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글.

 

서평 과제로 인하여 헨리 나우웬의 짤막한 저서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집어 들었다. 내용의 글자 크기도 그렇거니와, 페이지 수도 결코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만큼은 짧지만 충분히 묵직했다. 특별히 헨리 나우웬은 글쓰기에 있어서 자신의 실존을 오롯하게 투영해내서 쉽지만 우려낸 깊은 맛을 내는 몇 안 되는 실력 있는 영성작가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논지를 따라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글 이면에 묻어나는 그의 실존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본 서평은 그의 저서에 대한 내용 요약도 담겨있겠지만 나 자신 스스로의 실존에서 마주하고 대화한 흔적 또한 묻어나리라 생각한다. 아니, 헨리 나우웬의 책을 서평하는 만큼, 현재의 생각과 감정이 묻어난 고유한 실존을 투영해야만 하겠다는 강박이 괜히 스스로를 눌러온다. 어쨌건 차근차근 그의 논지를, 그리고 그의 실존을 한번 읽어내 보자.

 

II. 소명.

 

그의 첫 챕터의 제목은 ‘소명’이다. 소명이라고 하면 매번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직장인에 불과했고, 교회에서는 새신자에 불과했지만 당시에 나는 신학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남들은 토익에 빠져살고 스펙에 빠져살 무렵, 나는 신학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 그런 유의 탐독은 결국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이어졌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신학적으로 사유하던 즐거움 끝에 나는 ‘편입’을 결정케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학교 면접’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 교수는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자네 소명이 있는가?’ 오랜 세월동안의 신학책 탐독으로 기존 교회 언어와 그 언어에 담긴 함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나는 어렴풋이 돌려서 대답했다. 인생의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걷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하지만 그 교수는 당황스럽게도 ‘그래서 소명이 있다는건가? 없다는건가?’라며 나를 몰아붙였다. 아마도 처음으로 신학교 교수에게 조소를 날린 지점이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소명’이라는 단어는 신학교 내에서 ‘목회자후보생’의 필수요건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성경을 꼼꼼히 살펴봐도 그렇고, 교회사적 전거를 들어봐도 자명한 사실은 ‘소명’은 목회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것이다. ‘최대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14)’만으로도 충분치 않고, ‘지금의 시공간 속에서 살아있는 그리스도(14)’가 되라는 요구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란 헨리 나우웬의 말 또한 동일한 맥락 위에 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소명’을 더욱 레디컬하게 밀어붙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소명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악한 세상’이라는 밑그림에 기반하고 있다. 실제 나는 매주 강단에 올라가서 고등부 아이들이 듣기 싫어할만한 소리를 내뱉는다. 바로 세상의 불공정함, 부패함, 어그러짐을 매주 지적한다. 그뿐인가? 교회의 추악한 자기연민과, 자기위장, 그리고 전도사들 세계와 목사들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쭙잖은 논리들을 예시로 든다. 매주 빠지지 않는다. 나는 일종의 ‘고발자’와 같다. 이런 고발이 실패하는 것과 동시에 복음의 제시가 실패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치열하게, 그리고 한 편으로는 담담하게 이 세계의 추악함을 폭로한다.

 

