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01] 아볼로의 공동체와 바울의 공동체

2021. 6. 6. 02:34

한국 개신교가 가장 정점에 있었을 때가 2007년 어간입니다. 당시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100주년 기념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성령, 부흥이라는 키워드가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작은 지역교회들 또한 성령 혹은 부흥이란 키워드의 설교를 했고, 기도를 했고, 나눔을 했고, 관련된 책을 읽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작 신앙생활을 시작한 5년도 채 되지 않았던, 성령과 은사에 대한 경험이 없던 저에게 <Again 1907>과 관련된 집회, 운동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우리 마음 가운데 은사와 능력을 부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예전의 도덕적/영적 권위를 회복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곤 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은 단번에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신앙여정은 사실상 방황의 여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2011년 후반기까지 저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갈망했습니다. 적어도 저의 삶은 1907년 평양 대부흥의 100주년 기념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름 방황하던 성과는 있었습니다. 은사를 경험했습니다.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기도의 신비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바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 더 나아가 성령의 임재는 결국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세 사람의 기도 모임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시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것이 내가 속한 교회, 지역사회, 온 도시까지 파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술집이 문을 닫고, 시험 커닝과 같은 부정행위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사라지며, 도덕적이고 영적인 분위기가 우리를 감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경험하면서 성령의 임재가 일으키는 부작용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영험한 무당을 찾으러 나서는 모습이, 신령한 목사를 찾으러 나서는 저의 모습 속에 있었습니다. 영험한 목사의 기도 한 번을 받기를 갈망하는 저의 모습이, 신령한 무당에게 굿 한 번 받기를 원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령을 쫓았고, 은사와 능력을 경험하길 원했던 저의 신앙은 강력한 신 중의 신인 여호와를 섬기는,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는 영험한 무당을 쫓는 신앙으로 귀결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가 꿈꾸는 삶의 모습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험한 능력으로 사람들이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부흥사가 되길 꿈꿨습니다. 제가 강단에 서면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교회를 사로잡는 그런 꿈을 꾸곤 했습니다.

 

어느새 저는 신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신적인 능력과 신적 권위를 부릴 수 있는 영험한 마법사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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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는 말 그대로 고린도 지역에 있는 교회를 향해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먼저는 좀 넓게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당대 로마제국의 식민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더군다나 신도시였습니다. 오늘날 신도시의 문화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1년 새롭게 들어선 지역의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그 지역에 살던 주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파트였습니다. 더군다나 대부분이 30-40대가 아니면 노후를 보내러 온 이들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사는 아파트였습니다. 매우 활기찬 면모가 있었습니다. 반면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무질서한 면모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좋게 보면 이를 역동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요.

 

고린도 지역은 매우 돈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상업화된 도시였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방인이었기에 질서가 없었습니다. 매우 발전적인 도시였던만큼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양이 없고 사회적 배려가 부족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오늘날의 발전적인 신도시의 모양새입니다. 다들 돈을 벌려고 몰려온 이방인들입니다. 도시는 활발합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구심점이 없습니다. 주민들 사이의 따스하고도 끈끈한 결속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나치게 경쟁적인 만큼 모두들 정신적으로 황폐함에 시달립니다.

 

