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의 하나님(마 18:1-14)

2021. 10. 10. 03:56

고등학교 2학년 6 경에 처음 교회에 가던 날의 풍경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저희집에서 교회에 가는 길에는 공원이 있었습니다. 공원을 지나면 유흥업소의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시장이 있고, 시장 맞은편을 끼고 돌면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정문과 후문으로 이뤄져있는데 보통 후문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후문에는 드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드넓은 주차장 한가운데는 사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후문에서 교회로 들어가는 길은 사택을 기점으로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뉘어있었는데, 왼편은 차가 들어오고 나갈 있도록 넓게 열려있었고, 오른편은 한대가 들어올 정도의 작은 골목길이 있었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지나면 약간의 마당이 펼쳐져있었고, 마당에는 교회에서 제공하는 국수를 먹기 위한 약간의 간이 식당 테이블이 놓여져있었습니다. 당시 예배시간은 11시경이었기에 제가 교회에 들어가던 날은 간이 식당테이블을 중심으로 온갖 집사님, 권사님께서 식당봉사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아마 예측해보자면 국수를 삶고, 그릇을 옮기고 등등의 일을 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교회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복도의 폭도 무척 좁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은 좁았다기보다는 1-3학년 어린이부, 4-6학년 소년부, 그리고 유치부가 마치고 중등부 고등부가 예배를 시작하면서 온갖 사람들이 얽히면서 좁게 느껴졌던 같습니다. 그렇게 좁은 복도를 지나 2 고등부실에 올라갔고 오른편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박힌 베너와 함께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박혀 있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끝나고 나서 함께 갔던 떡볶이집은 기억이 납니다. 시장 안쪽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던 기억, 그리고 무척 시장떡볶이 맛이 났던 떡볶이 집과 당시에는 꽤나 현대적인 감각으로 떡볶이를 만들던 분식집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떡볶이를 비롯한 이것저것의 분식을 먹고 나서는 오락실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마도 소수의 인원으로 페트병을 세워놓고 축구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무척 풋풋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교회생활이 무척 생경했습니다. 익숙치 않았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릴 때에 마음이 편안한 느낌은 있었지만, 분명 당시에는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모든 문화가 생경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시점을 기준으로 인생이 반반이 나뉘는 같기도 합니다. 그때가 18살이고 지금이 36살이니까 말이죠. 하지만 분명 재밌는 것은 그때 당시에 쭈볏쭈볏 교회에 나갔던 고등학생이, 교회에 가면 축구대회에 나도 나갈 있었냐고 물었던 고등학생이, 교회에는 예쁜 여자애들 많냐고 물어봤던 고등학생이, 지금 전도사가 되고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재밌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를 만났던 저의 분반공부 선생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지금은 개척교회를 시작하신 당시 전도사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문득 제가 20 무렵 어른인지 혹은 누나인지 모를 분께서 그런 말을 남기셨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처음된다고 하더니 동우가 그런 같다 말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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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태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호기롭게 마태복음 전체의 흐름을 부분부분 해설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전체의 흐름을 제가 잡아내지 못했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읽어가면서 마태복음의 고유한 특징은 <작은 > 대한 관심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고 저는 이를 회의 설교에 걸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마태복음 18장의 본문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읽었던 본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작은 > 대한 관심을 있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약간 돌려서 보면 매우 매우 흥미로운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라는 작가가 개의 자료를 뒤섞어놓았다는 사실을 있기 때문입니다.

 

1)먼저 마가복음 9 33-37절의 자료가 기초적인 자료가 됩니다.

 

약간 앞에서부터보면 30절부터 32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걷는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길에서 토론한 주제는 (34) “서로 누가 크냐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을 지향합니다. 섬김과 희생을 지향합니다. 지향의 끝은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놓고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 것을, < 사람의 >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36) 지나가던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는데 말씀의 본의는서로 누가 크냐따지기보다는 차라리 어린아이 하나를 대접하는게 낫겠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2)다음은 누가복음 15 3-7절의 자료가 번째 자료가 됩니다.

 

너무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백마리가 있는데 잃은 마리를 위해서라면 원래의 아흔아홉마리를 버려두고서라도 찾아나서는 양치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 것은 여기서 말하는 <잃어버린 이들>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다가 떠난 자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은 기존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99명보다는 <세리와 죄인들> 1명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하늘에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마지막으로는 누가복음 17 1-2절의 자료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족>하게 한다면 그건 <> 연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여나 작은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과장법을 통해 <실족하게 하지 >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상력을 가동해보겠습니다. 마태는 종류의 자료를 수집했을 겁니다. 아마도 그는 <마가복음> 갖고있어서 언제든 읽을 있었거나 교회구성원들 다수가 <마가복음> 함께 암송할 있는 상태였을 겁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기에 누가복음에 기록된 종류의 분리된 자료는 각각 수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금 상상력을 가미해보면 <잃은 1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 양을 버려두는 이야기> <실족하게 바에야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어라> 말하는 이야기는 서로 이야기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개연성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서로 각기 다른 자료였을 겁니다. (그것이 구전이든 글모음집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마태는 굳이 자료를 짬뽕으로 섞어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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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에 비해서 과하게 가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죄책감입니다.