헨리 나우웬이 제시하는 세상의 질서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자신만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믿도록 강요(17)’하는 추악한 세상이며, 그런 실패를 한 이들을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 수양이 덜 된 사람, 부도덕한 사람, 멍청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세상이다. 그와 함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실패를 넘어서는 성공’, 이른바 ‘상향성의 충동’이다. 이는 결국 아무도 쥘 수 없는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한 만인에의 투쟁을 유발한다. 모두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 자책에 빠져 실족하고, 꼭대기에 가까이 오른 이들은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어 허무함에 빠지는 이른바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 직전의 상태(20)’가 오늘날의 세상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현실이 여기에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특별히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천함, 낮아지심을 높여 찬미한다. 또한 이런 찬미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비천한 예수의 일상을 떠올리게 된다. ‘권력의 권좌에서 무기력함으로, 위대함에서 왜소함으로, 성공에서 실패로, 강력함에서 연약함으로, 영광에서 치욕으로(22)’ 옮겨온 예수의 일생을 톺아보며 묵상하고 있자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우뚝 솟은 새로운 현실을 우리는 맛보게 된다. 이 새로운 현실, 세상의 현실과는 전혀 다르게 우뚝 솟은 비천하고, 낮아지는 현실이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때로는 이러한 ‘소명’이라 불리는 것들이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지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 학대의 영성(26)’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헨리 나우웬의 역설을 꼼꼼히 들어보아야 한다. 본디 인간은 ‘오염되어 있으며 죄 많고 깨어진 상태(27)’이다. 예수의 길, 예수의 삶은 우리에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은 신적인 생활방식이다. 인간의 삶과 신적인 삶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 전혀 다르게 갈라지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신적인 삶’을 인간에게, 바로 성령을 통하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 놀라운 은혜의 신비란?!) 실제로 제자들이 그랬다. 그들 또한 오염되어 있으며, 죄 많고 깨어진 상태였다. 스승이신 예수를 잃고 깊은 상실감과 패배감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결코 성령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에게 ‘예수의 길’, 이른바 ‘신적인 삶’을 좇을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을 허락했다. 성경이 바로 그 사실을 증언한다.

 

실제 본인은 약 4개월 동안 예수의 비천한 삶을 설교해왔다. 하지만 매번 설교를 하면서도 가슴 치는 무엇인가가 결여된 느낌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계량, 혹은 인간의 개조, 인간의 진보만을 외치는 것은 아닐까라는 자괴감도 밀려왔다. 본인의 설교에 결여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헨리 나우웬의 진술대로였다면 ‘성령’이었을 테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존재 속에는 ‘예수의 비천한 삶’이라는 ‘신적인 삶’을 추동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그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성령의 은총,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추동되는 ‘예수의 비천한 삶’을 설교했으면 어땠을까? 과거의 가정은 없지만 괜스레 아쉬울 뿐이다.

 

III. 시험.

 

그러고 보면 ‘예수의 비천한 삶’의 소명은 한창 방황하던 대학교 4학년 당시에 나를 붙잡았다. 그때 읽었던 책은 무엇일까? 그때 만났던 사람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때 함께 불렀던 찬양은 무엇일까? 짐짓 잡히는 것은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그의 ‘비천한 삶’이 내게는 유일한 ‘생명의 길’로 비춰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삶, 다른 길을 추구해왔고, 그 길의 중간 어딘가에서 신학생으로써, 그리고 지역교회 전도사로써 살아가고 있다. 나름 세상의 길을 뒤로 하고, 예수의 비천한 삶이라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며 자부하고, 남들도 때로는 자유로워 보인다며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돈을 추구하지 않겠다며 직장이 아닌 전도사를 택했고, 시스템이 아닌 사람을 살리겠다며 직장이 아닌 전도사를 택했지만, 나는 지금도 (작년에 대비하여 인상된) 월급 15만원의 유익을 맘껏 누리고 있고, 어떻게든 안정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키려는 욕망과 맞서 싸우고 있다. 근데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지 않았던가?

 

‘예수의 광야에서의 시험’을 본인은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의 전쟁’이라며 설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실제 전형적인 세상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38)’의 시험을 헨리 나우웬은 ‘상황부합의 시험’이라고 정의한다. 매순간 주어진 상황에서 필요한 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끔 만들어서 우리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시험이다. 이런 유의 시험에 의해 우리는 일의 성과, 눈에 보이는 결과, 유형의 생산물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일반적인 대형교회에서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교회 또한 그리 작지 않은 교회이기에 가끔씩 이런 유혹에 휘말린다. 내 앞에 주어진 특정 상황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특정 행사에 성도들을 동원해내는 것, 또한 기획한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 그것을 내 존재성과 맞바꾸자며 계속적으로 유혹한다. 그럴 때에 인정을 뿌리치고, 괄시와 천대를 감수하며, 참된 존재성을 획득하려는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란 절대 쉽지 않다.

