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신 하나님(출 1:8-14)

2021. 5. 5. 17:55

출애굽기 1장 8절 - 14절

 

1907년 평양 대부흥. 한국교회사에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시고 온갖 회개의 역사가 터져나온 사건, 한국교회는 이 시점을 사실상 한국교회사의 시작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막 예수를 믿고 대학생이 되어서 뜨거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바로 ‘Again 1907’이라는 운동에 한국교회가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도 잘 모르고, 예수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인 저에게는, 2007년은 성령강림이 강력하게 일어나서 한국교회가 갱신되고 회복되는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남들에 비해 성령체험의 흔적이 적었던 저에게 있어서는 2007년은 무조건 새로운 기점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저 또한 역사속 대부흥의 흔적들처럼 성령이 강림하시고, 죄를 토설하고, 방언과 예언, 신유와 축귀와 같은 성령의 강한 역사를 목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해는 시끌벅적한 반면 커다란 결실은 없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군대에 들어가서 나름의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군대는 어땠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 군대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약 7-8개월은 하루에 1시간 이상 기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고, 그 시간마다 저는 하나님을 깊이 예배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저는 예상할 수 없었던 성령의 경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 시절이 오순절이었고, 1907년이었고, 부흥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깊고 충분한 시간을 보낸 이후에 저는 섬기던 교회와, 섬기던 캠퍼스 선교단체로 돌아왔습니다. 성령을 뜨겁게 경험했던 저를 당시에 사로잡았던 성경본문은 사도행전 1장 8절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흔히 말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뜨거운 부흥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바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작은 기도의 시간에서 기인했습니다. 저 또한 깊이 경험한 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교회가, 또한 제가 섬기던 선교단체가 부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홀로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현존했던 성령님의 임재는 여전했습니다. 또한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깊이 만져주는 사건들도 왕왕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흥한다거나, 선교단체가 부흥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복음이 만방으로 퍼져나갈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교회와 선교단체의 장벽을 넘어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의 왕성한 역사가 뻗쳐나갈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실망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습니다. 더 강력하고 깊은 성령의 임재를 맛보고 싶었습니다. 초락도 기도원을 비롯한 서울과 부산 곳곳에 있는 성령사역으로 유명한 교회들을 돌아다녔습니다. 꽤 오래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 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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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생애 전반을 걸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 같습니다. 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왜 우리 교회는 부흥하지 않는가, 왜 나의 자녀는 신앙을 갖지 않는가, 분명 ‘나’라는 아주 협소하고 좁은 범위 내에서 하나님은 분명 있는 것 같고, 은혜도 주시는 것 같은데,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강력한 흔적들이 내 삶과 인생 곳곳에 가득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큰 시야를 넓혀보면 하나님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상황을 따지고 환경을 따지고보면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코로나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셔서 코로나의 미래를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코로나 상황 가운데 한국교회지도자들이 잘못 대처하게 만드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코로나와 관련된 하나님의 백성이 들을만한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은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가 살면서 겪고 있는 고민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습니다. 짧은 문장이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요셉에게서 기원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아무런 정책적 고민과 정책적 해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즉자적으로 반응합니다. 전형적인 폭군, 독재저처럼 반응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9절]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전형적인 정치판의 마타도어입니다. 그들이 많으면 얼마나 많을까요? 그들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요? 이스라엘 백성 탄압정책을 통해 이집트 자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인기에 영합하는 전형적인 정치의 기술입니다.

 

그의 대안은 간단합니다. “[11절]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여기서 바로의 속셈이 드러납니다. ‘바로를 위하여’ 바로의 정치기술의 목적은 실제 이스라엘 백성의 탄압에 있지 않습니다. 화려한 건축물을 위한 사업에 이스라엘 백성을 거저 동원하기 위한 술책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의 자국민 사이를 분열시켜 인기를 얻으려는 정치기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정부의 정책을 접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라서 정책결정 과정을 꽤나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정치과정의 뒷방에서 일어난 비화들을 왕왕 접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코로나지원자금을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세금을 더 내야할 때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변화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건축현장노동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 생각하고 잠시 생각해봅시다.

 

