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5]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

2021. 3. 25. 12:02
[그리고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한복음 7:53-8:11, 새번역)

 

저의 첫 번째 수련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된지 6주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교회에 아직 적응이 안된 상태였습니다. 교회생활이 아직 영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친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를 전도했던 친구는 수련회에 가면 많은 이들과 친해진다고 저를 꼬드겼습니다. 더군다나 3박 4일 물놀이를 가는 여정에 1만원 회비만 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생애 첫 여름수련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첫 수련회의 저녁집회는 아비규환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딱 첫눈에 보기에도 잘 놀게 생긴 1살 어린 여자애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습니다. 갑자기 교회에서 아줌마들이 뛰어오더니 그 친구에게 손을 얹고 다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괴성도 들렸고 또 한국말이 아닌 이상한 소리들로 예배실이 가득 차버렸습니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여긴 사이비다, 잘못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상하고 기묘했던 밤을 두 번이나 더 보내야했습니다.

 

수련회 밤의 끔찍한 경험이 저를 교회를 떠나게 만들진 못했습니다. 일단 도망치기엔 너무 깊은 산속 기도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수련회의 모든 시간이 저녁집회와 같은 기괴하고 요상한 시간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임도 하고 미션수행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간식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단히 신나고 재밌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교회의 문화와 분위기에 적응이 되어갔습니다. 그만큼 저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결정적인 시간은 바로 마지막 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3박 4일이 아닌 2박 3일의 수련회였다면 이후에 교회를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겐 마지막 세 번째 날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저녁에는 마침 저의 마음이 그 어느때보다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각자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할 말을 준비하는 동안 이상한 경험 하나를 하게 되었습니다. 6살에 선교원에 갔던 기억, 7살에 기독교 유치원에 갔던 기억, 그리고 교회에 다니지도 않았던 때에 예수님으로 추정되는 환상 비슷한 것을 하늘에서 본 기억, 또 초등학교때 교회에 다닌 기억, 중학교때는 미션스쿨에 가서 반에서 2-3명 선발된 학생이 되어 특별 성경공부를 받았던 기억. 정말 보잘 것이 없고 우연에 불과했던 조각조각의 흔적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영화필름처럼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이내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내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미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날 이후로 명확하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확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저는 밝아졌습니다. 또한 생각보다 삶이 즐거워졌습니다. 생각보다 자신감있게 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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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제 이야기를 멈추고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독 ‘성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들이 곧잘 등장합니다. 마태/마가/누가에서 예수님은 일생에 성전에 한 번 방문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마태/마가/누가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일대기는 갈릴리라는 변방에서 선생으로 명성을 쌓은 이후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그 파문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신 이야기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변방에서 중심지로 이동하는 기존의 일대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합니다. 유대인의 명절, 즉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성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기에 예수님은 세 번이나 성전에 방문하십니다. 어쨌건 오늘 본문은 온 백성이 모인, 아마도 명절에 성전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백성이 다 모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정말 일어나야 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송축하는 멋진 장면이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나 전달해줍니다. 음행 중의 잡힌 여자(10:3)가 등장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를 끌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율법의 전문가들인 이들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해설을 덧붙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어서 이렇게 질문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를 요한복음 저자는 알려줍니다.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매우 이상하다는 늬앙스를 받아야 합니다. 1)왜 하필 성전에 온 백성이 모였을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을까요? 그렇다면 그 여자는 성전 한 켠에서 간음을 저지르고 있었을까요? 더 나아가 2)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남자는 없을까요? 어쩌면 그는 이미 부패해버린 성전의 제사장이었기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의도적으로 그를 눈감아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제가 이해가 안가는 것은 3)명절에 온 백성이 모인 장소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는 백성들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왜 한낱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시험’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일까요?

 

