닌지 얼마 되지 않은 수련회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인격적 경험이 있었습니다. 20살이 되면서 깊은 성령의 경험도 했습니다. 대학생 신입생 시절 많은 방황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선교단체에 잘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1학년 2학기부터는 선교단체의 동기들, 선배들과 함께 한 집에서 살면서 신앙을 잘 훈련받게 됩니다. 네, 말 그대로 운이 좋았습니다. 신앙적으로 많은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21살이 되면서 교회 청년부에서 임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교사도 맡게 되었습니다. 점점 책임이 생겨났습니다. 해야 할 직무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도 잘 몰랐습니다. 기독교도 잘 몰랐습니다. 단순히 열심히 할 뿐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잘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순간과, 목회자로 소명을 경험하는 순간이 비슷하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신앙여정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인 고민을 다룰 수 있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군생활 당시의 월급은 8만원 정도였습니다. 돈은 거의 쓰지 않고 모아놓고서는, 휴가를 나갔다 오면 항상 기독교책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군시절 쌓아놓고 읽은 책만 50여권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갈급했습니다. 갈급했기에 고민했고, 기도했고, 또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안에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먼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다 알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또한 모태신앙이라고 성경지식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또한 모태신앙이라고 교회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의 질문과 고민들이 정리되면서, 또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덮어놓고 교회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대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제 안에는 교만함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서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제가 깨어있는 전도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식견이 넓고 깊은 전도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다수의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설교보다는 격이 있는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낱 잘난 척 하는 설교자에 불과했습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저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민하고, 저의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식견을 자랑하는데 설교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청소년 수련회에 흔한 강사들의 정크푸드를 먹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저의 설교 또한 자기의와 뽕이 충만한 설교에 불과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초기 전도사 시절은 크나큰 결례였습니다.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누구보다 잘났다고 생각했고, 누구보다 식견이 넓고 깊다고 생각했지만, 단지 자의식이 충만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남을 목양하는 전도사가 아니라, 나를 자랑하는 전도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흑역사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좋은 전도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때만큼의 실수를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때에 비해 많은 분량 성장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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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본문은 <세리 마태가 제자가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와 매우 연루된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형제가 죄를 범한 경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기나긴 이야기를 살펴보려면 하나의 이야기를 더 다뤄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상반되는 두 말씀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6:18)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이를 <믿음의 고백>이라 말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바를 정직하게 추적하면 이는 베드로라는 한 존재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뒤이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6:23) 베드로를 사탄이라 말씀하십니다. 사탄에게 뒤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견책하십니다. 

 

한 번 짚어봅시다.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반석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메시아 사건을 방해하는 사탄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에 대한 질문을 갖고서 오늘 본문을 다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형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한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단계를 제안합니다. 먼저는 (15절) 일대일로 만나서 권고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듣지 않을 때가 있겠죠. 그러면 (16절) 두 세 사람이 함께 가서 권고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듣지 않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17절) 교회에 말하는 일입니다. 교회에 말하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그에게 권고하는 일입니다. 죄에서 돌이킬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17절)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우리는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죄범한 형제를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 치리하라는 본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경을 거스르는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19-20)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무엇을 위해 기도하란 말씀일까요? (18)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단서를 던져놓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춰보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긴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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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상은 <평등>을 핵심 가치로 두고 있는 사회입니다. 신분제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누구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수능점수를 높게 얻을 수 있다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또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다면 사회의 중산층 이상 계층에 올라갈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류문명의 반만년 역사를 되짚어보면 정말 획기적이고 독보적인 평등사회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국가를 다스리는 왕의 지위를 모든 국민의 투표로 뽑는다는 것 또한 매우 혁명적인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라는 철학자는 이런 사회의 흐름이 역으로 현대인에게 <우울>을 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온 사회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평등>을 말하고 있지만, 결과적 평등에는 이르지 못하는 현실이기에 그 괴리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점이죠. 예컨대 우리는 축구를 잘해서 손흥민 정도의 축수선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공부를 잘해서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 또한 재능과 가정형편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가 살아가는 현실과, 돈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가 살아가는 현실을 비교하면 자연히 <평등>이라는 사회의 이념과는 별개로 <불평등한 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피부로 겪는 현실은 <불평등>인데, 정작 사회에서 외치고 있는 것은 <평등>이라는 괴리감, 이는 현대인들에게 우울감을 야기합니다. 특별히 SNS시대에 인스타그램으로 셀럽들의 세상을 엿보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념적으로 힘껏 평등을 외치지만, 결과적 불평등의 늪이 우리를 우울감에 잠식하게 만듭니다. 제가 다수의 청년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감정은 바로 이 <우울감>입니다.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미디어에 노출되는 셀럽들에 비한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우울감>입니다. 더 나아가 이 <우울감>에 기생하여 똬리를 틀고 있는 자기혐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용서는 차치하고서라도, 나 자신이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시대, 오히려 나 스스로를 쥐어짜고 학대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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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이야기의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어서 등장하는 본문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등장할 때에 의미심장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때에> 죄를 범한 형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다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말합니다. (21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22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지난 설교가 기억나시나요?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하늘에 있는 하늘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땅 가운데 개입한 하나님의 통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23절)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탕감받은 그 사람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잡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백 데나리온 정도면 500만원에서 1000만원 정도 하는 비용입니다. 한 달란트는 로마시대 한 방패공장의 1년 매출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치면 1만개의 방패공장을 돌려야 벌 수 있는 매출, 말그대로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한낱 500-1000만원 빚을 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채근합니다. 그때에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은 탕감받은 종을 불러와서 말합니다. (34절)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는 하나님 통치 방식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흘려보내지 않으면 은혜는 무효가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용서받은 은혜는 무효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형제가 죄를 범한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방향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형제가 죄를 범한 이야기”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어떻게 정죄하느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권고를 세 번이나 받아들이지 아니하더라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18절을 보십시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립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주기도문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임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즉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하늘의 용서가 이 형제에게 임합니다. 반면 우리가 용서할 수 없다면 하늘의 진노가 이 형제와 이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우리에게 임합니다. 따라서 (19-20절)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모여서 죄 범한 이후에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은, 결국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결론적으로 (18절)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제자 마태>가 된 <세리 마태>를 염두에 둘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자체가 결국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도 이르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그 의미를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 세리>는 현재는 쉽게 어울릴 수 없고 불편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큰 구원의 계획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한 공동체를 일궈야 할 한 형제자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죄를 짓고도 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제의 잘못을 견책하고 교정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도 권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형제로 존중해줘서 세리가 제자가 되고,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인내하고 끝까지 용서할 것을 권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를 상기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두고 예수님은 <교회의 반석>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또한 예수님을 통해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이라 꾸짖으셨습니다. 이를 기나긴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한정해서 보자면, <사탄>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린 배신자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로 볼 때 그는 <교회의 반석>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는 베드로라는 한 사람의 사역에 의해 부흥하고 세워졌습니다.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용서>가 있습니다. 

