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02 (레위기1:3-17)

2021. 2. 4. 12:05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는 쉽지 않아보입니다. 쉽지 않은 이유는 자세한 해설이 곁들어지지 않는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예배에 오지 않은 친구를 전도하면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어떤 식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가르쳐준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난감할겁니다. 언제 일어서고 언제 앉아야하는지 또 사도신경이 무엇이고 주기도문이 무엇이고 함께 부르는 찬양과 가만히 앉아서 듣는 찬양, 그리고 교독문, 성서봉독 등등. 구구절절 설명해줄 수는 있겠지만 듣는 이가 단번에 알아듣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에서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들을 위한 ‘예배안내서’를 만들면 될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에 몇 번 참여하다보면 알게 됩니다. ‘예배안내서’를 아무리 잘 만들어봤자 예배에 참여하면서 익히는 ‘감각’을 글로 기록해서 전수할 수는 없습니다.

 

레위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기껏해봤자 글이나 사진, 아니면 재연한 영상으로 얼핏 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 첫 장은 ‘번제’를 언급합니다. 왜 번제를 처음 언급할까요? 번제는 언제 드리는걸까요?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수히 많은 해설들이 있지만 누구하나 자신있게 번제의 목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실제 그 시절에 안해봤으니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번제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홍수가 끝난 이후 노아가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번제를 드린 장면을 주목합니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번제와 다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율법’ 이전에 번제가 만연했다고 유추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번제와 유사한 형태는 이스라엘 근처 근동지방의 제사문화에서 곧잘 발견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뭔가를 태우며 하늘의 신과 교접하는 행위를 무속신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정 제물을 태우면서 신과 교통하려는 행위는 인류보편의 자산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특정 제물을 태우면서 신과 교통하려는 행위. 이것이 번제의 아주 근원적인 핵심 아이디어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신학생들은 ‘올라’라는 단어를 배울 때 다들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농담 한 마디를 하고 싶은거죠. ‘올라’라는 단어는 올라가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올라, 즉 올라가게 만드는 제사입니다. 무엇이 올라가죠? 연기가 올라갑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태워드릴 때 연기가 올라갑니다. 흥미롭게도 번제를 묘사하는 레위기 1장은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 농담처럼 들리지만 학자들은 이와 같은 본문을 두고 이렇게 해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냄새를 좋아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육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고기를 직접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앞으로 레위기 제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고기는 오히려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냄새로만 만족합니다. 향기로운 냄새만 있다면 만족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바와 달리 번제와 관련된 레위기 본문을 보면 흥미로운 단어들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고 5절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이어서 6절을 보십시오. ‘그는 또 그 번제물을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여기서 ‘그’는 누구일까요? 5절 중간에 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입니다. 7절에도 8절에도 등장합니다. ‘제사장들.’ 제사를 드리는 장면에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인물은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은 ‘그’입니다. 그는 바로 제물을 드리는 당사자입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새벽에 여기에 모여 각자 번제를 드린다고 생각해봅시다. 제가 제사장 역할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각자 제물을 갖고 나아옵니다. 그리고는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또 직접 잡습니다. 또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옆에서 쏟겨진 피를 받아다가 제단에 뿌리고, 또 제단에 불을 붙이며, 각이 떠진 제물을 불에 태우는 작업을 합니다. 번제의 주체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보조자입니다. 번제의 주체는 2절에 등장합니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고’ 마음을 먹은 ‘누구든지’입니다. 

 

따라서 레위기의 번제는 ‘누구든지’를 배려하기 위해 제물의 종류를 제안합니다. 3절, 10절, 14절은 비슷한 내용을 반복합니다. 다만 제물의 종류가 다릅니다. 먼저는 소입니다. 그리고는 양이나 염소입니다. 마지막은 산비둘기 혹은 집비둘기입니다. 기본적으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어야 합니다. 가축은 오늘날의 반려견에게서 발견하는 유대감을 주인과 나누는 주인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직접 기르는 가축인 소, 양, 염소 혹은 집비둘기를 바칠 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것을 바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특히나 제물에 직접 안수를 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 제물이 바로 저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부자인 사람은 소를 바칩니다. 중산층들은 양이나 염소를 바칩니다. 가난한 사람은 집비둘기를 바칩니다. 그마저도 없는 사람에 한해서는 산비둘기를 잡아 바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각각의 제물에 따라 차등하게 반응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모든 제물을 두고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제물이 바로 제사를 드리고자하는 당사자’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고기를 좋아하시고 고기를 뜯어 먹는 신이셨다면 소고기와 양고기/염소고기 그리고 새고기 사이에 차등을 두셨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냄새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냄새를 좋아한다는 말은 고기를 들고 온 당사자의 중심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흥미롭게도 ‘향대접’이라는 마치 번제의 향기로운 냄새와 유사한 상징을 두고는 ‘성도의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번제의 향기로운 냄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각 성도들의 중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상기시켜볼 수 있습니다. 본문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그의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물을 갖고 나아오는 존재의 중심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에 대한 레위기의 규정은 ‘흠 없는 수컷’이라고 명시합니다. 제대로 골라서 나아오란 말입니다. 아무것이나 갖고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훗날 말라기 예언자는 ‘눈 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당시의 행태를 규탄했습니다. 제대로 골라서 나아오는 것 자체는 제사드리고자 하는 사람의 중심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번제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도, 성막도 없습니다. 제사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번제의 핵심사상은 고스란히 성경 곳곳에 살아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성도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삶과 존재 자체가 당시 고린도시의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더러, 삶과 존재 자체가 하나님 받으시기에 기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또한 로마서는 우리의 몸과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더 까다로운 규정을 받고 있습니다. 예전에야 집에서 기르던 소, 양, 염소, 비둘기 중에 가장 좋은 것 하나만 갖고 가서 각을 뜨면 그것만으로 온전하다 일컬음을 받을 수 있지만, 이제 우리는 진정 마음과 존재의 중심이 성결한 상태로 살아내야 비로소 온전하다 일컬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산 제물’이 되라는 바울의 권면, 또한 고린도후서에서 배울 수 있는 바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냄새’라는 메시지는 더욱 힘있게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이슈가 되는 온라인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다루면서 오늘 말씀을 매듭지을까 합니다. 저 또한 가나안교회에 부임하고 6주 정도 온라인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는 청년들의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보다 집중이 잘 되는데 또 의외로 딴 짓도 많이 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런 글을 읽고 ‘역시 온라인 예배는 힘들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온라인 예배 또한 일반 예배와 같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 예배는 어떤 것인지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번제에 대한 레위기의 규정을 보면 당사자는 제사장이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 자신입니다. 스스로가 안수하고, 직접 제물을 잡고, 각을 떠야합니다. 제사장은 이를 섬길 뿐입니다. 예배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설교자입니까? 찬양인도자입니까?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 그 자신입니다.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던, 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던, 가정예배를 드리던,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북한과 같은 상황에서 쪽성경 한 구절을 읽고 혹은 암송한 몇 구절을 떠올리며 기도를 하건, 상황과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한 산 제사로 드려질 수 있는가.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준비가 되어있는가가 핵심사안입니다. 레위기는 소도 괜찮고, 양도 괜찮고, 염소도 괜찮고, 집비둘기가 안된다면 산비둘기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향기로운 냄새'여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제사드리는 당사자가 온전하냐고 묻습니다.

 

번제는 사라졌습니다. 번제를 위해서 오늘 본문을 읽는 것이라면 오늘 본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번제는 사라졌지만 번제 당시에 요구하던 하나님의 요구는 오늘도 영원합니다. 우리는 정말 온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기뻐하는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지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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