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여정 (갈 4:21-31)

2021. 11. 7. 03:16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22살 첫 연애가 실패한 이후 저는 이 모든 실패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헤어진 여자친구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맞은 결별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흘 내내 펑펑 울며 회개했습니다. 마치 밧세바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잉태했던 아기가 죽기까지 펑펑 울었던 다윗과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헤어진 여자친구가 했던 말이 제 가슴에 콕 박혔습니다. “나는 너가 여전히 좋지만 성품이 썩 좋지 않아서 배우자감으로는 아닌 것 같아” 저는 성품이 썩 좋지 않습니다.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성품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방면에서 문제였습니다. 하나는 여전히 헤어진 여자친구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다시 사귈 여력이 생기려면 성품이 좋아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가 당시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습니다. 앞으로 목회를 하려면 지금보다 더 탁월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기가 넘쳤고, 다혈질이었고, 조그만 일에 쉽게 화를 냈으며, 또한 멘탈도 약하여 작은 일에 당황하고 힘들어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분명 제 주변의 전도사님, 목사님은 그런 분이 없었기에 무척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자를 감당할만한 성품과 실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저는 괴로워했습니다. 당시에 참 위로받았던 하나의 문장이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서 본인의 설교에서 던진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진심은 있지만, 하나님께 드릴 실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제가 꼭 그랬습니다. 22살 헤어진 직후 저의 삶을 사로잡았던 문장입니다. 저에겐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드릴 열정적인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족드릴 성품과 신앙의 실력이 없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나름의 해법을 찾아나섰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면 성화가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실제 방언을 받은 이후 하루에 1-2시간씩 열심히 방언을 하며 반복적으로 불로 임하실 성령을 기대했습니다. 꽤 다양한 체험과 은사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내적치유 집회를 고민했습니다. 더 뜨거운 집회를 찾으러 서울의 교회와 당진의 기도원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저의 실력이 급상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얼마나 여전히 그대로며, 여전히 형편이 없었냐 하면, 목사가 된 이후에도 성품이 좋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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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의 논쟁은 결국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 율법과 할례가 수반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예수만으로 충분하느냐입니다. 베드로와 바나바마저도 (아마도 야고보마저도) 이방인들에게 적절할 정도의 율법과 할례는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바울은 그에 맞서서 할례를 받으면 안되고 예수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갈라디아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미 갈라디아교회 교우들 다수가 할례와 율법을 향해 넘어간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이 <할례와 율법>에 매력을 갖게 되었느냐의 문제입니다.

 