7년 흉년시기에 자신들을 이집트에 끌고 온 원흉인 요셉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갑자기 들이닥친 바로의 정치적 결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움직이시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시는건가? 이런 무수한 고통 섞인 질문들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올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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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잠시 우리의 눈을 돌려보십시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게 ‘바로의 정치기술에 근거한 정치적 판단’이 끝내 하나님의 통치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앞서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야기 바로 앞에 기록된 출애굽기 1장 1절부터 7절을 보십시다. 특별히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을 충만하게 하라”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집트에 포로로 끌려와 타국생활을 하는 시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타국 땅에 끌려와서 어떻게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특별히 신앙적인 일을 한 것이 없었을텐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생육하게 하셨습니다.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온 땅에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중간에 기록된 단어 ‘불아나다’와 ‘강하다’는 각각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나니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맺은 결실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눈에 볼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지혜보다 더 높은 지혜를 가진 하나님, 바로의 정치기술모다 더 뛰어난 정략적 통치를 펼치시는 하나님께서 이끌어나가시는 은밀하고 강력한 역사가 있음을 설득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고 계십니까?”와 같은 류의 기도를 무수히 많이 뱉곤 하지만, 출애굽기는 그런 우리에게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우리의 두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니 두 눈을 감고는 믿음의 눈을 들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역사 기저에 진정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라고 말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지으며 신이 났을 겁니다. 값싼 비용을 투자하며 건축공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과 자국민을 갈라치기하는 정치기술을 통해 자국민의 인기도 얻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12절] “그러나 학대를 받을 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더욱 열심히 일을 시켰는데, 더욱 고된 삶을 살게 되었는데, 막상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강성해집니다. 더욱 숫자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애굽 사람들이 근심합니다. 왜 애굽 사람들이 근심했을까요? 사실은 바로의 통치기술에 놀아났기 때문입니다. 바로를 비롯한 정치 1선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들을 꽁으로 부려먹고 지지세를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적으로 규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정치 기술을 펼치자 실제 애굽에 살던 자국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경계심을 진짜로 갖게 됩니다. 그들이 강성해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는 바로를 지지하면서, 바로의 정치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쇠약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반면 이집트의 자국민들은 혼돈에 빠집니다. 바로의 정치가 무능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강성함을 막으려고 정책적 대안을 세웠는데, 그 대안이 먹히지 않으니 도리어 바로의 정치에 대한 회의가 짙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의 정치 너머에서 암약하고 있는 하나님의 정치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는 이집트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는 자기 자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집트 제국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가 이름조차 잊었던 요셉이 믿었던 하나님,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사실상 이집트 제국의 역사를 끌고 나가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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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를 천천히 읽어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출애굽기 전반부에서 가장 큰 악당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입니다. 그는 폭군입니다. 독재자입니다. 온갖 정치기술을 통해 이스라엘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보다 더 크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 굴복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께 끝까지 반항하지만, 반항하는만큼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은 더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반항의 정점인 홍해에서 그의 마병과 병거가 몰살되었을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야기의 끝을 알면 시작도 아름다워보입니다. 끝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의 결말을 알고 나면 바로가 애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사현장에 동원하는 것도, 유아살해계획을 세우는 것도, 하나님 앞에 끝끝내 반항하는 것도 모두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궁한 지혜와 치밀한 모략에 근거하여 차근차근 움직이시고 섭리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개입하셔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난 이후에야 비로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과정에서는 단지 눈을 감고 믿음을 붙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젊은 설교자입니다. 젊은 설교자 입장에서 저의 약점 하나가 있습니다. 인생을 많이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끔 인생 속에서 소설과 같은 생애를 겪어내신 어르신들의 신앙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말끔하게 정리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렵고 복잡한 신학개념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쭉 듣다보면 이야기의 ‘끝’에 가까이 다가온 어른들의 지혜에 탄복하게 됩니다. 마치 300페이지 소설로 친다면 저는 고작 100페이지를 읽으며 이제 막 등장한 악당과 싸워서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데요, 어른들은 280페이지 정도 읽어서 온화한 미소로 자신의 인생이란 소설을 평가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삶을 인도하셨어요” 짧은 말이지만, 대단한 학식이 곁들어지지 않은 말이지만, 때론 논리적 근거도 없는 말이지만, ‘끝’에 가까이 온 어르신들의 신앙이야기는 언제나 귀감이 됩니다. ‘끝’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백신수급과 치료제수급으로 언제쯤 종결될 수 있을까요? 또한 종결된 이후에 또 다른 코로나와 같은 위기가 닥치진 않을까요? 더 나아가 코로나로 말미암아 완전히 생각이 달라져버린 이후의 사회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시기를 겪을 때에는 기도를 한다 한들 하나님이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안이 밝은 분이라 하더라도 미래를 온전히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돌아갑니다. 우리의 기대와 소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확진자가 터져서 비대면으로 전환되기도 하고, 온라인 예배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몇몇 교우들이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후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도저히 가닥이 잡히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눈을 감으면 됩니다. 출애굽기 1장 1절부터 7절까지는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듯이 이집트에 끌려와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못박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이 경상도 남자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서울남자 같았더라면 우리에게 시시콜콜 모든 이야기를 다 들려주실 것 같습니다. 코로나는 언제 와서 언제 끝날 것이고 교회는 어떻게 대비해야하고 이후에 일어날 일은 어떻고 저떻고 시시콜콜 다 알려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경상도 남자 같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시시콜콜 한 이야기를 모조리 쏟아내다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못 믿나? 좀 믿어라’

 

때로는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들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한 시절이 지속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지금 이 시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곧잘 있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이집트에 끌려간 그 기간 동안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강하며 온 땅에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이집트 바로가 자신만의 통치기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갔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되어주셔서, 그들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은 합력하여 선을 만들어내셨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시시콜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치 경상도 남자처럼 ‘내 못 믿나? 좀 믿어라’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되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닥친 모든 상황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닥친 상황들 또한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우리를 흔들 때에 차라리 육신의 눈을 감으십시다.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로보다 강하고, 상황보다 강하고, 환경보다 강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적용찬양 : 하나님 한 번도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