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받은 사건을 기억합시다 (행 8장, 10장, 갈 3:1-5)

2021. 10. 24. 02:30

교회에서 한 명의 목회자로 있다보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에는 이런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까?”, “어떻게 제자훈련을 해야 할까?”,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까?” 이 모든 질문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하면 그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시각을 갖고 교회를 보면 교회는 큰 교회가 좋습니다. 목사는 누가 봐도 목사다운 목사가 좋습니다. 설교는 누가 봐도 잘 짜여지고 잘 구성된 설교가 좋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생각이 점점 바뀌게 됩니다. 대형교회라고 해서 꼭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소형교회라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설교라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허접한 설교라고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반응이 없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고유한 스케쥴로 움직이십니다. 교회 사역을 하다보면 매번 느끼는 지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외성>을 갖고 일하실 때가 많습니다. 이를 극명하게 대조해서 볼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섬긴 70여명의 교회의 10명 안되는 학생회와 또 다른 하나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섬긴 450여명 교회의 20명이 넘는 고등부의 비교입니다. 기본적으로 중형교회의 고등부 아이들은 신앙훈련이 매우 잘되어있는 경우였습니다. 찬양팀 세션 자체가 전혀 달랐습니다. 수련회 준비도 처음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반면 10여명 안되는 학생회는 저와 처음으로 청소년 연합 수련회를 갈 정도였으니 전혀 토양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잘 훈련되고 신앙교육을 받은 것만 같았던 중형교회 고등부 아이들은 저에게 성경에 대한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하더라도 “전도사님 진짜 술마시면 안되요?”같은 교회 안의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물론 줄곧 진지한 질문을 보이는 친구들도 있긴 했습니다.) 반면 작은 교회의 학생회 아이들은 저에게 성경에 대한 질문을 매우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가끔은 그 질문이 너무 신묘막측하여 <현자>라고 불렀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 새삼 느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수행하는 신앙교육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점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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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기 전에 먼저 살펴볼 본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입니다.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진 그리스도교인들 중의 일부는 이방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중 한명은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평범한 이방세계가 아니라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두고 유대인들은 불경하고 더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8:5) 빌립은 담대하게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합니다. 사마리아의 남녀들은 빌립의 전도로 말미암아 (12-13)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는 기존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겁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남겨진 사도들은 회의를 하게 됩니다. (14-15) 그리고 그들은 상의 끝에 그들을 사마리아에 파송하고 결국엔 사마리아 사람들도 원래 본토 유대인들이 받았던 성령을 받길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특별히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17절) 그들이 실제 성령을 받습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불경하고 더러운 존재라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유대인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두 장을 더 넘어가보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입니다. (2절) 여기서 등장하는 한 이방인이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구제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지만, 유대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로 치면 세례는 받지 않고, 교회의 교인은 되지 않으려 하지만, 여전히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 되시오”라는 권면을 받으면 “아, 저는 유대인이 아닌 것이 좋습니다. 그저 이방인으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환상이 임합니다. 그 환상의 핵심 내용은 이방인 고넬료를 유대인이 아니란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 고넬료의 친척들과 친구들, 이른바 이방인들이 모인 장소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설교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날 때에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44-45)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에 할례받지 않았던, 율법을 따르지 않았던, 유대인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던 할례 받은 신자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보고 깜짝 놀라기 시작합니다. 할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성령받는게 눈에 보이는건가?” 네, 사실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방언>과 같은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영적 체험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8장과 10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순수 유대인들이어야, 순수 할례받은 유대인들이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고 헌금을 해도 고넬료와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과 10장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경험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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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교회에서는 무척 힘든 일들이 간헐적으로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2018년 1월의 어느날로 기억합니다. 여러 상황이 복잡했습니다. 사정상 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의 고등부 사역을 마무리하고, 2018년부터 청년부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새로운 고등부 사역자가 제대로 적응을 하기도 전에, 고등부는 2018년 1월에 오사카로 비전트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응당 새로운 사역자를 구하는 기간동안 저는 모든 비행기편과 스케쥴들을 다 정리하고 기획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당시 섬기던 교회와, 저희가 방문하게 될 오사카 교회 사이의 30주년 행사까지 겹치게 되어서 여러모로 무척 힘든 일들만 가득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뭔가 막막하던 순간, 또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인정을 못받고 오히려 의심과 비판만 듣던 순간, 한 집사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기억이 납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어떤 행사가 끝나게 되어서 잠깐 짬을 내어 이야기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섬기던 고등부는 독특하게 중3부터 고3까지 있었는데 저랑 대화를 나누신 집사님의 딸은 저랑 함께 중3부터 고1까지 2년을 보냈던 친구였습니다. 설교 할 때에도 별 표정이 없어보이고, 평소에도 저랑 별 얘기를 하지 않는 친구였는데, 문득 12월 어느날 어머니께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홍전도사님 설교가 좋아. 이제 청년부로 올라가셔서 아쉬워. 그래도 오사카에 같이 갈 수 있어서 참 좋아”

