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갈 3:16)

2021. 10. 31. 03:27

2013 신학과로 편입했습니다. 과정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교회, 교회 적응하려고 애를 쓰다가 실패했습니다. 다니던 교회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신대원 진학을 하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 지인들 중에 신대원 진학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신대원 진학에는 여러 절차가 필요합니다. 노회면접을 보고 전도사고시를 봐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상태에서, 또한 특정 목사님과 상담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대원에 진학하기란 매우 어려워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신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지만 저는 한때 기독교계의 유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글과 말을 통해서 기독교계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지고보면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신대원> 가지 않게 되었지만, 막상 <신대원> 가지 않게 되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유학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대원>에는 진학하지 않고 신학을 공부해서 유시민처럼 글과 말을 통해 기독교계를 갱신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전도사, 목사, 목회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28살에 신학을 시작하긴 했지만 24 혹은 25살부터 신학책을 접했습니다. 대학생활에 틈틈이 신학과 관련된 글들을 읽었지만, 막상 선교단체에서 1년간 대표생활을 해보니 여러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생각대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집단 또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생각 바깥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면들을 발견했습니다. 저의 여러 고민을 해결하기에는 기존 교회의 설교 혹은 선교단체의 가르침이 부족해보였습니다. 과정에서 신학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4 혹은 25살부터 신학책을 읽기 시작해 28살에 신학을 시작해서 기독교계의 유시민을 꿈꾸는 사람. 그런 저의 삶은 치열했습니다. 늦은 나이인 28살부터 신학을 공부했으니 더더욱 열심을 다했습니다. 하루에 100여페이지의 신학책을 읽고 정리하고, 글을 쓰고 공부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한 동시에, 또한 누구보다도 차가웠습니다. 저의 공부는 오로지 지식습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돌봐야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단지 교회에 부족한 것들을 지적하고 비판해서 여러 말과 글로 말미암아 교회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만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또한 전도사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학기 공부가 마친 무렵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돈이 부족했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했습니다. 기숙사비가 부족했습니다. 전도사를 해야만 했던 재정적 상황에서 결국 전도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머리에는나는 전도사, 목사를 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글과 말을 연마하기 위해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생각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

 

갈라디아서 아래에 깔린 논쟁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의 논쟁입니다. 혹자는 <율법>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혹자는 <그리스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당연 <그리스도>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1세기 유대사회를 생각해봅시다. 1세기 유대사회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입니다. 이들에게 <율법>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태어날때도 <율법> 근거해서 할례를 받고 규정을 지켰습니다. 자라나고 성장하면서 <율법> 배우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율법>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귀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율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하고, 율법을 배워야 하고, 적어도 최소한의 율법은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적어도 세례는 받아야 하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외워야 하고, 주일성수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이 <율법> 생각하는 기본적인 생각이라 있겠습니다. 이런 유대인들 중의 일부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과연 다르게 생각할 있었을까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율법> 필요없고 <예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있었을까요?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따져봐도 <율법> 모세에 의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율법>과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수십년 전만 하더라고 고신교단에서는 주일에 돈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되지 돈쓰는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할 있었을까요? 아니오,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한국교회는 오늘날은 느슨해지긴 했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술과 담배는 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술먹고 담배펴도 <예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되는건 맞는데 그래도 술담배는 안해야 되는거 아닌가? 그래도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당시의 다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만 믿으면 되는거랑 별개로 율법은 지켜야 되는게 아닌가, 또한 할례는 받아야 되는게 아닌가, 이방인들도 최소한 유대인처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그런 생각의 흐름이 팽배하던 시기에 바울이 외친 주장은 매우 급진적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율법은 필요없다, 할례도 필요없다"

 

-

 

