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02]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적

2021. 6. 13. 01:40

지난 주에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0대 중반의 국회의원 경험도 없는 정치인이 보수정당의 당대표가 된 사건입니다.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는 <공정>입니다. 그가 내세운 가치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또한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그만큼 오늘날 한국사회는 <공정>에 목말라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를 당대표로 만들어준 새로운 세력인 젊은 남성들은 그만큼 <노력한만큼 대가가 없는> 현실 속에 지쳐있다는 말일 것이며, 적어도 노력한만큼의 대가가 있는 사회를 열망한다는 말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7차교육과정의 첫 세대입니다. 제 이전에도 독특한 수능전형이 간혹있었지만, 저희부터 독특한 수능전형이 매우 많이 생겨났습니다. 예컨대 부산대의 경우에는 수능 중에서 국어/수학/영어 중의 아무 과목이나 두 과목과 탐구영역의 두과목 점수로 대학입시를 결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고자 했던 금오공과대학교의 경우에는 수학과 탐구영역의 두과목 점수로 입시전형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다들 첫 세대라 고민이 많고 망설임이 있던 시절, 저는 나름의 도전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시점이었습니다. 지금껏 공부해왔던 <영어>는 아무리 공부해도 노력한 시간만큼 효율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반면 지금껏 공부해왔던 <수학>은 나름 공부하는만큼 성적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영어공부를 올스톱하고, 수학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을까요? 수학은 모의고사로 4-5등급을 전전하던 제가 모의고사에서 1-2개 틀리는 결과를 얻기도 했습니다. High Risk, High Return에 도전했고 결국 성과를 얻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저의 일취월장하는 수학점수에 놀라기 시작했고, 모범생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점수가 낮은 이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망했습니다. 3등급과 1-2점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점수이긴 했지만 4등급을 맞았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수학과 과학탐구영역을 통해 원하던 학과를 갈 수 없을 정도의 낮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저는 수능을 치기 전에 넣어놨던 수시원서가 통과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부터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내신점수의 덕택으로 한국해양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노력한만큼의 결실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의 날, 결실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저는 제가 원하던, 바라던 곳보다 훨씬 좋은 곳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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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본문으로 돌아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부터 15절까지는 흔히 <천국의 상급> 이야기로 알려져있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지난주에 언급했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소피아>, 이른바 지혜를 숭상하는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이들은 세속적인 문화와 욕망과 매우 유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 더 많은 부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줄을 서서 권력과 부를 조금이나마 얻고자 하는 고린도의 문화를 고스란히 닮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고결하고 숭고하다고 생각되는 아볼로에게 줄을 섰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방언, 예언을 비롯한 온갖 은사를 체험했고 이를 통해 <소피아>를 얻었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바울은 흥미로운 은유를 가져옵니다. 건축가의 은유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참고로 <건축가의 은유>는 지혜를 추구하던 당대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은유였습니다. 터를 닦고 차근차근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깨달음과 능력을 얻어가서 점점 높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더 고결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흔한 <소피아>를 쫓던 고린도인들이 생각하는 은유와는 정반대의 은유로 바울은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바울의 도전적인 은유를 들어보십시오.

 

(마치 소피아를 추구하는 고린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바울은 똑같이 사용합니다.) 각자가 금을 쌓습니다. 은을 쌓습니다. 각종 보석을 쌓습니다. 혹 누군가는 나무와 풀과 짚을 쌓습니다. 아마도 고린도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방언, 예언과 같은 온갖 성령의 은사로 쌓아올리는 자신의 삶을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면 그로 말미암아 정말 멋진 건축물이 만들어졌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그 날이 공적을 밝힐 것인데 불로 태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불로 태워서 남는 공적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날까지 남게되는 유일한 <상급>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쌓아올린 건축물, 그리고 공적에 대해서 말하던 바울은 얼굴을 싹 바꾸고, 말투를 싹 바꿔서, 논조를 변경해서 말합니다. (16-17절)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성전>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뭘하고 있나요? 성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서로가 아볼로파로 나뉘고, 바울파로 나뉘어서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볼로파는 스스로가 아볼로라는 영적 거인에게 줄 섰기 때문에 온갖 소피아를 경험하고, 그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경험들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거하시는 곳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 말은 무엇일까요? 

 

고린도교회 모든 구성원들이 지금 잘못된 건축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불에 타버릴 것인데 한낱 풀과 나무와 짚으로 건축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대로 계속 건축을 진행한다면 고린도교회 교인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이 모두 활활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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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서 자주 써먹는 혹은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문장입니다. 부가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문장입니다. 그러고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의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다>입니다. 말 그대로 방향의 어긋남을 말합니다. 이를 잘 묘사하는 이야기가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던 과거의 삶으로부터 추방당합니다. 다시금 돌아갈 수 있는 동산 동쪽의 문은 닫혀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 계신 서쪽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결국 문은 닫혀버리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동쪽은 하나님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성경은 첫 시작부터 인류를 <방향을 잃어버린 존재>로 규정합니다.

 

에덴동산 이후의 서사는 매우 화려하고 발전적인 문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축을 치는 방법을 배웁니다. 악기를 다루는 방법을 배웁니다.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법을 익힙니다. 성 또한 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류는 하나님을 떠난 이후에도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힘껏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지적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 이른바 올바른 방향을 되찾지 못한 인류의 성실하고 열심인 삶 자체가 그릇되다는 겁니다.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을 배워가고 문명을 일궈나가던 인류에게 내려진 최종적인 결론은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말 그대로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찾아와, <여기에 길이 있다>고 말해주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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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돌아가야 할 <바른 방향>은 어디일까요? 바로 <은혜>입니다.