 

세리 마태가 제자 마태로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이방인 백성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져가는 가운데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반석>이 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용서>입니다. 이는 <실수>와 <용서>가 갖고 있는 역설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기 위해 <실수>를 저질러야 했습니다. 실패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깊은 용서를 경험해야만 비로소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용서>의 관점에서 다시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은밀한 원칙입니다.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할 것.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 것. 끈질기게 용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 달란트(1만개의 방패공장 1년치의 수익) 빚을 탕감받은 이들이 백 데나리온(500-1000만원) 빚진 자들 또한 탕감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필요한 것은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용서입니다. 필요한 것은 양적으로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반복되는 용서입니다. 용서와 용서가 겹겹히 쌓일 때에 비로소 한 사람을 용서의 거장으로 빚어져 갑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되었던 비밀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해봤기에, 그가 예수님께 용서를 경험해봤기에, 그는 형제들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백 데나리온 탕감할 수 있는 용서의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진 용서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베드로의 실수, 베드로의 배신에서 기인합니다. 그 또한 용서를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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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은 무수한 실수와 잘못이 쌓이는 과정입니다. 또한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은 실수와 잘못 가운데 자기 자신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경험이 축적되는 경험입니다. 적어도 제가 자기의 멋에 취해있던 애송이 전도사였던 시절로부터 오늘까지 저를 이끈 성장의 동인은 바로 <용서>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동료교역자들의 저의 실수와 잘못을 알고도 넘어가주었습니다. 그때는 그럴 수 있다며 이해해주었습니다.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다며 용서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 동역한 교사와 평신도지도자들에게도 무례를 범한 일이 많습니다. 잘못을 범한 일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크게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며 웃고 넘어갔습니다. 저와 함께 성장한 제가 맡았던 청소년-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겐 분명 미숙한 점이 많았습니다. 어리석은 판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이해해주었습니다. 젊은 전도사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어가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여전히 <전도사>라는 삶에 묶어두시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스스로가 모자라서 숨고 싶은 나날이 많았지만, 그저 살게 해주셨습니다. 짧은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저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모든 과정들이 저의 품을 더욱 넓혀주었습니다. 예전에는 잘못된 것을 힘껏 지적하며 손가락질하던 제가 이젠 허허 웃으면서 이해해줄 수 있는 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 내의 모든 잘못과 실수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던 제가 어떻게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 또한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 빚을 되받으려했던 악한 종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빚을 향한 탕감을 경험하는 세월이 축적되면서, 저에겐 빚을 탕감할 수 있는 마음이 조금씩 준비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앞서서 <우울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기반한 <자기혐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학대하고 쥐어짜는 집단정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우울감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 몸부림칠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 충만하여 자기를 학대할 때, 창세 전부터 우리의 존재를 향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쥐어짤때에, 하나님은 먼저 자기 자신의 손을 내미시며 용서와 용납과 이해의 품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죄범한 형제에 대한 치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본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본문입니다. 자민족에게 손해를 끼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던 세리 마태를,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도의 삶을 사는 제자 마태로 승화시킨 용서의 능력이 물씬 풍겨나는 본문입니다. 세리 마태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죄를 사함 받은 존재입니다. 베드로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일흔 번씩 일곱 번 죄를 사함받고 난 이후에 비로소 교회의 반석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죄를 사함받은 베드로는, 결코 그 어떤 음부의 권세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용서의 능력이 베드로의 내면 깊은 곳을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깨달아 득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이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실제 공동체 내에서 실천하는 일 또한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결코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깊은 용서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시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사탄 권세에 메인 세상적인 욕망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빚어가는 유일한 왕도는 하나님의 용서 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용납하실 것입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반복되는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경험하십시오. 용서가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우리 안에 자기혐오가 끊어지길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자기학대가 끊어지길 원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잠식하는 비교로 말미암은 우울함의 감정이 끊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 찬양 : 주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