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2021. 5. 9. 02:42

2013년 12월 고려대학교에 한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적 문제와 세상의 부정의들을 낱낱이 고발한 대자보는 한때 꽤나 유행이 되었던 문구로 귀결되었습니다. “모두 안녕들하십니까?”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이란 사회는 매우 흥미로운 역사의 행적을 지나왔습니다.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 남북전쟁,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직선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 그리고 최근에는 촛불까지. 그만큼 우리 사회는 사회를 올바르고 정의롭게 유지하려는 온갖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고, 독재에 맞서싸웠고, 민주화 이후의 불공정과 부정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의 DNA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무려 7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촛불로 말미암아 대통령을 탄핵까지 했던 지금, 우리는 다시 이 질문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모두 안녕들하십니까?” 여전히 청년실업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불로소득에 대한 열광이 짙어지고 있으며, 결혼률 및 출산률은 날로 떨어지며, 점점 빈부격차 및 이념갈등과 같은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2020년, “우리는 모두 안녕들하십니까?”

 

-

 

신앙과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05년도에 처음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대학교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다가 취직을 잘 했던, 혹은 학과에서 술만 진탕 마시면서 놀다가 취직을 잘 했던 <산증인들>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로 듣던 선배들의 사례는 전혀 다르지만 유사했습니다. 1-2학년때는 학점도 좋지 않고 학고만 맞다가 군대 다녀와서 나름 평범하게 공부를 하고 왠만하면 선배들이랑 교수님들 그리고 후배들이랑 술만 진탕 마시고 돌아다녔지만 결국엔 취직을 잘했거나, 아니면 1-2학년때는 학점도 좋지 않고 그렇게 살다가 군대 다녀와서 선교단체 생활만 열심히 한다고 학교생활에 그리 신경을 못 썼지만 결국엔 취직을 잘한 사례. 이른바 취직 잘되던 시기의 끝물 어딘가에 저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다니던 시절 저희 신입생들은 그 어떤 누구도 취직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수능을 준비한다거나, 편입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미리 취직을 위한 스펙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시대는 점점 바뀌어갔습니다. 07학번 신입생들은 참 열심히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입학하자마자 토익학원을 다니는 신입생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말세가 왔다고 웃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시대는 점점 바뀌어갔고 “1-2학년때는 학점도 좋지 않고 학고만 맞다가” 취직한 케이스는 더 이상 입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지 않았습니다. 교수님들 또한 예민해졌고 다들 취업을 위한 스펙경쟁에 뛰어드는 체감을 3학년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취직을 위해서 열심히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하던 시절 저는 신앙적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단체에 시간을 투자했고, 신앙적 고민을 해결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고, 취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책들을 읽어가는데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애써 영어공부를 한다고 해봤자 메시지 성경 영역본을 읽고 해석하는 정도였습니다. 

 

농담반진담반으로 “하나님께 대학생활을 드리면 졸업 이후의 삶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했던 사례는 점점 흐릿해져갔습니다. 졸업 이후의 삶이 영광스럽기 위해서는 그만큼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스펙을 쌓는 삶도 열심히 살아야했습니다. 더군다나 취업의 경쟁이 심해질수록 취업을 위한 자소서를 쓸 때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 팽팽 놀면서 공부를 안 하던 친구들 중에서는 눈치 빠르게 컨닝으로 학점을 커버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나보다 앞서나간다는 미묘한 불안감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냥 먹고 살만한 평범한 삶 정도를 원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을 졸업과정에서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신앙적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신앙이 좋으면 정말 삶도 좋아질까 여러 고민이 들었던 시절이 저의 대학졸업즈음 했던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신앙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내 삶이 전혀 안녕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

 

