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함 속의 위로(전도서 1:12-2:26)

2021. 4. 25. 02:15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흥미롭게도 1장 1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토대로 솔로몬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녕 그럴까?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제가 만약 “전도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할까요? 물론 가끔 남녀사이에서는 “오빠가” 혹은 “누나가”라는 말을 쓰긴 합니다. 하지만 12장 9절을 보실까요? “전도자는 지혜자여서” 전도자를 판단합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웠다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제 3자의 판단 같지 않나요? 기본적으로 전도서는 두 개의 층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전도자’이며, 또 하나는 ‘전도자’의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편집자’입니다. 더 나아가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도자가 쓰는 말들의 늬앙스가 솔로몬 시대와는 꽤나 거리가 있는 시대의 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의 과감한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몇몇 학자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솔로몬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정점에 있었고 지혜를 소유한 왕, 그러면서도 결국 우상숭배를 통해 나라를 갈라놓았던 어리석은 왕, 지혜와 어리석음이 공존하는 솔로몬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의도적으로 ‘참된 지혜’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습니다. 무엇이 지혜인가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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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중에는 정말 기가 막히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의 책이 인상적입니다. “묻지않는 자에게 해답을 던지지 말라”라는 책 제목입니다. 저는 가끔 한 명의 목회자로, 신앙교육에 대해 고민하곤 합니다. 또한 이제 막 닻을 올린 신참 목회자지만 후배 목회자들의 신학교육에 대해 고민하곤 합니다. 하지만 고민할때마다 부딪히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배우려 할까?”의 문제입니다. 저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저는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3년 이상 한 목회자 밑에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저는 떠돌이였고 이곳저곳에서 홀로 신앙의 배움을 얻었습니다. 비효율적이긴 합니다. 많이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기간 동안 참 많이 배웠습니다. 저를 교육시킨 것은 훌룡한 배움의 장소, 훌룡한 배움의 제도, 훌룡한 배움의 커리큘럼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앎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좋은 목회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제 내면 깊은 곳에 앎에 대한 열망을 심겨두셨던 것 같습니다.

 

달리 뒤집어 말하면 아무리 좋은 선생이 있다 한들, 아무리 좋은 책들이 쌓여있다 한들, 배우려 하지 않으면 모두가 헛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중고등부의 교사를 맡게 되어서 그들에게 정말 와닿는 바를 알려주고 교육하려 한들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아무리 귀에 때려박는다 한들 그들이 듣고자 하는 관심이 없다면 헛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계속 반복적으로 말하면 단 하나의 유익이 있을 겁니다. 후일에 그들이 찾아와 말하겠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을걸 그랬습니다”라고요. (물론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들려줄 수 없습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배움을 줄 수 없습니다. 물으려 하지 않는 이에게 해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하는 한 사람의 입장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떡밥’입니다. 떡밥을 투척하는 일입니다. 배움의 욕망을 촉발하는 떡밥을 투척하는 것, 그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 중의 한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의문을 제기할만한, 공감할만한, 논쟁에 참여하고 싶을만한, 하나의 주제를 툭 던져주는 겁니다. ‘묻지 않는 자에게’ 해답을 던져봤자 받지 못한다면 ‘묻지 않는 자에게’ ‘물음’을 던질 떡밥을 던질 수는 있을 겁니다. 툭 던져주는 것, 그런 사례를 성경에서 줄곧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분간 살펴볼 전도서 또한 그런 책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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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정점에 있었던 솔로몬이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로 번역되는 헤벨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바람소리입니다. “바람 같다, 바람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 같고 모든 것이 바람같다.”는 말입니다. 헛됨이란 의미도 있겠지만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리로 움직일줄 알았으면 이리로 갈 것을 대비했을 겁니다. 저리로 움직일 줄 알았다면 저리로 갈 것을 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혜의 정점에 있던 솔로몬이 한 수 가르쳐줍니다. 인생은 한낱 바람 같은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고 밤이 옵니다. 또 있으면 해가 뜨겠지요. 그럼 출근하겠죠. 출근하고 다시 퇴근합니다. 조금 놀다가 밤이와서 잡니다. 또 해가 뜨고 출근하겠지요.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또 주일이 와서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또 밤이 오며 해가 뜨면 다시 출근합니다. 우리의 반복되는 인생에 정녕 의미가 있을까요?

 