여러분은 성경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관심이 많으신가요? 사실 저는 관심이 많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해석하고, 누군가는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이상해보였습니다. 올바른 정확한 어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실제 신학공부는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다룹니다. 처음 공부를 하면서 배우는 것은 성경해석의 정석을 배웁니다.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방법들을 배웁니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 해나가다보면 발견하는 것은 <이런 방법은 틀렸다> 말할 있을지언정, <이런 방법이 옳고 성경은 이렇게 해석해야만 한다>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3 16절은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바울의 설교입니다. 바울은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셨다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이런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한들> <율법> 통해서, <할례>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 되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을 보십시오. 정말 이상하게 성경을 해석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라는 단어를 보니 그의 자손이라는 단어가 <복수> 아니라 <단수>라는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과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읽기보다는, <아브라함과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누구냐면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바울의 창세기 본문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졌을까요? 아마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하물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말도 안되는 해석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물어야 질문이 있습니다. 바울이 굳이 유독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라는 단어에서 <자손> 단수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를 <그리스도> 읽게 어떤 은밀한 힘이 있지 않을까요? 힘이 무엇일까요?

 

-

 

28 7월에 처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70-80여명 정도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학생회 아이들은 적게오면 3, 많이 오면 8-9명까지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느낀 바에 의하면 신앙교육이 하나도 되어있는 아이들, 교회문화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아이들만 가득했습니다. ( 기억으로는 정도가 그나마 교회 다니는 애처럼 보였던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으로 이력서를 넣고 가려고 했던 교회는 대구의 도심지에 있는 꽤나 학력수준이 높은 교회였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면 수준 높고 격있는 설교를 하며 사역을 시작했을 같습니다. 마침 당시 면접을 담임목사님도여기 지적 수준이 높은데 사역 감당할 있겠냐?” 물어보셨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제가 부임한 교회는 전혀 반대의 교회였습니다. 다니던 아이들 다수도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설교는 쉽게 밖에 없었고 대화형으로 자유롭게 풀어갈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잡고 진지하게 설교를 했지만 어느새 주고 받는 방식으로 제가 가진 생각들을 나누는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공부와 거리가 친구들이었지만 정이 많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번은 밤새 라면을 끓여 먹고 이런 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군대이야기, 연애이야기 등등. 조금씩 친구들의 존재는 마음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기독교계의 유시민을 꿈꿨습니다. 말과 글을 통해 교회를 비판하고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눈에 밟힐수록 저는 목회자로 다듬어져갔습니다. 그냥 똑똑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조금 어렵게 설교하는 신학생에서, 점점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목회자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1 6개월 사역이 마칠 무렵 저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꿈에서 저는 <목회> 향한 부르심을 듣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과정의 기저에는 친구들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얼마전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사역지의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공부 밖에 모르고 사람은 모르던 저에게 사람을 알려준 친구들입니다. 사람이 없이 공부만 몰두하면 신학이란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사람을 알아야 진정한 신학공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친구들입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이후로 저는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끝없이 사람에게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단순한 논리력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웠습니다. 

 

-

 

바울의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요? 다메섹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뀐 그의 인생에 정녕 바뀐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교회 안에서 <다메섹 사건> 말할 때에는 매우 극적인 회심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제까지는 예수를 안믿고 교회다니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오늘부터 예수를 믿는 이들이 <다메섹 사건> 바로 자신에게 일어났다며 본인이 바울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는 다메섹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었고 다메섹 이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한 다메섹 이전에도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살았고, 다메섹 이후에도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다메섹 사건에서 바뀐 것은 무엇일까요?

 

다메섹 사건 이전의 그의 삶은 <배제하는 >이었습니다. 율법의 높은 잣대를 기준으로 해서 정결한 자와 부정결한 자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정결할 자격이 있는 유대인과, 정결할 자격조차 없는 이방인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야 한다> 차가운 논리를 바탕으로 그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을 배제하고, 따라서 중의 일부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이후에 그가 만난 것은 창녀와 세리와 문둥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포용하고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부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배제하는 > 아니라 <포용하는 > 살았습니다.