3장 1절을 보면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전형적인 <이방인>을 뜻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아마도 갈라디아 북부지역, 그러니까 이방인들만 살던 지역에 세워진 교회로 보입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유대인이라고는 거의 보지 못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 율법, 할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북부지역에 도착하여 이들에게 할례와 율법같은 바울이 보기에는 부차적인 것을 제외한 여호와 하나님, 창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과 같은 핵심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복음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에 따르는 영의 경험도 있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온통 이방인 밖에 없었던 갈라디아 교회 교우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이 등장했을 때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현대 서구인들이 불교나 인도의 힌두교 혹은 뉴에이지와 요가에 열광하는 것처럼, 그들은 지극히 유대적인 전통에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할례, 그리고 율법. 매우 매혹적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매혹적으로 여기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 스스로의 모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우상을 떠났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앙을 갖기 전과 갖고 난 이후의 삶이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짓교사들에게 배운 <할례와 율법>은 그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일류 신자이고, 자신들은 삼류 신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가르치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따라서 할례와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며, 훗날 자신들이 장성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바울 또한 아마도 할례와 율법을 가르쳤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마치 삼류 신자가 일류 신자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기저에는 바로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제대로 된게 맞나?”는 의문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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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젊은 세대를 보면 자기계발 정서가 지나치게 꽉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서 아래에서 자기학대와 자기혐오가 유독 짙게 똬리를 튼 느낌입니다. 따지고보면 그만큼 우리나라는 무척 빠르게 발전해왔습니다. 빈민국가에 불과한 나라가 백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선진국이 된 폐해는 각 개인에게 돌아갑니다. 상실감, 박탈감, 이전보다 둔화될 수 밖에 없는 성장속도로 말미암은 불안감이 저를 포함한 젊은 세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더 스스로를 학대하고 채찍질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랄까요. 하지만 이런 정서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만나봤던 50대에서 60대 어른들은 두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천국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나일롱 신자와 같고 별 고민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지만 실질적으로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불안감이 있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뭔가 누군가 (신앙적으로) 끌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자녀들에 대한 고민입니다. 자녀들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많으니, 결국 자녀들은 천국가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 가능한 신앙적인 교육을 강화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자녀 외의 다른 자녀들을 보고 부러움과 시기에 빠지는 경우도 꽤나 많습니다. 이처럼 현실에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거 맞나? 더 채찍질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들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도 “내가 (혹은 내 자녀가 혹은 내 가족이) 제대로 하고 있는거 맞나? 더 채찍질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신앙 또한 어떤 안정적이지 않는 불안의 영역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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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소환합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만을 듣고 움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말씀 외에는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인용된 아브라함 이야기의 배경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후손>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씨>에게 상속할 땅까지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00세가 되도록 <씨>가 생길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두 번의 실수를 통해 자신의 아내 사라를 타 국가의 지도자에게 빼앗길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아브라함을 구해주시지만 정작 <후손>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상상을 해봅시다. 100세가 되기까지 <후손>이 생기지 않는 그의 가정에는 응당 이 문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의 다툼이 있었을 겁니다. 누구의 문제일까요? 아브라함의 문제일까요? 사라의 문제일까요? 오늘날처럼 산부인과도 없으니 검사도 해보지 못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따라서 사라는 하나의 묘책을 제안합니다. 자신의 여종을 씨받이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당대 문화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묘책이었습니다. 사라의 여종인 하갈이 아브라함과 동침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손이 생깁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을 얼마나 좋았을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 문제가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내로 말미암았음을 드디어 증명해냈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통해 <후손>을 만들어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후손>만 생기면 삶의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행복의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발생한 것은 사라의 하갈에 대한 학대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이삭을 낳기까지 14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지난한 과정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묘한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가 아닌 여종 하갈에게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얻었으나,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약없이 또 기다리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점점 늙어가고, 생식능력은 회생될 가능성이 없이, 계속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썩 나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이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함으로 얻게 된 아들 이삭을 비교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여종에 불과하고, 이삭의 어머니는 자유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전형적인 상징적 성경해석을 보여주는 오늘 본문은, 여종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은 마치 율법과 할례에 여전히 목을 메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합니다. 반면 자유인에게서 얻은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합니다. 또한 (29절) 당시에 나이 많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던 것처럼, 오늘도 율법과 할례에 여전히 목을 메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만 붙잡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한다고 일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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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브라함을 생각해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한 자격과 요건을 갖추고 하나님의 백성의 커트라인을 통과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자격와 조건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통하여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내용을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선물로 받은 인물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인내입니다. 기다림과 인내의 과정은 결국 이 모든 경주의 주도권이 아브라함의 힘과 능력 혹은 조건과 자격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있음을 철저하게 깨닫는 시간들입니다. 그는 86세에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사라가 아닌 하갈과 동침해서 씨받이를 통해 자식을 낳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묘책 혹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드리는 절묘한 한 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100세까지 기다린 시간들은 자신의 묘책이나 한 수가 필요없음을 깨다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은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으로 초청합니다. 할례와 율법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완주하기까지 달리는 갈라디아 교우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갈이라는 육체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묘책 혹은 절묘한 한 수를 선택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더 엄밀하게 따지면 그가 선택하는 육체적인 방법, 묘책, 절묘한 한 수는 결국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함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할례를 받아봤자 그들에게 변하는 것은 1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 몇 가지를 더 지키고 수행한다 한들 그들은 단 1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갈라디아 교우들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자신의 힘과 능력, 조건과 자격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만이 이 기나긴 경주를 달리는 유일한 방법임을 절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바울의 말이 맞다면, 갈라디아 교우들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새롭게 바라볼 여지가 생깁니다.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제대로 된게 맞나?”는 물음은 오히려 복음의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성품이 좋아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악한 우리 안의 마음이 선한 마음으로 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제 잘못한 사람은 오늘 예수를 믿고 나서 내일 또 잘못을 합니다. 여전히 내가 이 모양인데도 예수 믿는 것이 맞을까요? 여전히 내가 엉망진창이고 구제불능인데 예수 믿는 것이 맞을까요?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례를 끌고 와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자격, 요건, 묘책, 신의 한수가 필요 없음을 깨달아가는 지난한 기다림의 과정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엉망진창에고 구제불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여정, 그리고 내 안의 선한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여정,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내가 그리스도인 된 이유는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다고 겸허히 고백하게 만들어가는 여정, 우린 이 여정을 <믿음의 여정>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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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교회 청년부를 담당하던  2019년 시절에는 신천지의 전방위적인 접촉을 마주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차후에 검증이 확실시된 신천지만 하더라도 3명이었습니다. 또한 1-2명은 여전히 신천지인지 긴가민가한 지체들이 교회 청년부에 등록하고 접촉했습니다. 그리고 3명 중의 한 명은 저와 진지하게 상담을 했고 그는 <교회 예배가 마음에 든다>는 말과 함께 신천지와 양다리를 걸치고 싶다고 해서 제가 그렇게 허락해줬던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론 정황상 그는 결국 신천지 집단숙소로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꽤 시간이 지난 후에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청년부에 설교해야 했습니다. 고작 15명 정도가 출석하는 교회에 3명-5명이나 돌아가며 접촉했으니 정신차리지 않았더라면 꽤 심각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고민 끝에 저는 신천지와 관련해서 이런 유의 설교를 했습니다. “더 신앙 좋아 보이려고 하는 욕심이 만든 참극” 기독교 신앙의 여정은 일종의 믿음의 여정입니다. 끝없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주도권을 점차 발견합니다. 또한 그 과정 가운데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는 섭리가 있음을 깨달아갑니다. 따지자면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때가 되면 자랍니다. 때가 되면 결실이 맺힙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 개인별로도, 교회에서도, 선교단체에서도, “더 노력해서 신앙 좋아보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합니다. 율법과 할례를 강요받은 갈라디아 교우들처럼, 우리 또한 다양한 훈련과, 봉사와, 교육을 강요받습니다. 마치 그렇게 살지 않으면 신앙에서 떨어져나가며, 신자가 아닌 것처럼 몰아가는 묘한 협박도 분명 따라옵니다. (저같은 목사들의 주특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따져보십시다. 이런 묘한 기독교 고유의 정서가 만들어낸 경쟁문화 속에서 꽃피는 것이 이단입니다. 이단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기존 교회에 다녀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 교회에 다녀야 구원받는다”입니다. 저는 이 문장이 우리 목회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을 받아야, 헌금을 내야, 봉사를 해야, 그래야 제대로 된 신자고 그렇게 살다가는 천국갈 수 있겠냐는 질문과 그 메커니즘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 내가 더 열심히 사느냐의 문제로 천국과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인간 특유의 오만함의 발현입니다. 까놓고 얘기해봅시다. 내가 예수 믿었습니까? 내가 목사되고 싶어서 목사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우린 모두 끌려다니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 죽음에 가까워올수록 우리의 입술을 지배하는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이 갖고 있던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제대로 된게 맞나?”는 물음, 그리고 그 물음과 함께 붙어다니는 “내가 더 노력하고 열심을 다하면 (할례와 율법을 곁들이면) 신앙이 좋아지고 구원에 가까워지겠다”는 오만함을 곁들인 답변은 여전히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단호히 거절하십시오. 그들은 여종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에 불과합니다. 이스마엘이 사라의 자식 이삭을 박해하고 괴롭힌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지극히 인간적이 구원론을 가진 오만한 그리스도인들지난하게 믿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믿음의 방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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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복음의 역설을 말하고 오늘 설교를 갈음할까 합니다.

