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5(마 13:24-30)

2021. 9. 26. 02:39

저는 지난 주 목사안수와 관련된 최종 면담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21살 5월 중순 경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을 한 이후 꽤 오랜 기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순간들마다 저는 힘겨운 시간을 겪었습니다.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매번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매우 무겁고 진중한 질문을 저의 내면 깊은 곳에 던지고는 답을 찾지 못해서 힘겨워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신학교 편입을 결정했던 순간, 신대원 입학을 결정하고는 면접을 보기 전날, 처음 목사고시를 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날 정도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유독 이번 면담과 관련해서는 크게 마음의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잠도 푹 잘잤습니다. 크게 떨지도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고 하고 싶은 말을 말하고 나왔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조금 편해졌습니다. 마음을 담담하게 먹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는 극단적인 대결구도로 교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나쁜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이들을 쫓아내고 솎아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교회를 순결하게 만들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안 믿는 목사님들이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목회소명은 이와 마주하는 극단적인 대결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 안믿는 목사들과의 대결, 예수 안믿는 사람들과의 대결, 그로 말미암은 교회의 순결함과 거룩함의 회복. 그래서 저는 저의 목회직에 대한 무게를 매우 무겁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나쁜 사람도 없고, 무조건 착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 안에 명과 암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명백한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명과 암을, 선과 악을 공존시킨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제가 신학을 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지금껏 살아왔던 교회의 삶은 이런 선과 악의 공존, 현실의 혼돈을 수용하는 과정과도 같았습니다.

 

덕분에 지난 최종 면담은 담담했습니다. 아무런 심각한 고뇌와 고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늪 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선과 악의 공존, 현실에 존재하는 혼돈, 그 안으로 한 걸음 깊숙히 걸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

 

우리는 마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합당한 삶의 자세를 가르친 이후, 예수님은 <비유>라는 전혀 생경한 장르를 통해 하나님 통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참고로 많은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너무 기깔나고 탁월하다는 이유 때문에, 1세기 당시의 예수님의 정체를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던 현자>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볼 마태복음 13장이 바로 비유 묶음집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마가복음 4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이를 살짝 견주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처음 등장하는 비유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똑같죠? 대다수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참조로 해서 마태복음이 기록되었고, 마태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의 흐름을 기본적으로 따라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비유 배열이 조금 달라집니다. 마가복음 4:21-25에 등장하는 <등불을 등경 위에> 비유가 쏙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4:26-29의 <자라나는 씨> 비유가 남는데요. 일단은 이 비유를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는 땅에 씨를 뿌려놓고 밤낮 자고 깨는데 그러던 가운데 씨가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땅은 스스로 씨를 받아들이고 결국 이삭을 내고 결실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는 <자라나는 씨> 비유와 닮은 듯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3장의 두 번째 비유는 또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유이며, 농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마가복음의 농부와 같이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잡니다. 또한 깹니다. 여기까진 똑같습니다. 하지만 땅이 씨를 받아들이고 결국 이삭을 내고 결실에 이르기 전에, 맞이하는 현실이 전혀 달라집니다. (25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따라서 싹이 나고 결실을 맺을 때에 마가복음처럼 복된 결말을 맞이하지 않고 마태복음은 (26절) 가라지도 보이게 됩니다. 집주인의 종들은 이에 놀라게 됩니다. (28절)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묻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말합니다. (29절)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가라지를 제거하는 시기를 끝까지 미루게 됩니다.

 