솔로몬이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여 살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는 간단합니다. 인생이 ‘괴롭다’는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애에 허락하신 것이 있다면 오직 ‘괴로움’입니다. 이는 마치 에덴에서 떠나온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언급합니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괴로움, 땅을 갈고 소득을 얻고자 애쓰는 남성의 괴로움, 한낱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유일한 선물은 바로 괴로움입니다. 모든 인생은 바람과 같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지만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들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애써 그렇게 지혜를 얻었더니 얻은 결과는 번뇌입니다. 근심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요? 아닙니다. 전도자에 의하자면 그것은 번뇌와 근심을 촉발할 뿐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걸 다 해봤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소와 양떼와 소유를 한껏 소유했으며 은금과 보배와 온갖 처첩들과 종들을 두었지만, 또한 마음에 즐거워하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막지 않고 행했지만 그는 말합니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삶에는 성취의 기쁨이 있습니다. 전도사인 제가 훗날 목사 안수를 받으면 행복할 것입니다. 또한 제가 담임목사로 청빙받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또한 훗날 제가 좀 더 능력있고 유명한 목사로 사랑받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취를 이루고나면 정녕 성취 자체가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전도사의 시절에 비해 목사는 더 많은 책임을 져야하고 고민을 해야합니다. 담임도 그렇고, 사랑받고 존경받는 위치에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번뇌와 근심이 들어올 뿐입니다. 성취는 한낱 바람 같습니다. 그 순간에만 시원할 뿐이지 지나가고 나면 씁쓸함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성취가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면 어떨까요? 특별히 잠언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고 말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전도서에서 흉내를 내고 있는 솔로몬은 지혜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시바의 여왕마저 찾아와 지혜를 나눠달라고 말했으니까요. 14절을 보십시오.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지혜가 좋은 것 알겠다는 겁니다. 우매한 것이 안 좋은 것도 알겠다는 겁니다. 근데 그래봤자 무슨 차이가 있겠냐는 겁니다. 좀 더 지혜로우면 인기가 있을 수 있겠지요. 고난과 어려움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차이가 클까요? 어차피 죽는데 말입니다.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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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의 흉내를 내면서 한껏 떡밥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이 떡밥을 물길 기다리며 자극적인 말들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무셨습니까? “정말 행복한게 뭐지? 정말 좋은 게 뭘까?”라는 생각이 파닥파닥거리며 여러분 안에서 튀어오르고 계십니까? 그럼 저 또한 제 나름대로 떡밥을 던져보겠습니다. 

 

진보적인 정당이 더 정치를 잘할까요? 보수적인 정당이 더 정치를 잘할까요? 정권이 연장되면 더 행복한 삶이 올까요? 아니면 정권이 교체되면 더 행복한 삶이 올까요? 아니면 제3의 정치세력이 일어나야 할까요? 다당제로 정계가 개편되면 더 나은 국가가 될까요? 코로나가 종식되면 행복할까요? 남북이 통일되면 행복할까요? 미중 관계와 갈등이 해소되면 더 나은 시대가 열릴까요? 네, 안된 것 보단 낫겠죠. 여러가지 선택지 중에서 비교하자면 더 나은 것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보자는 겁니다. 국가공동체를 위해 어떤 방향이 옳은 것일까요? 나 개인의 행복을 놓고 봤을 때 뭐가 옳으냐는 겁니다.

 

저는 한때 부패하고 타락한 한국교회를 개혁하자는 굳센 마음을 갖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타락한 한국교회의 주구로 전락한 전도사나 목사 따위가 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교회의 편협하고 얄팍한 실상을 고발하는 책을 집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좀 더 제대로 된 공부한 목회자가 되면 한국교회의 희망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타락한 한국교회에 희망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좀 더 제대로 공부해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제대로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온전히 살아가고 사랑하며 살아가느냐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도 모르겠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개혁과 갱신도 모르겠고, 일단은 내게 맡겨진 역할과 임무에 충실할 것과, 나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점점 분명하고 선명한게 없어집니다. 어릴 때는 적이 분명했는데 적이 점점 흐릿해집니다. 젊을 때는 내가 해야 할 것이 분명했는데 지금은 내가 해야 할 것이 모호해집니다. 타락한 결과일까요? 늙어버린 결과일까요? 예전에는 공부 안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화가 났습니다. 교회타락의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생각 없이 교회만 들락날락 거리는 성도들을 보면 화가 났습니다. 목회자 타락의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저 다들 내 형제요, 내 자매일 뿐입니다. 이 또한 타락한 결과일까요? 늙어버린 결과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보다는 조금 더 유연해지고 넓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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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으로 위장한 전도자는 1-2장의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2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은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온전히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상을 주셔서 지혜와 지식과 희락과 온갖 재물을 얻게 된다고요. 또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들은 죄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셔서 온갖 재물을 잃게 되고 세상사가 뒤틀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늬앙스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온전히 살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뺏는 것이 아니라 그냥 뺏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고는 선인에게는 맘껏 선물을 허락하시고 악인에게는 있는 것마저 강탈하십니다.

 