 

사실 저는 경상도 남자라 그런 얘기가 낯간지럽습니다. 또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 날만큼은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잠이 안올만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습니다. 무척 힘들고 위로받고 싶었던 시절이였기에, 그 짧은 대화가 무척 위로가 되었던 탓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처지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애들이 설교를 듣고 있나? 신앙이 자라고 있나? 등등의 의구심에 대한 답변을 들은 것 같았습니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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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로 돌아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유대인>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힘껏 외칩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유대인의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겁니다. 이제는 유대인이 아니어도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으니 유대인의 특권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2절)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아니면 듣고 믿음이냐? (우리말로 의역을 하다보니 느낌이 안사는데 원래대로라면 율법 행위냐? 아니면 믿음 들음이냐?의 어순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실제 대립하는 쌍은 <율법>과 <믿음>입니다. <율법>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할례>를 통과하여 능동적으로 성취하고 얻는 무언가입니다. 반면 <믿음>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무엇을 수행해서 얻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단순히 <들음>이라는 수동적인 과정을 통해 수여받는 무언가입니다.

 

앞에 언급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상기해보십시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사마리아 사람이건, 이방인이건, 그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들이 유대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유대인의 특권을 내려놓는 바울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갈라디아서 3장의 이야기는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령은 획득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어지는 것입니까? 성령은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거저 받는 것입니까?

 

이런 갈라디아서 3장의 이야기는 28절에서 완성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을 뿐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을 뿐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종의 계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집에 사느냐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느냐에 따라서 계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성령을 받는 사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 안에 그 어떤 계급도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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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얼마전 작고하신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나쁜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고인에 대해서는 공과 과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저는 그가 남긴 한국교회의 유산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애초에 그는 천막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가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천막교회에 몰려온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 도저히 살 길이 막막했던 사람들, 병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입니다. 말 그대로 그때 당시에 <민중>이라 불리웠던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당시의 조용기 목사는 <민중>의 목사였습니다. <민중>의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해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동력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부어진 성령체험이었습니다. 솔직히 생각해보십시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는 계급차가 존재합니다. 학벌이 높은 사람과 국민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들 사이에는 지식의 격차가 존재합니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촌놈과 도시에서 적응한 사람들 사이에는 문화적 격차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용기 목사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도 방언하고, 가난한 자도 방언을 했습니다. 촌놈도 도시사람도 방언을 했습니다. 학벌과 별개로 성별과 별개로 방언을 했습니다.

 

특별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아주머니 구역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식했습니다.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집안에서 하대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던 동네 아줌마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자에게도 주는 성령, 똑똑한 사람에게도 주는 성령, 잘나가는 사람에게도 주는 성령을, 그들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격과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 받았다는 감격만으로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교우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찾아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사역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극히 나뉘어집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초기에 행했던 민중들을 위한 사역, 그리고 그들에게 부어졌던 성령의 압도적인 능력만큼은 한국교회사에서 정말 정말 중요한 기념비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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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의 아줌마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힘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별개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학벌을 중심으로, 돈을 중심으로, 직급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줌마들에게 임한 성령은, 세상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에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구분에 따르면 세상은 여전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방식으로,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방식으로, 종과 자유인을 나누는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는 거짓교사들이 여전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는 문화를 들고 들어와서,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으니 (혹은 유대인들을 더 좋아하시니) 유대인들이 태생적으로 이방인들에 비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성령 받은 사건>을 기억해보라고 말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나타나있듯이 성령은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나타나있듯이 성령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나누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령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자는 겁니다. 자꾸 세상에서 만든 틀로 서로를 보지 말자는 겁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민족의 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틀, 종과 자유인이라는 계급의 틀로 서로를 보지 말자는 겁니다. 세상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그대로 두더라도,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방식을 기억해보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면,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모든 틀을 깨고 함께 동등한 존재로 평등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외침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꿈꾸는 교회의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저처럼 젊은 사역자들은 젊은 청장년을 중심으로 탄탄한 교회를 꾸리는 꿈을 꾸곤 합니다. 역동적이고 에너지있는 마치 군사처럼 조직화된 교회를 꾸리는 꿈을 꿉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연구할수록 그런 동아리, 그런 선교단체는 가능할지언정,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모든 사람이 쉽게 올 수 있는 교회입니다.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졌다 한들 쉽게 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의 정체성을 알았다한들 크게 개의치 않는 교회를 꿈꿉니다. 한명의 장애가 있는 지체가 쉽게 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를 위해 배려가 필요하다면 누구든지 알게 모르게 조심스럽게 배려해주는 교회를 꿈꿉니다. 저는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나아가는 할아버지와 민주화를 울부짖는 586이 함께 공존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래디컬 페미니즘을 꿈꾸는 여성청년과 반페미니즘에 열을 올리는 남성청년이 공존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삶의 모습이 달라도,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는 모습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의 원동력은 하나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건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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