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깊이(욥기 42장)

2021. 7. 7. 16:56

신학교에 가면 크게 두 부류의 신학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성파>고 또 하나는 <영성파>입니다. <지성파>는 되게 똑똑합니다. 너무 똑똑해서 싸가지가 없습니다. (사실 저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했습니다.) 말은 맞는 말인데 들으면 되게 기분이 나쁘게 말을 합니다. 반면 이들은 별로 기도를 하거나 영적인 깊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성파>들은 <지성파>의 지식을 한 수 아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말 잘한다고 그게 전부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둘 중의 어떤 부류가 옳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신학을 배우고, 목회를 배우는 입장에서 각자가 출발하는 입장입니다.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엔 둘 다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얄팍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성파>들은 현란하고 똑똑한 글과 말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이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영성파>들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를 하고 기도원의 나무뿌리를 뽑게 되면 그것으로 삶의 모든 문제와 교회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성파>의 자신감도, <영성파>의 자신감도 얄팍합니다.

 

<지성파>이든, <영성파>이든 실제 교회 목회의 현장에 들어와서 다양한 문제와 갈등을 마주하다보면 자신의 얄팍한 자신감이 산산조각나며, 얄팍한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지성이냐 영성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얄팍한 자신감과 믿음을 뚫고 진중하고 묵직하게 신앙의 뿌리를 내려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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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진중하고 묵직하게 신앙의 뿌리를 내려간 인물을 한 명 다루려고 합니다. 바로 <욥>이란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를 두고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입을 빌어서 말합니다. 말 그대로 교회 열심히 다닌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훌룡한 사람입니다. 누가봐도 본받을만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한 믿음의 역량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는 어느 정도로 온전하고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느 정도로 악에서 떠난 사람일까요?

 

우리는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저처럼 신학교에 나오고, 주변에 다들 전도사고 목사인 사람들은 더군다나 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따져봅시다. 누가봐도 탈탈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을, 신앙적으로 위대한 인물을 한 번 꼽아봅시다. 말 그대로 겉모습과 신앙이 일치하는 사람,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 누가 보더라도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얼마 정도 될까요? 신앙이 좋은 사람은 꽤 있겠지만, 신앙이 위대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신앙이 거의 완벽한 사람을 찾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욥의 신앙은 어땠을까요?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니까, 정말 위대했던 신앙일까요? 말과 삶이 일치하며 겉모습과 신앙이 고스란히 일치하는 사람일까요? 흥미롭게도 욥기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 욥이 제대로 된 신앙적인 인물이었을까 의뭉스러운 지점들이 있습니다.

 

[29장 8절-12절]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을 일어나서 서며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여기까지 읽으면 욥은 단순한 한 의인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를 보고 젊은이들이 존재를 감추고, 어른들이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합니다. 동네의 유지와 지도자들은 말을 삼가거나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서 그랬을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본문을 보십시다.

 

[30장 1절]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떼를 지키는 개들 중에도 둘만하지 못한 자들이라

 

욥의 전체적인 말의 문맥을 보면 <예전에는 나한테 꼼짝도 못하고 고개나 굽신거리는 것들이, 이제 내가 고난을 당한 이후에는 괜히 비웃고 조롱한다>는 늬앙스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욥이 어떤 사람인지 유추해봅시다. 욥은 아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고 위대한 신앙인이라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그는 겉으로 볼 때에는 훌룡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로 <고난>이 그에게 오기까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탄의 하나님을 향한 발언 하나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 10절]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욥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고 위대한 신앙인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온실 내의 화초였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신앙을 배웠습니다. 경건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그의 인생을 살짝 비켜나있는 동시에 그의 삶엔 온갖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온갖 불만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는 존경을 표했던 젊은이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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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꼭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광야로 나오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살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광야로 나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겪어봐야 압니다. 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그의 삶을 살짝 비껴나있을때, 그는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삶의 고난이 그를 엄습할 때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실 내에서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때는 잘 모릅니다. 삶의 고난과 풍파가 없을 때는 잘 모릅니다.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욥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평생 교회만 다닌 사람이, 평생 축복만 받은 사람이, 평생 어려움 없이 살아간 사람이, 신앙의 깊이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신앙이 얄팍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실제 문제가 있는 교회 현장에 뿌리내리지 않고 <지식>만을 자랑하는 <지성파>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실제 교회 현장의 문제는 발견하지 않고 <기도>만을 추구하는 <영성파>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얄팍한 지식은 곧 무너집니다. 그들의 얄팍한 신앙은 곧 사라집니다. 온실 내에서 형성된 신앙, 보호하심을 받는 신앙, 고난과 풍파가 없는 삶에서 유지되는 신앙은 곧 <얄팍함>에 기반한 신앙입니다. 한숨의 재처럼 사라질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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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지난한 고난을 겪으면서 친구 세 명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11절)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욥의 현실을 목도한 이후에 (12절)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는 정도로 욥의 고통에 공감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내 이들은 욥을 향해 거친 말들을 내뱉습니다,

 

그들의 거친 말은 매우 명료합니다. 이유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겁니다. 끝없이 그들이 변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빌닷 또한 말합니다. [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소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1:5-6]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세 명의 친구는 아주 오랫동안 욥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일관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변증합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욥 혹은 욥의 가문의 경건하지 않음을 변증합니다.