 

회개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과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오만함의 발현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죄를 구구절절 나열하며 과하게 회개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구구절절 나열되는 죄를 강한 마음을 먹었더라면 짓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오만함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는 20 초중반 매우 극심한 다혈질로 힘겨웠습니다. 다혈질로 분노를 발하는 제가 매우 혐오스러웠고 날마다 회개했습니다. 하지만 30 중반이 되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호르몬 문제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문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해결되는 문제이지, 내가 작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과한 회개의 반대편에는 과한 자의식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다수의 교회 간증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서원을 지켰기 때문에, 자신이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을 했기 때문에, 등등의 신앙적 공적을 바탕으로 현재의 삶의 성취를 거둘 있었다는 고백. 이는 겸손해보이는 신앙고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한 자의식입니다. 내가 열심히 사업을 했더니 돈을 많이 벌었고, 내가 열심히 공부를 했더니 좋은 대학에 왔고, 내가 열심히 스펙을 쌓아더니 대기업에 왔다는 자의식 가득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오만함의 발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가 신앙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있었다는 오만함의 다른 표현입니다.

 

결국 과하게 회개하는 기저에는 오만함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적 행동을 과대평가하는 자의식의 기저에도 오만함이 있습니다.

또한 오만함은 우리의 인생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있다는 착각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해드리는 행위입니다. 한낱 나의 선택과 결정은, 신앙적 헌신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의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철저히 깨닫는 과정이 바로 신앙성숙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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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이 참고한 번째 자료인 마가복음 본문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서 일어났던 논쟁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 그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왕이 되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위에서 논쟁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다퉜습니다. 이는 사실 오늘날 신학교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암묵적인 논쟁입니다. 목사들의 모임에 가도 발견할 있는 미묘한 갈등입니다. 아니 ,어쩌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누가 신앙이 좋은지 겨뤄보자라는 매우 극히 세상적인 생각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고 있습니다.

 

누가 높을까요? 누가 신앙이 좋을까요? 누가 예수님의 우편에 앉을 자격을 갖추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오만함의 다른 표현입니다. 신앙은 공부해서 되는 것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봉사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결국 인생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차츰차츰 배우는 밖에는 없습니다. 애초에 <내가 했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삶의 굴곡을 견디고 살아내면서 <내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음> 차근차근 고백해가는 과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성숙의 여정은 비움의 여정입니다. 포기의 여정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누가 크냐고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 (3)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라>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논쟁 그만하고 애들이나 챙겨라> 의미로 말씀하셨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포기하라는 겁니다. 높은 자가 되기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신앙이 좋은 하려는 욕구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우편에 앉을 자격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신앙이 누가 좋은지 겨뤄보려는 욕구를 포기라하라는 겁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4) 천국,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세계에 임하게 된다면 오히려 어린 아이처럼 사람, 높아지기를 포기하고 극히 낮아진 사람이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을 향한 열심이 덧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고 신앙 좋다는 평가를 받으려는 모든 애쓰는 행동이 덧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혜롭게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 나올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테니,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올 준비를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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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마태는 <어린아이> 천국에서 대접받을 것을 노래하다가 문득 <작은 >라는 단어를 통해 이야기의 전환을 꾀합니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마태는 <어린이> 관련된 이야기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 명령하는 이야기를 매우 교묘하게 엮어내고 있습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스캔달>이라는 단어입니다. 보통 유명인의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 어떤 추문을 두고 <스켄들>이라 말합니다. 바로 헬라어 <스켄달>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본래 뜻은 <걸려 넘어지다> 혹은 <함정에 빠지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실족하다> 혹은 <범죄하다> 번역된 단어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 명령하는 이야기에서 번이나 반복됩니다. (6, 7, 8, 9)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상상을 해볼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결지어 말하자면 적어도 본문에서 <작은 > 교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고, 신앙 좋다는 평가에는 벗어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사랑받을 수도 없고, 존경받을 수도 없고, 신앙이 좋다 평가를 받을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마태가 애초에 세리였다는 사실을 토대로 유추한다면 <작은 > 바로 세리입니다. 창녀일 수도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나 문둥병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장로직분을, 권사직분을 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어떤 누구도 신앙 좋다고 교회의 중추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근거하여 이들을 판단합니다. (8) 손과 발이 그들을 홀대합니다. (9) 눈빛이 그들을 얕잡아봅니다. 여기서 <범죄하다> 번역된 단어의 본의는 단순히 손과 발과 눈이 범죄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손과 발과 눈이 <작은 > 자처하는 이들을 홀대해서 걸려넘어지게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걸려넘어지게 만든다면 (6) 차라리 연자맷돌을 달고 물에 빠지는 편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걸려넘어지게 만드는 손과 발은, 하나님의 손과 발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걸려넘어지게 만든느 눈은 하나님의 눈과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 하나님입니다. (10) 그들을 보호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특명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명을 받은 천사들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누구도 세상적인 눈으로 판단하기에는 신앙이 없어보이고, 교회 안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할 것만 같은 사람, 세리와, 창녀와, 귀신들리거나 문둥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기 위함입니다. (13) 하나님의 독특한 취향은 바로 99마리의 , 신앙 좋아보이고, 마치 보좌 우편에 앉을 것만 같고,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린 1마리의 , 세리와 창녀와 귀신들리거나 문둥병으로 고통받는 <작은 >에게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 없을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일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신약성경까지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매우 독특한 취향이라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가지의 이야기를 엮은 마태가 하고 싶은 말은 14절에 기록됩니다.