안타깝게도 전도서는 이런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애써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옹호하려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9장을 보십시오. 2절, 3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모든 사람의 결국은"으로 번역된 단어 중의 하나는 <미크레>인데 이는 말 그대로 <숙명, 운명>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잣대가 있습니다. 의의 잣대로 나누자면 의인과 악인이 있습니다. 깨끗함의 잣대로 보면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못한 자, 예배의 잣대로 나누자면 온전한 예배자와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자, 하나님 앞에 맹세하며 사는 자와 맹세라고는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의인이, 깨끗한 자가,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서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욱 온전하고 충반하며 행복한 잘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들 모두에겐 <숙명, 운명>이 있습니다. 선하다고, 예배 드린다고, 서원한다고, 깨끗하게 산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특별히 모든 인간이 마주하는 <숙명, 운명>은 필히 죽음입니다. 잘나봤자, 경건해봤자, 성실해봤자, 결국 끝은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도서를 처음 다룰 때 되짚었던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이 9장 처음에 등장합니다.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돌아갈 <숙명, 운명>은 이미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묘한 뜻에 따라 각각의 사람을 사랑하실지 혹은 미워하실지를 이미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마치 사람의 <운명, 숙명>은 정해져있는 것만 같아서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법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현실이 펼쳐집니다. (11절, 메시지) 빠르다고 경주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힘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혜롭다고 만족을 얻는 것도 아니며, 똑똑하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학식이 높다고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 <운명, 숙명>처럼 각 사람에게 고통의 때가 도래하기도 합니다. 마치 영화 <곡성>에서 ‘미끼에 걸려부렸으’라고 하는 것처럼, (12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고통의 나날이 닥치면 한낱 인간은 그것을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주어진 <운명, 숙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전도자는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던져줍니다. (14절)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큰 왕>이 등장합니다. 그 성읍을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때 <가난한 지혜자>가 메시아처럼 나타나서 성읍을 끝내 <큰 왕>으로부터 구해냅니다. 성의 영웅이지요. 또한 가난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지혜가 정말 보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기본적으로 전도서는 <지혜서>의 범주에 속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혜의 근원이며,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책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지혜조차도 덧없던 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기껏 성읍을 구할만한 커다랗고 놀라운 지혜를 갖고 있었지만 그 성읍에서조차 기억되지 못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정녕 안녕들하십니까?” 의인과 죄인이, 예배자와 불신자가, 지혜자와 우매자가 전혀 구분이 없는 것 같고 오히려 하나님의 임의에 의해서 <운명, 숙명>이 결정된 것만 같은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은 정녕 안녕들하십니까?

 

-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장하고 배워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참으로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또한 무엇일까요? 적어도 제 기준에는 나이를 먹으면서 으-른이 된다는 것은 특정 상황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배우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담임목사 대부분이 남자라는 사실이 교회가 전근대적인 조직이라는 표징처럼 보였습니다. 여자장로가 거의 없다는 사실 또한 교회가 전근대적인 조직이라는 증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고 교회역사를 배우고 다양한 여성 어른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할머니들에게 교회는 숨통을 튀어주는 창구였음을 말입니다. “개똥이 엄마”, “철수 엄마”, “영희 엄마”에 불과했던 우리 할머니 세대들에게 “OOO집사님”이란 이름을 찾아주고, 호칭을 붙여주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여전도회 회장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집단의 임무를 해결하게 만드는 독보적인 장소였습니다. 더군다나 남자 장로님들이 모인 당회에서 공식결정이 나긴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권사님들의 입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새삼 놀랐던 기억도 납니다.

 

젊었을 때는 선명했습니다. 날카로웠습니다. 신앙은 무조건 뜨거워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무조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 또한 무조건 도전되고 감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 그대로 선명하게 선과 악이 뚜렷했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배우는 것은 태양이 뜨면 달이 가라앉는다는 사실이며, 빛이 사라진 것 같은 어둔 밤 속에서도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과 저 머나먼 우주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거는 별들의 빛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미지근해보이던 남자 집사님들의 신앙 속에 치열한 고뇌와 씨름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배웠습니다. 치고 받고 싸우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교회와 신앙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도 새삼 배웠습니다. 서로 눈만 마주치면 뜨겁게 키스만 생각하던 젊은 날의 사랑보다는 이제는 동지가 되어버린 것 같은 아내와의 은은한 신뢰감 있는 사랑이 더 깊고 소중하다는 사실도 새삼 배웠습니다.

