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3 (마 6:12, 9:9-13)

2021. 9. 6. 03:09

기독교 복음을 두고 오랫동안 반복되는 논쟁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과 <행함>의 논쟁입니다. 우리는 <행함>을 통해서 천국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찬양을 통해 배웠죠. 돈으로도 못가고, 벼슬로도 못갑니다. 오직 <믿음>으로 갑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교회에서 배워왔습니다. 아무리 기를 쓰고 <행함>을 노력해봤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말 그대로 <행함>이 없는 신앙인들을 많이 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들이 성적으로, 재정적으로, 범죄하는 일들을 듣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럼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일 또한 듣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스스로 묻게 됩니다. 과연 저런 행함 없는 신앙인들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행함 없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천국에 이를 수는 있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이런 우리의 고민을 안고서 이전에 살펴봤던 산상수훈을 보고 있자면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이 듭니다. 

 

먼저는 “어? 아닌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시는데? 다른 여인을 간음의 마음을 품고 지켜보지 마라고 하시는데? 형제에게 욕설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윤리적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다시 새삼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행함>없는 신앙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듭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 이걸 다 지킬 수 있다고? 원수를 사랑하는게 가능해? 간음의 마음을 품지 않고 사는게 가능해? 형제에게 욕설하지 않는게 가능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는 아무리 아등바등 닿으려고 노력해봤자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의 가르침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어야겠다는 절박함이 생긴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산상수훈을 읽을 때에 “그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정도는 실천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산상수훈을 읽을 때에 “그래 그리스도인이라면 도저히 내가 실천할 수 없는 요구 앞에서 예수님을 굳게 붙드는게 진짜 그리스도인이지"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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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매우 유명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유명하게 인용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조차도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놀랍다고 얘기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산상수훈은 마치 마태복음과는 별개의 예수님의 동떨어진 가르침인양 생각되어왔습니다. 마치 산상수훈이란 책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기본적으로 마태복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은 꽤나 단단한 구조 안에다 산상수훈을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그 말은 산상수훈 자체도 중요하지만, 산상수훈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문맥과 구조도 중요하다는 말이겠습니다.

 

산상수훈은 (5:1) <산에 올라가>라는 구절과 함께 시작됩니다. 산에서 반포된 말씀입니다. 응당 산상수훈의 말씀은 (7:28) <말씀을 마치시매>와 함께 (8:1) <산에서 내려오시니>라는 구절과 함께 끝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범위를 정해보면 5장부터 7장까지가 큰 맥락에서 <산상수훈>인겁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는 7장 28-29절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두고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는 같지 아니함>이라고 논평합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한데요. 좀 있다가 짚어보겠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가 <가르침>으로 요약된다면 8장부터는 <기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나병환자를 고칩니다.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을 고칩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칩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칩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기적, 이른바 축귀와 치유로 볼 수 있는 사건을 보면서 단순히 “와 예수님 되게 능력이 있으시구나”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지난 주에 설교한 바와 같이 <사탄마귀의 권세>와 결부되어 보아야 합니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나병환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병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악성피부병환자입니다. 당시 근동세계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부병은 곧 죽음의 흔적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면 8장 1절-4절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다시 상상해보십시다.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고 산에 내려오자마자 악성피부병환자는 죽음의 흔적이 자신에게 드리웠다는 이유로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예수님이 그의 병을 치유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드리워진 죽음, 이른바 사탄마귀의 권세를 쫓아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 베드로 장모의 열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사탄마귀의 권세가 세상에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사탄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런 반복되는 과정 가운데 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바로 8:23-27의 <바다 이야기>입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악의 상징입니다. 굳이 출애굽을 할 때에도 바다를 가리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탄마귀를 상징하는 바다가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위협할 때에, 예수님이 바다를 제압해내십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사탄마귀의 권세를 쫓아내실 힘이 있으신 분으로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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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구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기적>이 나란히 배열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가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사탄권세를 쫓아내기 시작하신 하나님의 통치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사탄권세가 패배하기 시작했다는 하나님의 통치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둘의 이야기는 서로 상호 보완하는 구조입니다. 한 편으로는 사탄권세와 하나님 사이의 우주전쟁이 일어납니다. 아직 사탄이 완전히 쫓겨나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떠나갑니다. 사망의 흔적이 사라집니다. 사탄권세의 힘을 예수님이 제어하기 시작합니다. 그 우주전쟁의 시발점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 가르치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방어적으로, “나는 죄 안지을 겁니다”라는 정서로 살지 말자는 겁니다. 사탄권세가 힘을 잃고 쫓겨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더 공격적으로, 능동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합니다”라는 정서로 살자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기적>은 서로 상호보완되어 전 우주적인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이미 지배하고 있는 사탄권세가 힘을 잃고 쫓겨나며, 우주의 원래 주인이셨던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 권세를 되찾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산상수훈에 가장 핵심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한 절 한 절 강해할 수 있지만 아주 기본적인 기도의 내용은 9-10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사탄권세가 힘을 잃고 쫓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강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말입니다. 사탄마귀의 권세가 있던 왕좌에 하나님이 앉아달라고 강청합니다. 온 땅에 널리 퍼진 사탄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이 온 땅에 이뤄지게 해달라고 강청합니다. 말 그대로 권력교체를 강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탄에서 하나님으로 권력이 교체되길 바라는 기도의 키 포인트가 또 있습니다.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바로 이 짧은 기도문에 산상수훈의 의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원 의미를 살려 의역하자면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사탄처럼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에 가깝습니다. 