 

아볼로에게 속한 교인들이 <소피아>를 추구하며, 영의 은사와 능력에게만 매몰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단순합니다. 명료합니다. 은혜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사와 능력을 경험한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볼로를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가 은사와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수행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우리가 힘껏 소피아, 지혜를 추구하고 또 갈망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은사와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더 많은 것을 얻고, 쟁취하고, 경험하려 애를 씁니다. 역설적으로 이는 고린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쌓아올리는 건축물에 한낱 나무와 풀과 짚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목회자 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고 부흥하며 유지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이들이 있습니다. 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탁월한 판단력, 자신의 지혜, 자신의 공부, 자신의 스펙이 이 교회를 유지한다는 허황된 생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평신도 지도자라고 다를까요? 사업을 통해 익힌 탁월한 판단력, 자신의 재능으로 쌓아올린 부를 통해 헌금하는 재원, 또한 교회 적재적소에서 지혜와 힘을 발휘하여 섬기는 자신의 희생정신이 이 교회를 유지하게 만드는 동력이라 착각합니다. 내가 <이걸 했기 때문에> 교회가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나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3대째 신앙이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기도를 빼먹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봉사를 빠짐없이 해왔기 때문에, 다른 누구와는 달리 여태껏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는 착각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는 낮은 곳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가난한 자가 노력해서 부자가 되는 것, 무식한 자가 노력해서 유식한 자가 되는 것, 마찬가지로 신앙심이 부족한 자가 노력해서 신앙심이 깊은 자가 되는 것이 세상의 원리요,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의 기초는 <은혜>라고 말입니다. 복음은 내가 노력해서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100% 철저한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100% 하나님만이 행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나를 믿게끔 설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여태껏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이유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신앙심이 깊어진다는 것은 노력을 통해 <신앙의 원리>를 습득하거나, <신앙의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조금씩 경험해나가며, 우리의 높아진 마음이 점차 낮아지는 과정입니다. 이는 마치 두발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탄 아이가 <자전거 탄 자기 실력>에 감탄하다가 두발자전거에 달린 보조바퀴의 은혜를 발견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내가 했고, 내가 쟁취했고,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차근차근 발견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스스로를 순복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신앙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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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올바른 것을 세우라고 촉구하는 바울의 맺음말은 간명합니다. (18-21절)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면, 즉 소피아를 쫓아 살게 되면 그건 결국 어리석은 삶이나 다름 없다고 말합니다.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어리석음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은 무엇인가요? 십자가입니다. 예수입니다. 즉, 은혜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2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십자가의 눈으로, 예수의 눈으로, 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만물이 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2절이 말합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게바로 표기된) 베드로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세계, 생명, 사망, 지금 것, 장래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추구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바로 (23절)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복음의 역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만난 모든 사람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 모든 것이 은혜며,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방증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님이 선물하신 모든 것들로 채워져있습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 삶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선물이라 깨닫는 삶과 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소피아에 몰입해있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에 몰입해있는 아볼로파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얻은 은사, 능력, 성령의 경험, 이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방증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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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흔히들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공적을 쌓아 그에 근거하여 공정하게 판단받아 <상급>을 얻는 내용으로 해석되어온 본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정말 의미하는 바는 <소피아, 지혜>를 추구하며,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추구하며, 역설적으로는 <자기 힘>으로 신앙을 쟁취하며 이를 통해 영적 계급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위로 올라가려고 애써봤자, 더 신앙적인 사람, 더 믿음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봤자,  역설적으로 이는 교회 공동체를 깨트리는 행위라는 경고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권면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것을 권면합니다. 예수를 붙잡을 것을 권면합니다. 은혜를 붙잡을 것을 권면합니다. 경험한 은사와 능력, 좋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라는 겁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깨달으란 겁니다. 제가 전도사가 된 이유는 여러분보다 신앙이 좋아서입니까? 여러분보다 똑똑하고 말을 잘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신앙이 나빠지는 즉시 전도사를 그만두어야합니까? 말이 어눌해지고 공부를 못하는 동시에 전도사를 그만두어야합니까?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거저 하나님이 베푸신 것입니다. 똑똑한 것도 은혜이며, 신앙이 좋은 것도 은혜이며, 신앙이 좋지 않고 의구심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쌓아올릴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유일한 신앙의 공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 외에는 없습니다. 개그의 은사가 있다면 여러분이 노력해서 개그를 잘 친다고 생각하지마십시오. 하나님이 개그치는 은사를 주셨기에, 공동체를 위해 웃겨주십시오. 요리의 은사가 있다면 여러분이 노력해서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손맛의 선물을 주셨기에, 코로나가 끝나면 공동체를 위해 고기를 구워주십시오. 또한 공동체를 위해 섬길 때에도 <그래도 내가 실력이 되니까 섬기지>라는 생각에 너무 몰입하지 마십시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사를 주셨지>라는 생각으로 반복적으로 환기시킵십시오.

자기의로 세워진 교회는 곧 무너집니다. 또한 자기의로 세워진 신앙은 곧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즉 어리석음으로 세상의 소피아, 즉 지혜를 정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은혜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은혜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앙을 세워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고백, 우리의 신앙을 든든히 세워나가는 고백이 있다면 바로 이 고백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저 또한 은혜를 나눌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 한 구절을 인용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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