가끔 신문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사건의 본질을 덮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유사합니다. 온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여든 명절로 보여지는 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서, 고작 예수를 고발하고자 종교지도자들이 ‘여인’ 하나를 끌고 와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라 소개하며 그가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는 장면. 오늘 사건의 본질은 도대체 종교지도자들은 어디에 관심이 팔려있느냐, 도대체 명절에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모여서 무얼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보다 더 중요한, 요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울려퍼지는 질문은 유대인의 명절에 성전에서 온 백성을 향해 가르치고 있는 예수, 더 나아가 종교지도자들이 넘어트리기 위해 온갖 술수를 꾀하고 있는 예수는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말초신경을 잡아끄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일종의 영화에서 맥거핀과 같습니다. 그가 정녕 간음을 저질렀는지, 누구와 저질렀는지, 그가 누구인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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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금요일에는 한 친구 두 명을 만나고 왔습니다. 벌써 11년째 만나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C.C.C. 선교단체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C.C.C. 출신 지체들이 많으니 설명을 하자면 매년 2월 어간이 되면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는 1학년을 훈련시키는 수련회 코스가 있습니다. 4명에서 5명을 한 조로 묶고, 3학년 혹은 4학년 선배들을 각 조를 담당하는 선생으로 지정합니다. 그러면 선생을 담당하게 되는 선배들은 그 기간동안 자기에게 맡겨진 곧 2학년이 될 1학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을 신앙적으로 훈련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11년째 만나고 있는 친구들은 바로 여기서 만나게 된 이들입니다. 저는 당시에 26살, 이 친구들은 21살. 2010년 2월에 이어진 관계가 벌써 지금껏 지속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들은 신앙의 깊은 방황을 겪고 여전히 광야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깊은 방황을 겪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선교단체입니다. 저는 C.C.C. 선교단체에서 이단아나 다름 없었습니다. 단체가 추구하는 방향보다는 성경과 기독교가 옳다고 말하는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함께 사역하는 리더쉽들과 담당 사역자가 저의 생각을 인정하고 이해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가 다니던 대학의 선교단체를 1년간 책임지게 되면서 ‘사랑과 용납’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세웠습니다. 훈련이라는 미명 하에,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갈구거나 정죄하거나 혼내지 말자고 마음을 먹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1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가끔 갈구거나 혼낼 때도 있었습니다.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에게 갈구거나 혼을 내고 있다면 그것이 정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똑같이 갈궜던 기억이 납니다. ‘야 갈군다고 그게 되냐?’

 

