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일반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말 그대로 <취업을 위한 공부>의 전선에 저 또한 서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제가 나온 한국해양대학교의 취업전선을 떠올려보면, (남자기준으로) 03학번 정도부터 취업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점점 어려워졌고, 08학번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딱 중간이라 할 수 있는 05학번이었습니다. 취업이 잘되는 학과라서 대학교 4년 내내 놀기만 했던 저는 취업이 썩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당시에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일은 한 번 해봐야되겠다>라는 생각만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에, 어떤 분야에 취업할 것인지에 대한 목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취업은 난망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저는 선교단체 동기와, 후배들과 함께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취업전선에서 분투하던 4학년들이 모여서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워낙 취업이 난망하니 서로가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나오잖아? 야곱은 뭘 하지도 않았는데 선택을 받고 왜 에서는 뭘 하지도 않았는데 버림을 받았을까?”, “이스마엘이 하갈에게서 태어난 것은 이스마엘의 잘못이 아니잖아? 이삭이 사라에게서 태어난 것도 이삭이 잘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이삭이 선택받은걸까?” 농담삼아 서로가 던지던 질문의 끝은 분명했습니다. “어차피 인생사 다 정해져있다며 서로 공감하며 웃었습니다. 취업난으로 힘든 시기에도 취업을 잘 하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고, 취업이 잘된다고 하던 시절에도 취업을 잘 하지 못하고 자리를 못잡아 힘든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탄을 섞은 농담을 서로 주고 받다가 어차피 인생사 주어진 인생이니 열심히 살아보자하고서는 각자 도서관에 가서 취업준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농담삼아서 후배들을 놀릴겸 불러서 그런 얘기를 해줬죠. “어차피 노력해봤자 에서는 안되고, 어차피 사기를 치더라도 야곱은 잘되는게 우리 인생이야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대학생 4학년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게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땐 꽤나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뭔가 노력하고,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기만 하면 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진다고 믿었던> 인생을 살다가 처음으로 <노력해도 안될 것만 같은 인생의 벽>을 느낀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여기 모인 대다수의 분들보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하루, 또 하루 살면서 와닿는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고… ” (전도서 3장)

 

우리의 인생을 마치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에게 죄와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할 것,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것, 네 이웃을 돌보며 살아갈 것을 촉구하니까요. (분명 우리는 정해진 운명의 노예라고 보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정해진 운명>은 아니더라도, 마치 우리가 어찌 넘을 수 없는 인생의 견고한 벽이 느껴지곤 합니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아시나요? 설렁탕집에서 고기가 덜 나왔다는 등등의 사소한 일에만 분노할 뿐, 세상의 권력과 불의에 대해 분노하지 못하는 비겁한 자신의 모습을 탓하는 시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되내입니다.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인생의 나날이 반복될수록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크신 하나님에 비해 우리의 인생이 너무 작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광대하심에 비해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결심이,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기도가 지극히 작고 사소하다는 사실입니다.

 

-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2장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치유의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먼저 등장인물 중에는 <네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명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치유를 부탁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들이 방문한 곳은 어딜까요? <>입니다. 다른 곳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 나아가면 자신들이 들고 온 한 명의 <중풍병자>가 치유를 받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명의 <중풍병자>를 위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심합니다. (4)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이번에는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은 (2) , 즉 진리를 설파하고 계셨습니다. 모여든 다수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즉 치유를 받기 위한 사람들 혹은 축귀를 받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도를 듣기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뻥 구멍이 뚫립니다. 그리고 한 침상이 내려옵니다. 침상에는 중풍병자가 누워있습니다. 아마 당황했을 것입니다. 지붕을 뜯어내고 침상을 내렸으니 빨리 중풍을 고쳐서 이 사람을 내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아하게도 바로 중풍병을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5절)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를 가르치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죄사함을 선포한 예수님의 말씀은 <>를 가르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다>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회중에게 설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역사는 20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 신앙의 역사까지 합친다면 짧게봐도 2500, 넓게보면 3000-40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전기도 없었는데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살아갑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에 살던 그 어떤 지식인들보다 우리가 더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접하고 또한 익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와 지식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지나면서, 시대가 변화하고, 가치관이 변해왔습니다. 시대가 변하는만큼 기독교도 발맞춰 변했습니다.