잠깐 상상을 해봅시다. 마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70년에 글을 썼습니다. 마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에 글을 썼습니다. 마가라는 사람은 땅에 씨를 뿌리고 기다리다보니 어느새 결실을 맺었다는 희망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마태라는 사람은 땅에 씨를 뿌리고 기다리다보니 결실을 맺었는데, 그와 함께 가라지도 함께 자라나서 끝내는 이를 최종적으로 분리해야겠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마가복음 이후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저는 18살에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2살 이후에는 모교회, 그러니 고등학교때 처음 다니게 된 교회를 다니지 못하고 떠돌게 되었습니다. 대학진학과 여러 이유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제겐 모교회에서 만난 친구들, 동생들, 형과 누나들의 이미지가 매우 순결하고 깨끗하게 보존이 되어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은 친구들에 비하면 훨씬 거룩하고, 정결하고, 깨끗하고, 도덕적이라는 이미지가 덧칠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의 친구들에 비해서는 모교회에 다니는 친구, 동생, 형과 누나들이 깨끗하고 정결하고 도덕적이라는 이미지가 딱 박혀있습니다. 당시 저를 담당하던 전도사님, 목사님도 매우 성결하고 거룩한 분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교회에서 만난 교역자들의 이미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적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책을 섭렵한 이후로는 교역자들의 지적, 신앙적 깊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참람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왕왕 모교회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교회에서 일어난 담임목사님을 쫓아내기 위한 갈등, 자리를 지키기 위한 쟁투, 그리고 부임한 교역자들의 사역행태 등등. 말 그대로 참람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 믿는다는 허울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왜 어린 시절 제가 다닌 교회에 대한 기억은 좋은데, 왜 어린 시절 제가 겪었던 교회의 형과 누나들과 친구들과 동생들에 대한 기억은 좋은데, 왜 어느 순간부터 저는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신자들과 타락한 교역자들만 만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렸기 때문입니다.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피상적으로 관계를 맺었고 보기에 좋은 부분만을 보며 교회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10살 정도 많았다면, 10살 정도 많은 상태에서 그 시절 교회를 경험했다면, 저의 기억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교역자들에게, 교회 다니는 어른들에게, 그리고 함께 다니는 청년들에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낙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명과 암을, 선과 악을 공존시키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내가 겪고 있는 교회의 현실만 유독 처참하고 참혹한 이유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의도적으로 세속적인 모습을 방치하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요?

 

-

 

마가복음이 기록된 상황과, 10년 후 마태복음이 기록된 상황의 차이를 짚어봅시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시점은 유다-로마전쟁이 막 끝나던 시점, 혹은 막 진행되던 시점의 시급하고 급박한 시기입니다. 절망과 고통이 가득했던 시기인 동시에, 오히려 나아가야 할 방향이 뚜렷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극소수의 순결한 신앙인만이 존재했던 시절입니다. 따라서 마가는 “밤낮 자고 깨던 중에 결실을 맺는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설파했습니다.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지만 결국 복음은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우리가 가는 길이 옳다는 메시지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유다-로마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수습이 완료된 시점입니다. 교회는 드디어 교회의 모습을 띄고 안정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교회 안에는 선인과 악인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가장 위험하고 박해받고 고통 가운데 몰리던 시기에는 순결하고 뚜렷한 신앙인만 존재했지만, 평안하고 살만한 시기에는 신앙인인듯 아닌듯 하는 사람들도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마태복음은 자고 깨던 중에 결실을 얻게 되겠지만, 어느새 가라지까지 함께 교회 안에 공존한다는 현실을 비유 속에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마태가 들려주는 메시지 중에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입니다.

 

이런 메시지는 13:49에서도 반복됩니다. 세상 끝날이 되어야만 악인과 선인이 구분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선인과 악인은 교회 내에 공존할 것입니다.

 

대다수의 성급한 사람들은 교회 안의 비신앙인들, 가라지를 솎아내고 싶어 합니다. 이는 제가 목회를 감당하던 초기 시절의 생각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신중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까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 내의 선인과 악인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면, 즉 진짜 예수 믿는 사람과 진짜 예수 안믿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면,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

 

우리는 다시 지지난 주에 봤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8장)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세 번이나 권면할 것을 권하는 말씀 말입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세 번의 권면을 거절할 때에도 그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죄를 범하는 형제>를 어떻게 설득하고 죄에서 돌이키게 할지 <죄를 범한 형제>에게 방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본문은 <죄를 범하는 형제>를 다루고 있는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방점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상상해봅시다. 이 본문의 첫 장면은 <죄를 범하는 형제>를 <피고>로 기소하고 <원고>의 자리에서 심판의 결과를 기다리는 장면과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본문은 다시 우리를 <원고>의 자리에서 <피고>의 자리로 옮겨 데리고 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알곡과 가라지를 판단하고 가라지를 솎아내려는> 우리조차도 사실은 <가라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교회 내에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인일까요? 악인일까요? 교회 내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곡일까요? 가라지일까요?