지금도 연락하는 그 친구들이 우연히 저희 대학교 선교단체에 놀러와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몇 번이나 놀라며 계속 질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그래도 되요?’ 그 친구들과는 꽤 오랜기간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의 고민은 단 하나였습니다. 처음 예수를 감격적으로 만났을 때, 처음 교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처음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때는 모든 것이 감사했고 행복했고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모든 이들도 자신을 사랑으로, 용납하고 이해해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먹은만큼, 또 책임을 더 하는 위치에 올라가는 만큼, 사랑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죄가 대신하고 있었고, 용납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판단이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괴로웠던 것은 자신들도 쫓기는 나머지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다른 이들에게 혼을 내고,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저는 돌려 말했을 것 같습니다. 잘 구슬려 말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제가 지금보다 더 직선적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야. 예수님이 널 위해 죽었는데 왜 너는 예수님 이름 빌어서 다른 사람 정죄하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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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새벽기도 설교 본문으로 레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다룬 이유는 간단합니다. 잘 몰라서 공부하면서 설교하려고 레위기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생각보다 어려워서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레위기는 창세기/출애굽기와 민수기/신명기 사이에 있는 책입니다. 이렇게 다섯 권의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하는데, 모세오경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책입니다. 핫도그에 비유하자면 소세지, 햄버거에 비유하자면 패티와 같은 부분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 중에서도 가장 중심은 레위기 16장입니다. 모세오경의 가장 알짬, 소세지 중에서도 소세지, 패티 중에서도 패티를 고르자면 레위기 16장입니다. 레위기 16장은 무엇을 다루고 있을까요? 바로 1년에 한 번씩 있는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속죄일은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지었던 죄의 흔적들을 제사로 깨끗하게 씻겨내는 시간입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질 않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1년동안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흔적이 되어 성전 전체를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진만큼 하나님께서도 성전에 오시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속죄일은 그런 개념 하에서 알게 모르게 쌓인 죄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씻겨내는 제사를 지내는 날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대청소를 하는 날입니다. 침대도 들어내고, 장롱도 들어내고, 책장도 들어내고, 보이지 않았던 먼지들과 때들을 구석구석 씻기는 날입니다. 이렇게 속죄일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온 백성이 모여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새출발’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속죄일 제사만 그런 것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죄인이 성전으로 나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새출발을 위함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죄인을 성전에 데리고 나아온다면 그 이유도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새출발 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성전은 정죄를 위해 있는 장소이지 않습니다. 성전은 심판을 위한 장소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계신 성전이 죄인을 위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새로운 출발.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지으시고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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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철저히 성전이 오해되고 곡해되며 오용되는 장면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왜 성전으로 끌려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법정에 가면 될 일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봅시다. 여기서 예수님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자면 그도 어쩔 수 없이 돌로 쳐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성전에서 ‘돌을 던져 저 여인을 치라’고 해서 여인을 시체로 만들어버린다면, 성전에서 사람을 죽인 자, 이른바 성전을 더럽힌 자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여인을 그저 살려줄 방법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듣고 자신 또한 죄 있는 자라고 여겼을까요? 아마 그렇진 않았을 겁니다. 스스로 당당한 의인이라 여겼을 겁니다. 더군다나 유대인의 명절이라 정결례를 완벽히 지켰을테니까요. 하지만 성전에서 그 여인에게 돈을 던져 심판할 권세가 자신에게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았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을 들은 대중들이 바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겁니다. 성전에 하나님을 경배하러 나아왔는데, 어느새 자극적인 사건에 휘말려 그 여인을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일로 말미암아 가책을 느꼈을 겁니다. 어쨌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신 이후에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십니다. 매우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왜 쓰고 계신 걸까요? 뭐라 쓰신 걸까요?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지은 죄들을 적고 계셨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열쇠는 10절입니다. 예수님과 여자만 성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홀로 남겨진 여인에게 나아가 묻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없다고 말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성전에서 죄를 지은 여인과 독대한 예수님, 성전에서 죄를 지은 여인에게 새출발을 명령하시는 예수님, 이 장면은 한 인간의 장면이지 않습니다. 성전이 애초에 지어졌을 때 의도했던 그 모습,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셔서 죄를 범한 인간을 만나주시고는 ‘정죄’가 아닌 ‘새출발’을 약속하는 그 모습이 바로 요한복음 8장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던 다양한 요한복음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8장 또한 이 인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에게 성전에서 새출발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인간 예수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장면’은 매우 인상깊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출발을 약속하시며 주셨던 돌판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직접 새겨진 십계명이 있습니다. 새출발을 약속하시며 십계명을 직접 기록하신 하나님의 손가락이, 요한복음 8장 본문에서는 여인에게 새출발을 약속하기 전에 땅에 끄적인 예수님의 손가락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단순히 용서를 말하는 본문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본문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참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오셔서 성전에 입성하신 이후에 죄를 범한 한 인간에게 새출발을 약속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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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본문은 사실상 성전의 실패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의 실패를 말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명절로 말미암아 성전에 모여들었지만 참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는켜녕 오히려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말은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새출발을 약속하는 성전은 한 여인의 인생을 종결시키는 장소가 될 뻔 했습니다. 또한 친히 인간으로 자신이 거할 성전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인간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추방당할 위기에 놓일 뻔 했습니다. 이는 1세기 당시 유대인 종교체계만의 이야기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실상 선한 취지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실제 선한 정신을 고스란히 담는 것에는 대부분 실패합니다. 개신교도 선한 의도로 출발했고, 감리교도, 구세군도, 오순절도 선한 의도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선한 의도로 출발했던 성전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쫓아낼 뻔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또한 새출발을 약속해야 하는 성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종결지을 뻔한 사건 또한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예배는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취지 하에 모여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한국교회 일부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제가 앞서 말했던 10년이나 된 친구들의 이야기처럼, 처음에는 선한 취지로 으쌰으쌰하기 시작했으나 결국 예수의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어느새 괴물이 되어버린 교회 리더쉽들의 문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예수가 하나님이시다’는 극단적인 선언은 모든 종교적인 제도와 습관/의례들을 상대화시킵니다. 성전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교회건물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도 목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더욱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명절, 정기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가치들, 예컨대 주일성수, 헌금생활, 교회봉사, 혼전순결 등등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그 어떤 것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은 인간이 지은 것으로 여전히 타락하거나, 변질되거나, 오남용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변질되거나 오남용 될 가능성이 다분한 인간의 모든 것들이 갱신되고 회복되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성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교지도자들과 성전의 타락을 증명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지도자다운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못하던 때에, 성전이 성전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타락하고 변질되며 오남용된 종교 속에 한 여인이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친히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변질되며 오남용된 종교의 다리를 건너 직접 그 여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새출발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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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오늘날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한국교회의 모습, 제대로 된 목회자 한 명 찾아보기 힘든 모습, 선한 의도로 출발했던 교회의 봉사와 헌신과 선한 행실들이 모두 자기의와 자기애로 똘똘뭉쳐 난파하고 있는 모습.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대인의 명절에,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오실 거룩한 성전에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장면은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한국교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제대로 된 목회자 한 명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 아니 제대로 된 설교 한 편 듣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선한 의도로 섬김과 봉사를 하려고 하지만 섬김과 봉사의 귀결이 결국 자기자랑으로 끝나버리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해답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성전체제, 하나님을 시험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던 종교지도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절기에, 바로 직접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입니다. 성전의 타락과 부패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철저히 기득권으로 전락해버린 종교지도자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종교적 기념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더군다나 여기 성전에 끌려와서 돌을 맞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주목하십시오. 타락한 성전, 부패한 종교지도자들, 유대인의 절기에 차오른 그릇된 종교적 열정으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한 여인의 모습을 주목하십시오. 타락한 성전에, 부패한 종교 기득권들 속에서, 전혀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기념일에, 바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이 여인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죽을 시점만 기다리고 있었던 사연많을 법한 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새출발을 허락하십니다.

 

때론 타락해버린 오늘날의 교회가, 때론 기득권이 되어버린 부패한 목회자들이, 자기의와 자기애로 똘똘뭉쳐진 오늘날의 종교적 이벤트들이, 우리의 삶을 결코 구원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 여인을 만나준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이 이야기 또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새출발을 선언하신 이야기처럼, 우리 삶에도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연과 부패해버린 종교적 체제를 넘어서, 바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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