 

온 세상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권력이양하는 과정에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인간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사탄마귀를 권좌에서 몰아내시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는>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앞에서 드려진 모든 기도가 응답되려면, 기도한 기도자에게서 먼저 사탄이 쫓겨나야 가능합니다. 기도자에게서 먼저 하나님이 왕이 되셔야 가능합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가 축출되고 하나님께서 권세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장은 바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과연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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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적실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부터 진짜 제대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나요? 언제부터 진짜 제대로 예수님을 여러분 삶의 왕으로 모시기 시작했나요? 내 모든 삶의 왕이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고백을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나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하나님께 내 삶을 의탁하게 된 시점은 아마도 20살의 뜨거운 나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1-2월 처음 참가한 청년부 수련회에서 성령체험을 경험했습니다. 6-7월 참가한 씨씨씨 여름 수련회에서 깊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딱 어느 시점이라 잡아내기는 힘들지만 그 1년여 되는 과정 동안 저는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로 저는 씨씨씨 선교단체에서도 꽤 예쁨받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군생활을 위해 휴학한 기간 동안은 청년부에서 고작 21살에 셀모임을 담당하면서 임원회의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부 교사를 하게 되었고 목회자로의 소명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던 20살 이후 펼쳐진 21살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저를 전도했던 친구의 누나는 저를 두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퍼부어주시는 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 삶이 겉으로는 많이 바뀌었고,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하게 되고, 신앙도 좋다는 평가를 들으며, 남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게 되었지만, 막상 제 삶이 썩 나아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다혈질이 가득했고, 마음 깊은 곳에는 음란한 생각이 가득했으며, 제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것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사실은 제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진심은 매우 절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그 어떤 신앙의 훈련으로도, 성경읽기와 기도훈련과 몇몇의 수련회로도 제 안의 죄악됨을 교정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말해왔지만 그때 당시에 제 삶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능력은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한다는 말은 많이 했고, 기도모임과 찬양모임때마다 그런 유의 멘트를 반복했지만, 저의 많은 영역에서 여전히 하나님인 주인되시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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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자 하면,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갖고서 오늘의 본문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세리 마태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세관에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한 마디 말에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쫓는게 가능했을까요? 아마 그 전에 세리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던 마태를 눈여겨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둘 사이에는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리 마태는, 자신이 세리라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와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세리 마태가 제자가 된 이후의 장면입니다. 그의 집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제자들과 앉아 식사를 나눕니다. 참고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가족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빵을 떼어주고 잔을 나눠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제자들에게 빵과 잔을 나눠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곱씹어보십시오. 결코 제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는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더 나아가 세리 마태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처지의 이들을 불러 함께 가족으로 대우하고 계신 예수님. 매우 파격적인 장면입니다. 또한 논란을 일으킬만한 장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두고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들으십시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야 쓸 데 있느니라.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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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마태를 불러 제자 마태로 삼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의 정점에 위치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탄마귀를 쫓아내는 이야기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 사망의 흔적을 제거하는 것, 중풍병자와 열병을 고치는 것,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사탄마귀를 쫓아내는 장면은 바로 <세리 마태가 제자 마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마귀를 승리하는 우주적 전쟁의 이야기는 단순히 바다 위를 걷고, 귀신이 쫓겨나며, 병이 고쳐지는 기적이 이야기이지 않습니다. 결국 우주적 전쟁의 이야기는 한 인간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이야기입니다. 한낱 세리에 불과했고,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에 빌붙어 살던 세리가, 이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변화되는 이야이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순히 귀신을 축출하고, 병을 고치는 전방위적인 영역을 넘어, 한 개인의 인격 (특별히 세리 마태의 살 가운데)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리 마태의 관점에서 산상수훈을 생각해봅시다. 어제까지만해도 그는 세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세리의 삶을 청산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진정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하루 만에 확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 노력해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리 마태와 같은 이들에게 기도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먼저 세리 마태와 같은 우리들을 향합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던 우리의 삶과 내면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사탄의 뜻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충만하기를, 하늘에 충만한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도 이뤄지길 촉구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담대하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사탄처럼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 기도를 곱씹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협박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온 세상에서 완전히 몰아내시기 전에 가장 중요한 전장은 바로 우리의 삶, 우리의 내면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개인의 삶에서 사탄이 축출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사탄이 축출되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실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믿음>이냐 혹은 <행함>이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가 아닙니다. <행함>이 불가능할정도로 망가져버린 한 개인의 삶 속에 역사해서 끝끝내 불가능할 것 같은 <행함>을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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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20대 초중반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 발버둥치던 저의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저의 진심은 분명했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1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 되어가셨습니다. 발버둥을 치고 아등바등 거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던 그때는 불안했던 나의 삶이, 어느덧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배워가며 좇아가는 삶으로 조금이나마 성숙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나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작동했던 것입니다.

 

세리 마태의 삶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실제 예수님의 제자였던 세리 마태였다면, 그가 복음서를 쓴 시점은 노년기의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신앙의 삶, 한낱 세리로 로마제국에 충성했던 그의 삶이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복음서를 집필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조금씩 느릿느릿, 알게 모르게, 하지만 분명하게 성숙하고 배워가며 하나님을 닮아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인 세리의 삶을 공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지 않을까요?

 

세리 마태가 막 예수님을 제자로 좇았을 때만 하더라도 산상수훈은 매우 힘겨운 계명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만큼,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는 사실, 즉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녹아들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리 마태가 제자 마태가 되었습니다.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세리 마태에게 역사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도 역사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고대하며 함께 걸어가십시다. 불가능한 것 같던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우리 가운데 스며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