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모험

2021. 8. 14. 19:56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농담이 있습니다.

 

대학교를 막 나온 친구들은 “난 이제 내 분야에 있어서는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석사를 막 나온 친구들은 “내가 이 분야에서 공부를 좀 해보니 모르는 것들이 꽤나 있음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를 막 나온 친구들은 “생각보다 이 분야에서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교수가 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얘기하는 것들을 학생들이 믿더라”고 말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성경과 기독교를 오랫동안 공부하는 한 사람인지라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정말 성경의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많음을 느낍니다. 막 전도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정말 아는 것이 많다고 스스로 자부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지식이 생각보다 많이 없음을 더욱 깨닫습니다.

 

공부만 그럴까요?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 저는 빌 게이츠, 손정의, 제리 양과 같은 IT업계에서 홀홀 단신으로 성공을 거뒀던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저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성공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 어린시절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 또한 저들처럼 어린 나이에 도전하고, 또 삶을 컨트롤 하고, 몇 가지 삶의 기술을 발휘하면 성공하고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다고 삶에 능숙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성공했다고 한들 남들 또한 성공시킬 수 있는 비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인생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면 무엇 때문에 이런 유의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할 때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나이가 먹으면서 나만 모르는게 아니라 남도 모른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역설적으로, 정말 모르니까, 모르는게 많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되니까, 나나 다른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니까, 조금 편해진 것 같긴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을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1절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유의미한 단어는 <그 일 후에>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바로 눈치챌 수 있습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25년이나 기나긴 씨름을 해왔습니다. 때로는 자기 혼자 살아남겠다고 자신의 아내를 다른 정치지도자들에게 빼앗길 뻔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생겨나질 않자 자신의 심복을 입양하려고도 했습니다. 또한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아이가 생겨나질 않자 첩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의 씨름이 끝난 이후에 25년의 세월이 지나 100세가 되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서 나온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덧붙여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많은 일들이 순적하게 풀려가며 문제 없이 평탄한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그 일 후에>는 25년이나 기나긴 씨름을 끝낸 아브라함의 인생이 <꽤나 길게 잘 풀려가던 어느 시점에>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대략 이 때의 이삭의 나이를 사춘기 정도로 추정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10-15년 정도는 무탈하게 아브라함이 잘 살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이 잘 풀려가고 있는데 사건이 생겨납니다. 마치 드라마 같습니다. 드라마라면 이는 분명 안좋은 징조입니다.

 

덧붙여 우리는 2절에서 유의미한 단어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는 단어입니다. 원어인 히브리어의 어순을 따르자면 <아들, 그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이삭>이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느낌을 좀 살려서 의역을 하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져와라. 아들을 가져와라.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가져와라. 사랑하는 아들을 가져와라. 이삭을 가져와라.> 의역된 문장을 중심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감정이입을 해보십시다. 문제없이 순적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대의 랍비들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미드라쉬>라는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삭과의 대화로 재구성합니다.

 

하나님 아브라함
가져와라 아들을!  아들이 둘인데 누구 말입니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아들은 자기 어미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며, 
저 아들은 또한 자기 어미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데요?
사랑하는 아들을! 제가 두 아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이삭 말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 신기합니다.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어나자마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리아산으로 여정을 떠날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제삼일에” 모리아산까지 이르는 여정이 꽤나 길었던 모양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봅시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이 사흘 동안 깊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갈까, 하나님께 대들어볼까, 왜 이런 요구를 하실까 또한 다시 4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사흘의 고민이 어느정도 정리될 무렵 그는 모리아산,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 밖에 없는 이삭을 바쳐야 할 그곳을 바라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생각이 정리된 거 같습니다.

 

-

 

아브라함이 떠난 사흘길은 모험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납득하는 모험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신뢰하는 모험입니다.

 

사흘 동안 걸어가며 했던 수많은 깊은 고민들,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 오래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흘 동안 길을 걸어가며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차근차근 복기했을 것입니다.

 

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의 하나님, 

끝끝내 자식을 주시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의 아내를 다른 권력자에게 빼앗길 뻔했을 때 극적으로 도우셨던 하나님,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을 낳고 좋아하던 자신에게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을 주시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끝끝내 얻게 된 아들 이삭을 (약속하신대로) 사라에게서 낳게 하신 하나님. 