 

알곡이라 생각한다면 본인을 과대평가한 결과일 것입니다. 

가라지라 생각한다면 본인을 과소평가한 결과일 것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 둘 모두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교회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반 알곡 반 가라지와 같습니다. 

 

따라서 (29절)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주인의 염려는, 사실 우리 모두를 향한 염려이기도 합니다. 혹여나 알곡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에서 그려내는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가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가라지스러움>과 <알곡스러움>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딱 규정되긴 쉽지 않겠지만 어렴풋이 규정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곡스러움>은 우리 스스로가 반 알곡 반 가라지와 같음을 깊이 깨닫는 마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주인의 염려가 바로 알곡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알곡스러움>을 가진 이들은 쉽게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쉽게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쉽게 남을 향해 손가락을 들이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반 알곡 반 가라지이며, 언제든 알곡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에, 아니 나조차도 가라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에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반면 <가라지스러움>은 우리 스스로가 알곡이라는 과한 확신을 갖고 가라지로 판단한 상대를 과감하게 단죄하려는 마음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주인의 마음의 본의는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마지막 때가 와서야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고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무시하고, 재빨리 자신의 손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가라지를 꺾어 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죄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꺽여지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며, 제하여지는 것은 자신의 알곡스러움입니다. 이들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지 않고 정죄와 비난을 일삼기에, 결국 스스로도 정죄와 비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교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명과 암이 공존한 현실을 <신앙의 신비>를 통해 다시 볼 것을 권합니다. 이는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방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라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우리들을 알곡으로 만들어가시기 위한 자비를 베푸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태생적인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라지>같은 모습을 자각할수록 <알곡스러움>을 통해 영글어갑니다. 반면 자신의 <알곡>같은 모습에 도취될수록 <가라지스러움>을 통해 심판을 향해 나아갑니다.

 

-

 

유진 피터슨의 책,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갈 때면, 나는 늘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그 곳의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하여 더불어 일하고 예배했다. 이내 실망을 느끼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였다. 소곤대는 자, 불평하는 자, 신의 없는 자, 변덕스러운 자, 의심 많은 자, 죄에 찌든 자, 따분한 도덕주의자, 홀리는 세속주의자 등.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들어온 한 줄기 빛나는 아름다움이 그들 위에 비칠 때면, 나는 그 동안 죄로 어두워진 내 눈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드시고 성령님이 창조하신 삶들 곧 희생적인 겸손, 믿을 수 없는 용기, 영웅적 미덕, 거룩한 찬양, 고난 중의 기쁨, 끊임없는 기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삶들을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본다.

 

교회는 매우 매우 신비한 장소입니다. 

 

죄인들이 모인 장소이며, 세상에 비해 결코 낫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예수를 믿는다며 자화자찬하는, 위선으로 덧칠된 역겨운 모임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묘막측한 섭리를 통하여 모여있는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가십니다. 그들의 인생을 설득해가시고,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이름를 드높이게 만들어가십니다. 결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삶을 실천하도록 만드시는 신비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마가복음의 비유를 빌리자면 <밤낮 자고 깨던 와중에> 전혀 알게 모르게 진행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왠만하면 교회생활을 계속 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운이 좋으면 앞으로 30년 넘게 이 목사라는 직무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후에도 30-40년 가까이 목사라는 직무를 내려놓고서 교회에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도 앞으로 70년 가까이 교회에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마주할 일들은 지금까지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온갖 거짓과 암투와 시기와 질투와 편가르기가 만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망하지마십시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공존하는 방식을 의도하셨습니다.

 

반 알곡, 반 가라지와 같은 우리들을 알곡으로 질적 전환시키는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온갖 거짓과 암투와 시기와 질투와 편가르기가 만연한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빚어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현실에 크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가라지 같은 설교자가 서있다 한들, 가라지 같은 어른들이 보인다 한들, 청년부 공동체 내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 보인다 한들 크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세상과는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이 교회 내에서 암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눈을 뜨십시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염려하시는, 우리에게 신비한 사랑과 용서의 일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