이는 2장 18절부터 이어지는 논리들의 귀결입니다.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결실을 거둘지라도 그 결실이 진정 지혜자에게 이어질 수 있느냐 따져보면 회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낱 우매자에게 결실이 돌아갈 여지가 있습니다. 실제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과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이 우매자였고 나라를 분열시켜버렸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은 가치가 있느냐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는 세상에 만연한 분배정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정말 정의롭고 선하고 공정하게 재화가 분배되느냐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한낱 우매자든, 악인이든, 그 어떤 누구라할지라도 우연히 재화를 많이 얻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겁니다. 반면 아무리 애를 쓰고 악착같이 노력해봤자 그만큼 노력의 결실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하는 것이 24절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 특별히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만이 우리 인간을 충족시켜준다는 겁니다. 25절 또한 히브리어 원문으로 번역하자면 “아 먹고 즐기는 일을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있겠는가?”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소소한 기쁨, 먹는 것, 마시는 것, 수고할 때 허락하시는 소소한 기쁨이 아니고서는 인간이 충족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26절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정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또한 죄인이 쌓은 제물을 ‘선물’로 주시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의중에 있을 뿐입니다. 분명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에게 내릴 선물과 복락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 또한 우리가 알 수 없는 범위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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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솔로몬의 탈을 쓴 전도자가 던진 떡밥에 낚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낚이셨다면 머리가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정녕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회사에서의 승진인가요? 사랑하는 그 사람과의 데이트인가요? 월급을 통해 맛보는 탕진의 즐거움인가요?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쁨인가요? 신앙이 성장하고 인격이 성숙하는 기쁨인가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없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기쁨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기쁨이 항상 머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로 보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보람이 항상 머물지는 않습니다. 솔로몬의 탈을 쓴 전도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야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정말 기쁜게 뭔지 아냐? 없어 임마.”

 

이는 극단적 허무주의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차를 사는 것, 집을 사는 것, 결혼을 하는 것, 명예를 얻는 것 등등. 나름의 목표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여러분의 성취욕을 자극할 것이며, 성취욕을 통해 행복을 보상받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전도자의 말을 들으십시오. 차를 사봤자, 집을 사봤자, 결혼을 해봤자, 명예를 얻어봤자, 여러분이 꿈꾸는 모든 것을 이뤄봤자, 거기에 찾아오는 것은 바람 같은 싸늘함입니다. 허무입니다. 정녕 행복과 보람이 있겠느냐 그 또한 잠깐일 뿐입니다. 하나님 허락하시는만큼만 즐기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일 뿐입니다. 얼마만큼 허락하실지, 얼마만큼 누리게 하실지, 그 또한 하나님의 의향에 있기에 우리는 감히 예측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자는거냐고 제발 마음 속으로 물어봐주십시오. 한낱 설교자 주제에 꿈많은 청년인 우리들에게 절망을 안기려는거냐고 속으로라도 따져주십시오.

 

저는 한때 공부를 참 열심히 했습니다. 하루에 책을 100페이지 이상 읽었습니다. 글도 참 많이 썼습니다. 교수님들로부터 인정도 받았습니다. 살면서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를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신학공부 시절에는 꽤 많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유학을 가는 꿈도 꿨습니다. 박사학위를 받는 꿈도 꿨습니다. 제대로 읽을만한 좋은 책을 쓰는 꿈도 꿨습니다.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나가고 더 좋은 글들을 뽑아내는 꿈도 꿨습니다. 한때 마치 유시민처럼 글과 말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런 꿈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공부의 양이 많이 줄었습니다. 일주일에 6일을 일하는 전임사역에 뛰어들면서 공부보다는 목회에 에너지를 쏟게 되었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명민함이 떨어지고 글을 쓰는 퀄리티, 책을 읽는 양 자체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어 실력 부족으로 유학을 꿈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또한 마뜩치 않았고, 30살 이전에 책을 쓰겠다는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완전히 실패로 점철한 인생 아닙니까? 꿈꾸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역설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저는 눈에 독기만 품고 공부만 하던 시절에 비해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습니다. 가끔 장난치고 밥을 같이 해먹고 커피를 마시는 평생 친구가 생겼습니다. 또한 가나안교회 지체들은 아직 친해지질 못했지만 지난 교회에서는 참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삶을 위해 기도하고 조언해줄때 몰려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교회를 세워나가면서 얻는 보람과 유익이 있었습니다. 지금 또한 목사님을 보좌하면서 돕는 묘한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성취하지 못한 것들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얻고 행복을 얻었습니다. 저는 제가 성취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실패했지만 오히려 거기에도 행복은 있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꽃이 산 정상에 피었다며 정상을 향해 힘껏 달음박질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한 등산객과 같았습니다. 정상에 핀 아름다운 꽃은 만나지 못했지만 제가 포기한 그곳에 역설적으로 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뺏아가시면 아무것도 없는 절망 밖엔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성취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시기 때문에 우리 목표대로 성취된다고 한들 행복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실패할때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을까요? 그 또한 아니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가 실패한다 한들 거기에 역설적으로 행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24-25절을 의역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먹고 마시며 수고할 때에 행복을 느끼곤 하는데
되짚어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더라.
그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먹고 즐기는 행복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흉내를 내는 전도자는 우리에게 허무주의를 통해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계획이 가끔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때로는 안 풀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좌절과 절망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질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하면, 잘 되면, 높아지고, 화려해지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성공하지 않아도, 잘 되지 않아도, 낮아져도, 비천해져도, 하나님 허락하시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자에게 자기의 의향대로 행복을 선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말합니다. 너무 바쁘게 살지 말라고, 너무 급하게 살지 말라고, 너무 성취하려 아등바등 애쓰지 말라고, 약간은 느긋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입니다. 톤을 조금은 낮추며 말해도 괜찮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쟁취하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이니까 말입니다.

 

결단찬양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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