 

전도자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무수한 떡밥을 뿌립니다. 떡밥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유의 전환을 촉발합니다. 이 세상이 공정해야 한다는 착각을 버리란 겁니다. 세상에서 선과 악의 잣대가 분명해야 한다는 착각을 버리란 겁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꿈꿔왔던 권선징악의 구도는 버리란 겁니다. 이분법의 잣대로 세상을 해석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 넓고 크며 깊고 신묘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해가 뜨는 낮은 좋고 해가 지는 밤이 나쁘다고 생각했다면, 해는 사라졌지만 그로 말미암아 달과 별이 빛나는 밤을 보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악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을 좀 더 다양한 구도에서 바라보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폭넓게 받아들이라는 전도자의 말에 경청해보십시오.지나치게 세상에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마십시오. 지나치게 세상에서 선과 악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나치게 권선징악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마십시오. 오히려 복합적이고 풍성한 이 세상의 신비를 직면하십시오.

 

-

 

흥미롭게도 전도자는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던 화법을 사용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바로 세상이 종말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2절)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이 무슨 의미일까요?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일처럼 보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기도 전에, 구름마저 생기기도 전에,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치 한 인간의 <숙명, 운명>처럼 끝날 시간이 있다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창조 되기 전의 세상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3절) 집을 지키는 남성들은 떨며, 힘있는 자들은 구부러지며, 맷돌질 하던 여성들도 맷돌질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6-7절, 메시지역) “근사했던 삶은 조만간 마무리 된다.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끝난다. 몸은 그 출처였던 땅으로 되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 되돌아간다” 앞서 인간의 삶의 한낱 바람같음을 노래했던 전도자는 이제 이 세상 전체의 바람같음을 노래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한낱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처럼, 온 세상 또한 한낱 바람처럼 사망할 것이라 말합니다. 

 

한낱 사라질 인생이라면, 또한 세상사가 우리의 뜻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지나치게 의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나치게 지혜로울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도에 지나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한 수준, 적절한 수준으로 사는 것이 딱 좋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한낱 바람처럼 사라질 세상이라면 세상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도 마치 세상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텐데 세상이 올곧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이 정의로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에 권선징악이 온전히 구현되어봤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올바르고 정당하며 바람직한 세상마저도 어차피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면 말입니다. 전도자는 나름의 극단적 사유를 통해서 우리 삶에도 끝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존재에도 끝이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애써 사라질 이 세상이 굳이 정의롭고 올곧으며 권선징악이 완벽히 구현될 필요가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덧붙여 그런 애써 사라질 세상 가운데 던져진 우리의 삶 또한 애써 세상의 정의, 세상의 올곧음, 세상의 권선징악 문제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세상도 결국엔 끝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삶도 마치 <운명, 숙명>처럼 끝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지금껏 반복적으로 말해온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충분히 삶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한낱 선물에 불과합니다. 거저 얻은 선물입니다. 선물이 굳이 완벽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펼쳐진 세상도 굳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좋습니다. <운명, 숙명>이 있다는 것 또한 일종의 하나님의 선물과 같습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는 고난의 때, 아픔의 때도 마주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에겐 행복의 때, 결실의 때를 마주하기도 할 것입니다. (9장 7절-10절) 기쁘게 먹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포도주를 마시며 즐기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옷을 예쁘게 입고 화려하게 뽐내란 겁니다.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고데기를 하며 향수를 뿌리란 겁니다. 이 바람같은 주어진 선물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내와 같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충분히 누리라는 겁니다. 어차피 죽게되면 계획도 없을 것이며, 일도 없을 것이며,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을 것이니, 여기서 한 번 선물처럼 계획도 세워보라는 겁니다. 일도 해보고 성취도 해보라는 겁니다. 지식도 가져보고 지혜도 얻어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한낱 임의적이고 사라져버릴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비누방울을 잡으러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이 비누방울을 불고는 잡으려 애쓰는 것을 보고 ‘어차피 잡지도 못할껄 왜 저렇게 뛰어다니며 에너지를 소비한담?’이라고 평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부모라면 의도적으로 헛된 비누방울 잡기 놀이를 유도해서 에너지를 쏙 빼놓으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잡히는지 잡히지 않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잡히지 않더라도, 한낱 바람같이 사라질지라도 비누방울을 좇는 그 자체가 행복하고 즐거운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지혜도, 지식도, 성취도, 모든 인생이 손으로 바람을 잡는 것만 같다고 얘기하면서도,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니 맘껏 누리라는 겁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