 

다메섹 사건 이전에 그를 지배한 것은 <논리>였습니다. 정결하지 않으면 않되며, 정결하지 않은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사건 이후 그를 사로잡은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을 사로잡은 것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다메섹 사건 이전의 잣대로 보자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들) 하나님의 백성이 자격이 없는 한낱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혹여나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도래한다면 이방인들은 모두 심한 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이후 바울의 눈에는 <하나님을 믿을만한 배경>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달려오는 귀한 형제자매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다시 3 16절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본문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만 상속자가 있다고 해석하는 반면, 바울은 유독 <그리스도> 통해서 상속자가 있다고 해석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뛰어나고 첨예한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신적 계시가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바로 성령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 시작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존재가 본문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

 

금일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전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있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교리를 한낱 편견으로 만든 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무엇일까요? 로마가톨릭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주장했고, 그에 반대하여 루터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옳은 교리를 주장해서 가톨릭교회보다 나은 올바른 가르침의 교회를 만든 것이 종교개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계기가 면벌부 사건의 시작은 바로 <로마가톨릭> <사제>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교회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평신도에게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로마가톨릭의 사제들만이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교육수준이 낮은 사제들은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라틴어는 우리로 말하자면 한문이라고 생각하면 같습니다.) 따라서 면벌부를 판매하고 그로 말미암아 연옥에서 가족을 구원할 있다는 부흥사들의 설교는 <교육받지 못하여 성경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 일부>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성경> 대중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라틴어로 성경을 독일어 평서체로 번역해서 누구나 읽을 있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의 분량이 많으니 성경의 내용을 요약한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독일어로 기록해서 모든 성도들이 스스로 배우고 익히게 만들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의 사제가 까라면 까는, 사실상 사제가 하나님을 대리하는 그런 권위주의적인 교회가 아니라, 직접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을 배우며 신앙이 무엇인지 익히고 배우는 민주주의적인 교회를 만들어냈습니다. 끝내 종교개혁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임을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평신도나 모두 동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

 

루터는 자신이 신부였습니다. 작은 학교지만 신학교의 교수의 직위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결과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신부의 특권, 신학교 교수의 특권을 내려놓고 일반 평신도들과 동등한 지위에 처하는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있는 바울도 유사합니다. 그는 유대인의 특권, 할례받은 자의 특권, 율법을 소유한 자의 특권을 내려놓고 이방인과 동등한 지위에 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와 바울은 닮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사제와 평신도는, 동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주일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바울을 생각해봅니다. 또한 루터를 생각해봅니다. 그들을 움직였던 것은 <사람>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들에 의해 종노릇을 하던 독일사람들이 눈에 밟혔던 루터, 유대인들에 의해 종노릇 가능성이 농후했던 갈라디아교회 이방인들이 눈에 밟혔던 바울, 그들의 이면에는 구체적인 <사람> 있었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위한 설교이기 이전에 사실은 저를 위한 설교입니다. 

 

새삼 고린도전서 13장을 떠올려봅니다. 방언과 천사의 , 예언과 비밀과 지식, 산을 옮길만한 믿음 등등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단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들 그것은 <사랑> 없으면 헛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전에 살펴봤던 고린도전서 강해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너보다 좋은 <나의 신앙> 따위는 없다는 겁니다. 내가 너보다 방언을 많이 하고, 내가 너보다 환상과 계시를 많이 보고, 내가 너보다 성령을 많이 받고, 내가 너보다 거룩하고 성결한 그런 류의 <신앙>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착각에 빠져있는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너보다 좋은 <나의 신앙>따위는 버리고 옆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다듬어가라는 권면입니다.

 

저부터 여러분들을 많이 생각해보려 노력하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여러분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를 써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서로의 지체들의 얼굴을, 또한 이름을, 또한 삶을 조금씩 기억해보도록 노력합시다. <> 없는 <>만의 신앙이란 없습니다. <> 함께 어울려가는 <우리> 신앙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과 루터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을 움직인 동력은 바로 그들의 눈에 밟히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었음을 말입니다.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