 

‘예수의 광야에서의 시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예수는 ‘진기하고 놀라우며 기이하고 전례가 없는 일에 반응하도록 강요하는,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강요하는(43)’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과도 직면한다. 이 또한 전형적인 세상의 방식이다. 담당하는 부서의 지체들이 2년 전에 교사로 만났던 한 집사님, 그는 어린 중학생들을 데리고 매번 기도원에 올라가고, 뜨거운 집회로 찾아갔다. 그리고 온갖 회중들이 쓰러지는 장면, 축귀가 일어나는 장면, 온갖 은사의 현현이 나타나는 장면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고작 중학생들에게.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장면의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나 또한 이런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런 환상의 미혹 아래 자유하지 못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는 전혀 이런 유의 환상적 모습을 도리어 거절하셨고, 작고도 미천하고 또 조용한 모습으로 그 분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아주 은밀한 방식, 숨겨진 방식, 비천하고 낮아지는 방식으로 시작하신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사역의 현장에서 이끌어나가기란 쉽지 않다. 화려한 은사의 현장을 체험한 그들을, 어찌 이 낮고 좁고 험한 길로 이끌 수 있으랴? ‘능력이 부족한 사역자’라 스스로를 탓하며 그들과 꾸역꾸역 벗하며 살아가는 수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사실 ‘능력이 부족한 사역자’라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성도들의, 공동체 구성원들의 칭찬을 거절하는 행위와 같다. 그들은 화려한 은사의 현장을 제시하는 사역자들에게 열광한다. 더더욱 청소년들은 말이다. 온갖 천박한 언변과, 심리학적으로 감정의 흥분을 유도하는 사역자들은 그들에게 인기를 많다. 그런 그들에 비해 진지하게 신학책을 연구하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본인은 ‘능력이 부족한 사역자’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런 ‘가면놀이’가 가능할까? 헨리 나우웬은 그런 우리들에게, 그런 칭찬에의 유혹 앞에서 좌절하는 우리들에게 ‘은밀한 내면의 기도’를 통해 절대적인 하나님과 교통하라고 권면한다. 바로 그 지점,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부드러운 음성(46)’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 음성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이러한 유의 칭찬에의, 그리고 인기에의 욕구에서 벗어나 오롯이 예수의 길을, 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대면한 시험은 ‘권력 획득의 시험(49)’이었다. ‘부끄러움이 없이 권력추구를 격려하는 문화(49)’ 속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우리들은 ‘무력함에서 선이 나온다는 사실(49)’을 전혀 믿지 못한 채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유의 세상질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착각(50)’을 심화시키는데, 그 지점에서 우리는 모두 권력추구의 시험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의 길, 그리스도의 길은 자명하다. 그 모든 권력추구를 거절하는 길이다. 이러한 길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벌거벗고 상처받기 쉽고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51).’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모든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을 내어놓고, 하나님께만 스스로를 위탁할 것을 요구받는다.

 

과연 나 스스로는 권력을 내려놓고, 나의 사람을 만들지 않고, 또한 내게 주어진 나름의 유용할 수 있는 특권을 거절하면서 사역해나갈 수 있을까? 아니, 헨리 나우웬이 제시하는 것처럼 벌거벗고 상처받기 쉬운 약한 모습으로 내게 주어진 임무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이는 결코 쉽지 않다. 조금만 옷을 벗는 그 지점에서, 조금만 상처받기 쉽게 장신구를 벗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온갖 말을 통해 들어오는 공격과 마주한다. 과연 우리는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지만 헨리 나우웬은 아주 담담하게 말을 한다. 바로 ‘이것이 바로 종 됨의 위대한 신비다(54)’라고. 또한 덧붙이길 이런 유의 종은 결국 예수와 벗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IV. 자기를 비우는 마음.

 

앞에서 헨리 나우웬이 제시하는 구도는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높고도 높은 곳을 지향하는 ‘세상의 길’이 있고. 그와 비견되어 예수께서 친히 보이신 ‘그리스도의 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긴 하지만, 우리는 매번 예수께서 세 번의 시험에 마주했던 것처럼, 시험과 마주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나름의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데, 특별히 헨리 나우웬은 우리에게 ‘영적 성숙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훈련은 어떤 것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훈련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인간적인 노력이다(60).’는 헨리 나우웬의 말을 곱씹어보자. 아주 자명해진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내어주는 훈련, 그 훈련을 통해 우리는 시험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길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 시공간으로 직접 들어와 창설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우리는 바로 유일한 이 공간에서만 우리를 규정해버린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별히 헨리 나우웬은 영적인 삶을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을 모색하는 삶(61)’이라고 규정짓는데, 이러한 영적인 삶은 바로 우리를 불러내신 유일한 공간인 교회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묵상해야 하는지, 또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또 무엇을 말하고, 생각할 것(63)’인지를 배워간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자연스럽게’ 걷는 법을 배워나간다.