정신적인 황폐함을 채워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종교>입니다. 특별히 도시의 황폐함을 채워주는 종교 중의 하나는 <보편종교>가 아닌 <사이비 종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보십시오. 톡 까놓고 말하면 매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에는 매력이 있을까요? 성당에는 매력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나치게 보편적이고 물에 물탄 것 같고 술에 술탄 것 같은 그런 맹탕인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신천지> 혹은 <하나님의 교회> 혹은 똑같은 사이비라고 부르긴 뭣하지만 이단성이 짙은 <인터콥>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특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구원받았다>,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바깥사람들은 모른다>는 특권 의식이 도리어 그들의 공허한 자의식을 채워줍니다. 도심지의 치열한 경쟁이 앗아간 공허한 자아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바로 이런 유의 사이비 종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만 구원받았다>,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바깥사람들은 모른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20대 성령을 좇아 방황하던 저와 유사했습니다. 그 어떤 누구보다 영적 체험을 갈망했습니다. 영으로부터 오는 은사와 능력을 사모했습니다. 성령 체험을 통해 오는 자유와 해방을 사모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곤 했습니다. 더 나아가 특별히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습니다. 영의 강력한 체험을 통해 그들은 남녀차별이 팽배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자유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영의 체험 안에서 그들은 남/녀의 구도, 성공한 사람/실패한 사람의 구도가 아니라, 영을 받은 사람/영을 받지 못한 사람의 구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특정 지도자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A라는 목사보다 B라는 목사가 더 신령하기 때문에, A목사의 설교는 듣지 않더라도 B목사의 설교는 듣는 이들과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신령한 지도자에게 줄을 설 때에, 더 강렬한 영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짜릿하고 충만한 영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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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아볼로와 바울이었습니다. 유명한 구절인 3장 6절을 보면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한 번 상상력으로 당대의 교회 상황을 그려봅시다. 바울은 심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교회 개척 당시에는 바울이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후일에 아볼로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1장 12절을 보십시오. 각자 자신이 속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네 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눈으로 보고 배운 지도자들은 둘 밖에 없는데 왜 뜬금없이 게바와 그리스도가 등장할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바울이냐 아볼로냐를 놓고 다툰 것으로 보여집니다. 게바 혹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표현은 중립을 지키겠다는 수사적 표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안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린도전서>를 쓴 <바울>이 겨냥하고 있는 이는 바로 <아볼로>입니다. <바울>과 <아볼로> 사이의 미묘한 논쟁이 바로 고린도전서의 핵심 내용입니다. 아볼로는 앞에서 말한 <우리만 구원받았다>,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바깥 사람들은 모른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이들의 수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들은 헬라어로는 <소피아>, 이른바 <지혜>에 몰두했습니다. <지혜>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며, 이 과정에서 그들에겐 온갖 은사를 비롯한 영의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그들은 점점 더 특별하고, 존귀한, 신적 지위에 속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볼로>라는 영적 지도자에게 줄을 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유의 생각에 단호하게 대적합니다. 1장 17절, 그는 <소피아>에 속한 말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이사야 말씀을 기록한 1장 19절을 보십시오. <소피아>에 속해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소피아> 자체를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합니다. 바울의 구상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아볼로>편에 서서 <영>을 받고 그 자유함과 해방을 누리려는 무리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사이비적이고 이단적이란 겁니다. 짜릿하고 충만한 경험이 여성으로 겪는 삶, 이방인으로 겪는 삶, 성공하지 못해서 우울하고 떨리는 삶을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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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 사람이 모이면 공동체가 됩니다. 두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공동체의 이념이 됩니다. 공동체의 이념은 다시 두 세 사람이 모인 공동체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코인투자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면 각자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돈을 벌 수 있는 독보적인 길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들의 이념이 공동체의 문화를 규정합니다. 돈을 잃은 사람이 많지만 돈을 버는 사람들의 간증만이 통용됩니다. 마법의 구호인 <영차, 영차>를 외치며 <존버>를 다짐합니다. 생각보다 암묵적으로 형성되는 <이념>이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지역교회에는 암묵적으로 형성되는 <이념>이 있고, 그 <이념>에 기초한 <문화>가 있습니다. 

 

바울이 아볼로의 말을 따르는 이들을 경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아볼로와 권력다툼을 했던 것일까요? 물론 그런 면모가 없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볼로를 따르던 이들의 이념은 <소피아>에 가까이 가는 사람, 이른바 영적인 은사와 능력을 많이 경험한 기준으로 사람들 사이에 계층이 생겨납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는 <돈>을 중심으로 계층이 나뉘어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계층을 유지하는 방법은 <돈> 많은 사람 혹은 <권력>이 높은 사람들에게 줄을 서는 문화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돈>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문안인사를 갔고, 그로 말미암아 떨어지는 떡고물을 먹는 것이 그나마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더 나은 <계층>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를 따르는 이들은 분명 자신들이 <소피아>를 추구할 때 떨어지는 <영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의 경험은 자신들의 성공하지 못함과 성별 혹은 신분에서 오는 차별적 지위로 부터 오는 불안과 우울감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겁니다. 세상에서는 한낱 하층민 가정의 아낙네라 할지라도, 은사를 통해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면서 오는 해방감, 자유,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는 그들의 모습이 세상을 꼭 닮아있었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에게 줄 서는 것처럼 <영의 경험>을 가진 아볼로에게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더 높은 계층을 위해 줄을 서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더 높은 계층을 위해 아볼로에게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세상의 문화인 줄을 서고, 계층을 나누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교회 안에서, 새롭게 줄을 서고 있었으며 계층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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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꿈꾸는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저는 2019년 그러니까 지난 교회에서 마지막 사역을 마무리하던 무렵에 잠깐이나마 <개척교회>를 그려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장애가 있는 친구의 방문이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제가 섬기던 교회의 지하철역에 내렸습니다. (왜 내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인터넷에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교회를 검색했고, 자연스럽게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청년부 담당자를 바꿔 달라고 해서 저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바쁜 상황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니 말도 더듬거리면서 자꾸 쓸데없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사실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더군다나 그날은 전도축제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은연 중에 저는 그 친구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조금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바쁜 일들을 다 사과하면서 다른 분들께 맡기고는 직접 그 친구를 데리러 나갔습니다. 척추뼈를 다쳐서 걷기가 힘든 친구였고, 그로 말미암아 매우 예민한 친구였으며, 더듬거리지만 표현도 매우 명확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데리고 와서 청년부 친구 초청 잔치를 하는 카페로 모셔다 놓고는 한 친구에게 카드를 맡기며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 함께 밥을 먹고 오라곤 부탁을 했습니다. 바쁘게 그 하루가 지나간 이후에 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장애가 있는 친구가 교회에 오는 것이 <장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창녀와 세리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친구 삼으셨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청년부를 담당하면서 무척이나 힘든 시절이었는데, 그 친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주던 청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뭔가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그 어떤 문제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차별>받지 않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입니다. 소극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교회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차별>을 폐지하려 애쓰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체에 문제가 있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건, 그와 상관없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교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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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울이 꿈꾸던 교회, 바울이 힘껏 외치던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헬라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이 모두 하나이며 차별이 없다>는 주장이 바울의 반복되는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그 어떤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예컨대 율법이나 계급이나 성별을 비판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울의 특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바울에게 <소피아>를 숭상하고, <영적 경험>을 숭상하는 이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차별을 조장하는 무리>입니다. 그들의 깊은 성령경험이 <하나님 앞에서 특권>이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세력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피아>를 숭상하는 무리를 향해 말합니다. (1장 21절을 보십시오) <소피아>와 대척점에 있는 <모리아> 즉 미련한 것의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세상의 <소피아>에게 아무리 가까이 가봤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모리아>,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복음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소피아>, 즉 하나님을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 <소피아>가 아닌 <모리아>에게서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모리아> 중의 <모리아>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이방인이 <모리아>라고 비웃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이렇게 방점을 찍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소피아>를 숭상하는 무리에게 일련의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전했던 복음은 <소피아>가 아닌 <모리아>라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모리아>가 인간과 세상의 <소피아>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이 그의 복음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꿈꾸는 교회의 원초적인 모습이 소개됩니다. (25-28절) 교회 안에는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내용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거룩했기 때문에, 의로웠기 때문에, 아볼로에게 줄을 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야기이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않았고, 의롭지 않았고, 그 어떤 누구에게도 줄을 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사 자격과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신 이야기가 바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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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알짬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이 교회의 문화를 형성할 교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2장 2절)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독특한 주장입니다.