 

그가 떠난 모험 결국 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결코 납득할 수 없음에도, 끝내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하신 바를 끝내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또한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하신 바를 끝내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음에도 신뢰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모리아산을 향해 사흘을 걷는 모험이 이룩한 성과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저를 둘러싼 많은 상황들이 결코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는지, 왜 나는 남들보다 키의 성장이 느린 것인지, 왜 나는 남들보다 힘이 없는 것인지, 왜 우리집은 돈이 없는 것인지. 

 

신앙을 갖고 나서도 저는 많은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인지, 왜 하나님은 내게 소명을 부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가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제 인생의 많은 것들을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저 또한 사흘 길의 모험을 떠났습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걸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납득할 수 없었다고 걸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흘 길의 모험을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와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는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사흘의 여정을 걸어가는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앙의 모험을 떠난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욥기는 의도적으로 욥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과장해서 표현합니다.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처럼 설계대로 딱딱 욥의 인생이 망가집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속담 또한 여기에 발붙일 수 없습니다. 저주 혹은 재앙과 같은 단어만이 욥의 상황을 그나마 해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욥에게 찾아온 친구들은 욥이 겪는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논리적이고 말끔한 문장으로 정리해보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이해한 바를 욥에게 납득시켜보려고 했습니다. 욥기 3장부터 시작된 논쟁은 37장에 이르기까지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 욥이 겪은 상황을 두고 친구들이 나름 꾸며낸 이유들은 조악했습니다. 신앙적 표현을 위장한 천박한 논리들을 결코 욥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는 욥에게 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 이해하지 않더라도 다 납득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지 않겠냐”

 

고대철학자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알려지는 유명한 라틴어 경구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걸어야 해결된다”라는 말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질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해하려고 해봤자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 아무리 납득하려고 해봤자 납득할 수 없는 문제들이 분명 우리 삶에는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전통에서는 삶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를 만났을 때 이 라틴어 경구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걸어야 해결된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이해하기를 멈추라는 말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납득하기를 멈추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문제를 끌어안고 걸어가야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정을 감행했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끌어안고 모리아로 걸어가는 여정을 감내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여정 끝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끝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

 

세상은 이해할 수 있어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대사회는 묻고 따지며 어떻게든 돌다리도 두드려봐서 검증하고 이해하고 해명된 이후에 신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따지자면 이는 <신뢰>이지 않습니다. <신뢰>는 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용기를 내어 감행하는 모험입니다. 

 

특별히 돌이켜보면 제 스스로가 가장 신앙이 좋았던 때는 바로 20대 초중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턱대고 일단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모든걸 사르겠다는 열의가 충만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비결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고난을 당하면 고난의 이유를 저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복을 받으면 그 복받은 이유를 저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습니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가 고난을 당할 때 저는 목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고난을 당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복을 받을 때 저는 목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을 받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 섬기고 있는 교회 공동체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제 삶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들, 왜 일어나는지 솔직히 잘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이 쉬워졌습니다. 예전에는 궁금해서 미칠 것 같고 어떻게든 그 이유를 알려고 애를 썼다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잘 몰라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사흘 여정이 꼭 그랬을 것입니다. 애초에 여행을 시작한 하루는 “왜?”라는 질문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날에는 “잘 몰라도 되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채웠을 것입니다. 

 

사흘 여정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볼 때 우리 삶에서 선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으시고 여전히 신뢰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굳이 “왜?”라고 묻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

 

우리의 삶에는 앞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무수한 일들이 반복될 것입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모르겠다”는 말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걸었던 사흘의 모험을 기억해보십시오.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변의 돌아가는 흐름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아 보일 때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과, 환경과, 우리들의 인생 너머에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변덕스러운 상황과 환경과 인생에 마음을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 너머에 있는 변치않으시는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속으로 밀어넣으셨습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하는 모험을 감행했을 때 그가 깨달았던 사실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다 납득할 수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면으로, 온라인으로 함께 말씀 앞에 선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이해할 수 없는 인생길 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납득할 수 없는 인생길 끝자락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걷는 오늘 이 현실은 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들은 다 납득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걸으십시오. 모험을 감행하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모험,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납득하기를 포기하는 모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을 걸어나가십시오.

 

우리는 그 모험의 끝자락에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우리 삶 전체를 이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