 

이어서 헨리 나우웬은 ‘성경’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66)’이라는 설명과 동시에,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씹고 소화시켜서 참된 양식(66)’으로 섭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묵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떡이며, 우리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빛이며,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직면하도록 하는 생명(68)’으로 승화되는데, 특별히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모든 과정을 일컬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로 형성(66)’되어간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그리스도로 형성해가는 것,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길을 ‘자연스레’ 걷는 훈련과 같다. 그의 강조에 따르면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레 허벅지와 무릎, 그리고 발목에 탄탄한 근육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이전과는 다른 가벼운 걸음으로 ‘그리스도의 길’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가 강조하는 훈련은 ‘마음의 훈련’이라 불리는 ‘개인기도의 훈련’이다. 하나님을 철저히 갈구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비천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비천함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지탱해오는,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 오만과 방자함을 선사하는 체계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별’은 궁극적으로 우리 내면에 현존하는 고독한 공간이 바로 성령의 임재를 알게 하는 마음속의 공간으로 변하는 신비로 이어진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해 선사되는 비천함만이, 우리의 고독을 성령의 임재의 공간으로 바꿔내는 것이다. 또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데, 그 마음이 ‘온 세계의 고통을 감싸고 있음(73)’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온 세계의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와 함께 나누어져야할 짐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 짐을 짊어짐으로 우리는 신비와 직면하는데, 바로 고난으로 악을 극복해내신 예수의 이름, 이른바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감을 통해서 그 고통의 짐을 경감시킬 수 있으며, 고통의 짐의 경감이야말로 우리 삶에 주어진 소명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훈련이 홀로는 어려움이 있다며 벗들과 함께 동역할 것을 제언한다.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자고 말이다.

 

본인은 매주 예배를 기획한다. 최대한 교회를 향한 거대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예배가 담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뿐만 아니라 매주 공동체 지체들과의 만남이,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는 말씀에의 선포가 올곧을 수 있도록 내면 깊은 곳의 욕망을 비워내며, 하나님과의 접선을 시도한다. 또한 미흡할 때가 많지만 그들에게 전하는 성서의 진술들을 씹어서 그려내려 애쓴다. 헨리 나우웬의 진술이 쉽게 와닿지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런 나의 삶을 통해서 어느새 ‘그리스도의 길’은 내가 둘 중의 선택해야 하는 선택지가 아니라, 꼭 걸어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로써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V.맺는 글.

 

역시나 헨리 나우웬의 글은 쉽지만 묵직하다. 또한 그에 상응하는 실존의 체험이 없으면 퍽 와 닿질 않는다. 쉬운 문체지만 마음이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짧은 소책자를 통해 말하려는 바는 너무도 자명하다. 높아지려는 세상의 욕망에 야합하지 말고, 낮아지려는 예수의 길, 그 제자들의 거룩한 순례길에 합류하라는 요청이자, 권고이자, 또한 명령이다.

 

분명 나는 매주 강단에 서서 유사한 말씀을 전한다. 세상의 꿈을 좇지 말고, 하나님의 꿈을 좇으라고 말한다. 낮아지고, 타인을 섬기며, 자족하는 삶의 방식, 이른바 그리스도의 길의 위대함과 찬란함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내 이면에는 온갖 탐욕이 가득하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 타인의 이목을 끌고 싶은 욕망, 탁월함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등.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추악하고 비천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복락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이다. 여전히 탐욕과 추악함 가운데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길’과 유사한 모습의 ‘세상의 길’을 탐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면에 약동하는 성령의 역사가, 또한 그 추악한 죄인에게도 그리스도의 길을 베푸시는 은총의 역사가 있기를 간구할 따름이다. 끼리에 엘레이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