 

시대가 변할때마다 기독교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스스로를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본가치만큼은 보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는 마치 따지자면 <번역>과 같습니다. (예컨대) 영어 Hi를 번역하면 안녕이라고 해야할지 안녕하세요"라고 해야할지 어이라고 해야할지 사실 모호합니다. 문맥을 살피면서 깊이 고민해야겠지요. 기독교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는 과정도 유사했습니다. 그때마다 기독교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본질이 무엇일까? 우리가 다른 것은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시대마다 답변은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윤리적 가르침>이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산상계명과 같은 윤리적 가르침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종교의 신비>가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영혼을 울리고 깨우는 영성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의 변화양상에 따라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달라질 수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우리 또한 다시 한 번 우리가 보존해야 할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포로기 이후 쏟아져나온 예언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비판하는 대다수의 모습은 <비윤리적 행태>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빈부격차를 방치한 모습을 하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윤리적 행태>를 지적하는 예언자들의 기저에는 결국 무엇이 깔려있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깔려 있습니다. 특별히 호세아서의 경우에는 (6:6)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성경 대다수의 이야기들이 <하나님 아는 것>의 맥락에서 잘 이해되곤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배운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광야를 배회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배운 것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태곳적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이유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보적으로 성경의 많은 문맥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본질에 준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단순히 기도하는 것, 제사드리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수의 성경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

 

이런 맥락에서 다시 오늘 성경본문으로 돌아와봅니다. 뜬금없이 지붕 위로 떨어진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때에 (6) 어떤 서기관들이 마음 속으로 (7) “신성모독이로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셨습니다. (8) “중심에 아시고라는 단어는 원어로 직역하자면 영으로 아시고입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처럼 영으로 서기관들의 마음 속 말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9)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한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 모여든 많은 사람에게 를 가르치셨습니다. <>의 결론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풍병자를 바로 치유하지 않고, 그의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집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서기관의 말과 엮어서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이 바로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단순히 말씀을 잘 하시는 분도 아니고, 귀신을 잘 쫓아내시는 분도 아니고, 병을 잘 고치시는 분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님이란 시각을 통해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 계신 곳은 <>입니다. <>에서 지붕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아온 사람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곳, 죄사함이 있는 곳, 더 나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즉 사람이 몰린 이 작은 집은 <성전>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한낱 작은 집에 불과해보이지만 그곳이 사실은 성전입니다. 또한 한낱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보이지만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그곳이 성전이라는 사실과,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말씀을 앞장서서 가르치는 서기관들조차 모르는 비밀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떻게 역사를 끌어가시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붕이 열리고 죄사함이 선언되는 성전에서만 재현되는 그 광경의 신비를 못 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

 

당시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면서 많은 이들이 성전을 <타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아직은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성전을 대신해서 한 작은 집이 성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성전에 오시지 않는 하나님이 한 작은 집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합니다. 지붕을 뜯어 내리고 중풍병자를 내린 네 사람의 믿음 위에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려서) <하나님 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라졌다고 느끼곤 합니다. 혹은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에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우리를 징계한다고 느낍니다. 혹은 교회가 한때 부흥했다가 오늘날처럼 축소될 때에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광대하심에 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이 작을 뿐입니다. 우리의 식견이 미천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의 신묘막측함을 다 헤아리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은 우리의 예상과는 별개의 상황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를 들려줍니다. 더 나아가 이를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눈치채지도 못하는 서기관의 우매함을 함께 들려줍니다. 이는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인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기존의 통념과 상식 바깥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는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일천하여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뿐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들리지 않을 뿐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끌고 가시는 과정이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모를 때는 단 하나의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겸손>입니다.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미처 다 가늠할 수 없는 나의 작음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막 10:31)

 

우리는 코로나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측되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많은 것이 바뀔 가능성이 높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입각하여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 앞에 겸손하는 길 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얄팍한 경험에 근거하여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려는 자는 모두 나중된 자가 될 것입니다.

 

반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겸손함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청종하며 따라가는 자는 누구나 주님께서 처음 된 자의 자리로 불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