 

하지만 전도자는 여기에서 멈추지는 않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흔히들 주로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기억하라”는 단어는 11장 8절의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캄캄한 일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더 나아가 “너의 창조주”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로운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보르에카>라고 음역되는 너의 창조주라는 단어는 <너의 무덤>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라임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12장 1절은 11장 8절의 후반부와 유사하게도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캄캄한 날들을 기억하라!”,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 이를 통해서 전도자가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요? 11장 8절 전체를 다시 읽어봅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12장 1절은 의도적으로 중의적 의미를 갖게끔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쭉 읽다보면 “청년의 때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라고 들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이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허락하시고, 인생을 허락하시고, 운명을 허락하신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너의’ 창조주 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적절한 균형감을 허락합니다.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세상의 바람같음을 되새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힘껏 성취를 향해 달려가서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을 이뤄보십시오. 한낱 바람같을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보다 더 간절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가져보십시오. 그 또한 한낱 바람같을 것입니다. 지혜와 명철을 연마해서 그 어떤 사람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해결해보십시오. 그 또한 바람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충대충 사십시오. 대충대충 사십시오. 너무 열심히 살지 마십시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성취를 통해 기쁨을 얻게 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기억하십시오. 간절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기억하십시오. 지혜와 명철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의 존재를 기억하십시오. 한낱 결과만 바라본다면 바람같이 사라질 허무한 것들이지만, 그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창조주를 바라본다면 이는 가히 기쁨이며 보람입니다. 삶의 의미와 같습니다.

 

-

 

각자 삶을 살면서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고 계신가요? 살다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때론 힘들고 아프며 고통스러울 때가 왕왕 있습니다. 또한 때론 박수받고 환호받으며 성취를 증명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우리가 과거를 되짚어보십시다. 힘들고 아프며 고통스러웠던 모든 과거의 날들을 도려내고 싶나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성장했습니다. 또한 신앙이 우리 안에 자리잡은 경험이 바로 그 아프고 쓰라린 과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수받고 환호받으며 성취를 증명한 영광스러운 때만 우리 안에 주어졌다면 어떨까요?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철이 없고 교만한 사람으로 변모했을 것입니다. 박수와 환호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 더 크고 화려한 성취만을 향해 달려가며 스스로를 혹사하는 사람으로 변모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신비입니다. 아픈 시절이 약이 되고, 영광의 시절이 독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과 기쁨은 공존하며, 상실과 결실은 공존하며, 행복과 불행은 공존합니다. 전도자는 그 미묘한 상반된 개념을 예술적으로 직조해내는 창조주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창조주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저의 지난 5년간의 교회생활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한 교회에서 5년간 섬긴다는 것은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교회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리더쉽에 대해서도, 조직에 대해서도, 설교에 대해서도, 목양에 대해서도, 참 많은 것을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고등학생과 청년들이 5년여간 성장하고 배워가는 모습을 통해 느낀 것이 참 많습니다. 아마 앞으로 제 목회에 그 교회에서의 5년은 잊혀지지 않는 자양분을 공급했던 시절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아픔도 정말 많았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고통스럽게 이빨을 꽉 깨물고 표정관리를 하며 버텨야 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견디게 한 시간 속에는 분명 의미가 있긴 한거죠?” 그리고 그런 기도를 하는 순간마다 했던 저의 설교의 유일하게 반복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의미가 있다”였습니다. 

 

그럼 그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아직 모릅니다. 고작 1년 정도 지났을 뿐이라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숨에 그 ‘의미’를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삶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란 믿음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을 붙잡고 견디고 버텨나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 있습니다. 나의 노력, 선택과는 상관없이 삶이 잘 풀려나갈 때가 있고, 삶이 추락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떤 상태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오늘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불공평해보이고 답답할 때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행복한 날들과, 불행한 날들을 절묘하게 직조해내신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십시오. 바람같이 허무한 것만 같은 우리의 인생 또한 바로 너의 창조주 그 분의 선물입니다. 

'전도서(청년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무함 속의 위로(전도서 1:12-2:26)  (0) 2021.04.25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