 

아볼로에게 줄을 선 이들의 <소피아> 이데올로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내부자와 외부자가 구분됩니다. 아볼로에게 줄을 선 자들과 아볼로에게 줄을 서지 못한 자들이 구분됩니다. 더 나아가 내부자 속에서도 계층이 있습니다. 더 높고 화려하고 나은 경험을 한 사람, 조금 낮고 비천하고 못한 경험을 한 사람 사이에 계층이 존재합니다. 내부자이며 계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이를 위해 외부자를 깎아내립니다. 예컨대 저 사람은 방언도 못하면서, 예언도 못하면서, 환상도 못 봤으면서 라는 말로 깎아내립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세상 전반에서 일어나는 풍토입니다. 서울대에 간 사람과 서울대에 못 간 사람, 자기집을 가진 사람과 자기 집을 못 가진 사람, 부모에게 집을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과, 집을 물려받지 못하는 사람 등등. 내부자와 외부자를 가르고, 이를 통해 역으로 내부자가 <행복>을 얻는 세상의 시스템은 너무나 만연한 풍조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곱씹어보십시오. 매우 독특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한 것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부자와 외부자가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서울대에 가고, 공부를 못한 사람은 서울대에 못가고, 혹은 아볼로에게 줄 선 사람은 은사를 받고 아볼레에게 줄을 안 선 사람은 은사를 못받는다와 같은 구도가 들어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내부자와 외부자가 없습니다. 창녀와 세리를 위해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위해서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곱씹어볼 때에 교회 안에서 차별과 특권은 폐지됩니다.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동등한 형제 자매에 불과합니다. 교회 바깥의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그들을 위해서도 못박히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사실 (교회 안에 있는) 내부자와 (교회 밖에 있는)) 외부자 모두의 잘못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빌라도입니까? 유대인들입니까?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무엇보다도 내부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내부자라는 것을 인지하면 인지할수록 더욱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대한 진술은 반복적으로 이어지다가 9장 16절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아볼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소피아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영적경험을 누리고 신과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면 바울은 자신이 힘껏 복음을 전하지만 그 이유는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겸손히 말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누구보다도 핵심 코어에 속한 내부자이기에, 바로 자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을 깊이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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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옛날 저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저는 선한 마음에서 은사를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었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싶어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은사를 추구하던 저의 마음은 신의 능력과 권세를 맘껏 부리고 싶어하는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저 자신을 교정해준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죽었다 깨어난다 한들 결국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목사도 죄인입니다. 전도사도 죄인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닌 <은혜>라는 사실을 깊이 알면 알수록 나의 삶이 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눠주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청년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며 오늘 설교를 갈음할까 합니다. 우리 청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청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암묵적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와, 문화는 무엇일까요? 사실 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눠봐야 좀 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것,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우리가, 바로 내가 못박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모든 공동체에는 <내부자>와 <외부자>가 있습니다.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다만 <내부자>의 특권이 <외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적어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우리가, 바로 내가 못박았다는 사실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하고, 은혜를 나눠주고, 자신을 비우는 <내부자>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 그림의 교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더 깊은 영적체험을 하면 할수록 더 높은 계급을 쟁취하게 되는 (세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아볼로를 따르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한 사람일수록 더욱 낮은 자리로 나아가 다른 사람을 섬겨주는 바울이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청년 공동체가 십자가를 굳게 붙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 내부자일수록 외부자를 환대할 수 있고, 내부자일수록 특권을 내려놓을 수 있고, 내부자일 수록 자기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 성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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