 

(우리는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나면 어제까지 10이던 인격이 15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능력치가 50정도였던 우리의 삶이 60-70의 능력치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를 기꺼이 살아내는 것을 <능력있는 신앙>이라 여기는 풍조가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의 인격이 10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능력치가 50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10에 머물고, 50밖에 머무는 우리는 결국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불안함에 휩쌓이고는 할례와 율법과 같은 해답이지 않은 해답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복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요한계시록 설교>의 한 단락을 인용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억압이나 부정적 태도나 현실 부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물론 저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선하다거나 모든 것이 허용된다거나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규제나 규율이나 판단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근본적이고 압도적이며 영원히 고정되는 말씀이 “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예!”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십니까? “예!”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드릴 최고의 말도 “예!”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 10인 우리를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능력치가 50밖에 되지 않아서 50정도의 무게 밖에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의 기나긴 여정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바로 “10이어도 괜찮고, 50이어도 괜찮구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에 대한 확신이 점점 짙어집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여전히 22살 첫 연애의 실패 시절보다 그다지 좋은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끔은 그때가 더 뜨겁고 명료한 신앙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깊어지고 넓어진 이유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22살에는 저는 저 스스로의 부족한 성품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화를 내고 분노하는 내 모습에 더욱 화가 나고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내가 여전히 10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시간 속에서 여전히 10의 인격인 나를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덕택에 제 안에는 여유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화를 내고 분노할 때가 있지만 화를 내고 분노한다는 사실 때문에 화를 내고 분노하지는 않습니다. "아 내가 분노하고 있는구나”하고 넘길 수 있는 넉넉함이 생겼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저에게 “10에서 15로, 혹은 20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금 얄팍하고 성급한 10에서 조금 느긋하고 여유로운 10으로 성숙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너무 스스로에 대해 성급해하지 마십시오. 조금 느긋해지십시오. 느긋해지지 않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느긋해지십시오. 믿음의 기나긴 경주는 더 빠르고 강하게 뛰는 경주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오히려 인내하고 포용하는 느긋한 기다림의 경주입니다. 버티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버티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여전히 서두르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이 기다림이 만들어낼 선한 결실을 기대하고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십시오. 우린 이 여정을 <믿음의 여정>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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