 

<작은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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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크게 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윤리적인 질문이 지나칠 우리는 한낱 위선적인 종교인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고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도, 선한 것만 같은, 하나님의 뜻인 것만 같은 일에 열심을 다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윤리적인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는 성경이 반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성경의 예언자들은 윤리적인 질문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으면서 신학적인 질문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봉헌때마다 읊고 있는 호세아 6 6절의 내용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라는 선한 행동을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질문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이 굳이 <작은 >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는 윤리적인 행동을 위해서이지 않습니다. “약한 자를 배려해라, 작은 자를 배려해라, 그들을 돌보고 도움을 줘라정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이 반복적으로 <작은 >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자체가 <작은 자의 하나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자의 하나님> 강조하면서 마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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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했던 설교인데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마태복음 1 족보 내의 다섯 명의 여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말, 라합, ,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마리아. 이들은 성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여인들의 목록입니다. 창녀로 속여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다말, 창녀로 살다가 이스라엘 백성의 간첩질을 했던 라합, 나이 많은 유력자를 꼬셨던 이방인 과부 , 어린 나이에 관계도 하지 않고 임신을 했기에 풍문에 시달렸던 마리아까지. 하지만 마태복음 1장은 의도적으로 이런 자격없는 이들로부터 메시아가 있었음을 노래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장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의 한명의 제자, 사도 중에서도 <의심하는 사람들>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11 중의 <의심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2-3명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부활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다시 사도의 역할을 허락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시작과 끝은 <자격 없는 > 통해 메시아가 태어나고, 메시아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매우, 매우 의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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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없는 > 누구일까요? <작은 > 누구일까요?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28:20)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의심하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신앙이 없어보여도 괜찮습니다. 신앙의 고결한 성품과 지도력을 갖고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낱 어린아이처럼 여겨져도 괜찮습니다. 세리도 괜찮고, 창녀도 괜찮고, 문둥병이나 귀신에 의해 고통 당하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약속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단순히 <작은 자에게 잘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가 <작은 > 불과하다고 깨닫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 자의 하나님>, <높은 자의 하나님>, <대형교회 목사들의 하나님>, <직분자들의 하나님> 아니라, <작은 자의 하나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먼저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의미입니다.

 

다시 제가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 처음 돌아왔던 이야기로 돌아가봅니다. 이후로 저는 차근차근 신앙의 여정을 밟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밟아온 신앙의 여정은 결코 무탈하고 평탄한 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씨름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안의 음란과 혈기가 신앙으로 해결되지 못하여 자책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씨름하며 고통스러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 교회를 방황하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신앙생활을 적도 있었습니다. 기꺼이 교회에 적응하려고 애를 써봤지만 결코 적응하기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갈려고 했지만 결국 들어가기까지는 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목사안수를 받기까지의 여정도 조금 돌아왔고, 더군다나 작년에 1 정도 쉬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보니 인생은 고통입니다. 인생은 아픔입니다. 인생은 눈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갈등입니다. 신앙은 의심입니다. 신앙은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아픔과 눈물 가득한 인생이지만 길게 보고 멀리 보면 복된 인생입니다. 어떻게든 버텼고 이겨냈고 많이 성숙했습니다. 길게 보고 멀리 보고 크게 보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갈등의 연속이며, 의심의 연속이며,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들이 가득하지만, 멀리 보고 크게 보면 결국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출발은 모두 <작은 >입니다. 신앙이 부족하고 모르고 인격도 성숙되지 못한 한낱 죄인에 불과한 존재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치 세리에서부터 시작한 마태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기나긴 세월 속에서 성숙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결국 복음서를 남기는 마태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앞으로 많은 고민을 하게 것입니다. 갈등과 의심을 수백번도 겪게 것입니다. 때로는 찾아오는 하나님의 부재 앞에 몸부림을 치기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작은 > 하나님,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시는, 그래서 결국 인생의 끝날에는 우리의 귀한 신앙고백을 받아내고야마는 <작은 자의 하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