 

고난 당하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욥이든 욥의 아들이든 뭐든 잘못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겁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기본적인 자산입니다. 평생 어려움 없이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 있는 성도의 삶을 알지 못합니다. 힘겨움 없이 신앙생활을 잘 해왔기 때문에 힘겨움 있는 신앙생활을 전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앙생활에 입각해서 보면, 자신이 경험한 눈으로 보면, 욥이 잘못한 것이 자명하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변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닙니다. 바로 <본인이 겪고 있는 신앙생활의 정당함>입니다. 나는 행복하고, 나는 신앙이 좋고, 나는 경건한데, 고난을 당하는 욥은 무조건 신앙이 나쁘거나, 죄를 지어야,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 견실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욥의 세 친구의 말들은 아마도 과거 욥의 말들과 거의 같았을 겁니다. 욥의 친구 세 명과 고난을 겪기 전의 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살았던 사람들, 평생 축복만 받고 어려움 없이 살던 사람들, 그랬기 때문에 신앙의 견실하고 뿌리내린 깊이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모릅니다. 아픔을 모릅니다. 인생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의 깊이 또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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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 석학, 미국 최고의 신학자란 별칭을 가진 그는 풀러신학교가 마련한 강연에서 자신의 고통스럽고 아픈 삶을 차근차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우울증이 걸린 아내와의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혼을 결심합니다. 또한 이혼 이후에 자살을 시도한 아내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혼한 아내는 이혼 이후에 자신의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히게 됩니다. 그때 당시 남겨진 자녀의 아이는 7살, 훗날 그는 아버지를 향해 7살에 겪은 고통스러운 현실이 준 충격(부모님의 이혼, 어머니의 정신쇠약문제 등등) 에 대해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런 고통스럽고 아픈 삶의 이야기들을 쭉 나열한 이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인생에 대한 여러)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난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간성이라는 것은 그런 질문을 자꾸 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현명하다면 침묵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인생에는 수많은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겪은 아내와의 이혼, 이후 아내에게 발생한 일, 그리고 아들이 겪은 고통은 이유가 없이 자신에게 벌어진 고통스러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왜 일어났을까요? 이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그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알 수 없는 속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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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인생에 찾아온 고통을 견딥니다. 삶의 복잡다단한 아픔들을 겪어냅니다. 그동안 겪지 못했던 하나님의 보호하심 바깥의 삶을 처절하게 마주합니다. 그는 고통과 아픔,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드디어 그는 온실 속의 신앙이 아니라, 온실 바깥이 거친 야생에서 신앙이 무엇인지 비로소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끈질기게 하나님을 향해 질문합니다. “하나님 제 삶을 이렇게 내버려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 삶에 이렇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난의 이유는 바로 불순종에 있고 반역에 있다는 세 친구의 대답을 거절하고, 끈질기게 그는 하나님을 향해 묻습니다. 그 답이 바로 38장에서 4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뭘까요? “알 필요 없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인 “알 필요 없다”는 말씀은 욥을 두고 사탄이 하나님께 했던 말을 상기하게 만듭니다.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가 신앙이 좋았던 이유는 복 받은 <까닭>때문이라고 사탄은 생각했습니다. 진정으로 참된 신앙이라면 <까닭>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이 길로 초청하셨습니다. <까닭>없이, 고난을 겪을지라도, 아픔을 겪을지라도,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흥미롭게도 욥은 하나님의 <알 필요 없다>는 말씀에 깊이 위로를 받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통을 겪으면서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의 아픔을 겪어내면서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끈질긴 기도 속에서 <고난의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욥은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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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욥기의 결론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습니다. <겪어본 사람의 깊이> 고난을 겪기 전의 욥이나 고난을 겪은 이후의 욥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이고,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은 이후의 욥은 <겪어 본>, <살아 본> 욥입니다. 온실 바깥의 거친 광야를 맛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바깥의 거친 세계를 맛본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깊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42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42장 10절을 보십시오. 욥이 그에게 험한 말을 했던 친구들을 용서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말들이었을까요? 하지만 그가 고통을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넉넉히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품을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14절을 보십시오. 딸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욥기 1장에 나오는 딸은 이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고 난 욥의 딸에겐 이름이 있습니다. 그거 직접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때 당시 나름의 여성차별적인 문화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은 이후 욥은 여성차별적인 문화를 뛰어넘어 이름을 지어줍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42장 5절에서 말합니다. 그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던 사람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로 겪었던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고작 설교로만 이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눈으로 보며 만나는 경험은 바로 고난 속에서 작동했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보고, 고난 속에서 손을 뻗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겪어 본 사람의 깊이입니다. 살아본 사람의 깊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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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삶이 녹록치 않다는 겁니다.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결코 쉽지 않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삶을 보호하시고, 항상 축복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삶에는 눈물이 있고,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으며, 언제나 좌절과 절망의 강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월들을 겪고, 살아내면서, 지난한 세월들이 축적되면 축적될 수록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아픈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을 겪은만큼 상대에게 관대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좌절한만큼 다른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축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뿌리 깊게 내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신앙이 뿌리 깊게 내리는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곁을 내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가운데 숨어서 일하시는,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하나님과 믿음으로 동행하며 오늘의 삶을 살아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