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3] 사마리아 여인

2021. 3. 7. 08:31

여러분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란 사실을 믿으십니까?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모든 인간에게 사랑을 부으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으십니까? 저는 오늘 새로운 개념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하나님의 당파성이란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사랑을 부어주는 분에 머물지 않습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시고, 특별히 누군가를 편애하시는, 하나님은 당파성이 짙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쏟으시는, 가난한 자를 편애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이 있는 여인과 과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과부에게 마음을 쏟으시는, 과부를 편애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있는 자녀와 고아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은 고아에게 마음을 쏟으시는, 고아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책상 속의 이론에 가깝습니다. 실질적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는 장면은, 철저히 당파적인, 철저히 편애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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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에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살펴볼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명을 겹쳐 배치하여 서로를 비교하며 제시합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입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이방인 여성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나선 사람입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과 은밀한 접선을 가집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정오에 예수님과 독대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독대는 먹을 것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급하게 대화가 종결됩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작가의 기발한 솜씨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여기 가장 신앙적이고, 가장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만 같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모범이 되고 정점에 있는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반면 여기 가장 신앙으로부터 떨어져있고, 저주를 받은 것만 같은, 인생이 풀리지 않아 남편 다섯이 있고 지금 있는 남자는 남편조차 아닌,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익명의 사마리아 여인 있습니다. 철저히 극적인 대비효과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일어난 시간은 여섯 (4:6)입니다. 이를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로마시간으로 계산한다면 (문자 그대로) 저녁 6시입니다. 반면 이를 유대시간으로 계산한다면 정오입니다. 저는 정오라고 읽겠습니다. 정오에는 우물가에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주로 물을 긷는 시간대는 아침 6 이전 혹은 저녁 6 이후입니다. 따라서 정오에 우물가는 매우 조용한 장소에 가까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홀로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장소로 우물가를 선택하셨던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마리아 여자 사람이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도 당황스럽지만 사마리아 여인도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아무도 없을 알고 물을 길으러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 남성이 사마리아에 있는 우물가에 있는 생경한 상황을 마주합니다. 아무도 것을 알고 쉬고 있던 예수님 또한 사마리아에 있는 우물가로 다가오는 여인네의 복잡한 발걸음을 마주합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정오의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오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나름 배려를 담아 이렇게 묻습니다. “물을 달라

 

생각해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는 남성이 우물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약간의 경계심이 생겼을 겁니다. 유대인 남성이 자신을 해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물을 달라 말을 듣고 나름의 경계를 있었을 겁니다. “ 목이 말라서 우물가로 유대인 남자구나그러자 괜히 어깨를 슬쩍 올리며 넌지시 물었을 겁니다. “아니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참고로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개의 길을 가게 됩니다. 유대인 왕족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제국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훗날 그들은 고레스왕의 타민족 정책으로 말미암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들의 후손을 우리는유대인이라 부릅니다. 반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고향에 남겨졌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그들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다른 타민족과 결혼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혈통이 완전히 섞여버립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조선족 같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우리와 같습니다. 그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부정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사마리아인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혈통이 섞인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된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달라고 하는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께 작게나마 갑질이라도 하려 했던 같습니다. ‘아이고 높으시고 고결하시며 하나님 앞에 유일한 의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 양반, 얼마나 그렇게 목이 마르면 이렇게 하찮고 더럽고 불결하며 하나님께 벌받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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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시절 선교원, 기독교 유치원을 거치며 신앙을 배웠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며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물론 초등학교때 1-2 잠시 교회를 나간 적이 있지만 부끄럽고 수줍음 많은 저에게 대표기도를 시켰다는 이유로 교회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당시에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안풀렸습니다. 뭔가 답답했습니다. 신이 있다면 나와서 해명해보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앙을 가지면 인생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교회다니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 너네 교회 여자애들 예쁘냐?” “ 너네 교회 예배 끝나고 축구하면 재밌냐?” 그렇게 저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인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미묘한 의문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중심이 그렇게 순결하고 고결하고 정결하진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저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교회의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남중-남고 테크트리를 타던 저에게 여자애들이 마디 관심의 던져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선생님이나 전도사님이 떡볶이나 돈까스를 사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처음으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수련회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열광적인 분위기가 낯설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미묘한 경험을 하긴 했지만 신앙이 굳건해질만큼 강렬한 체험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수련회를 가게 되면서 교회를 떠나기엔 너무 많은 아이들과 친해져버렸습니다. 특히나 여자애들과 너무 친해져버렸습니다.

 

외에도 제가 교회에 다니게 이유, 신앙에 대한 열망이 생긴 이유, 전도사가 되기까지의 이유 중의 사소하고 얼척없고 하찮은 이유들을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말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내가 그때 야자시간에 자리를 옮겨다니다가 교회 다니는 친구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교회다니는 친구의 교회가 우리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교회에 갔는데 여자애들이 예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교회 시장의 떡볶이나 돈까스가 맛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하찮고 미묘한 사건 하나 하나가 정확하고 명확하게 아다리가 딱딱 맞았습니다. 제가 진지하게 신앙을 갖고 목회자의 소명을 키우기까지 제가 물고 파닥파닥 여지의 매력적인 떡밥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친구들과 하는 축구, 오락실, 당구, 모든 것들이 제가 교회에 다니게 이유, 신앙에 대한 열망이 생긴 이유, 전도사가 되기까지의 이유 중의 매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두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우연은 바로 하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무엇인가 아다리가 딱딱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것은 하나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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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건 철저히 우연입니다. 의도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발언과 행적을 능히 알고 있고 이를 충분히 곱씹은 이후 나름의 판단을 갖고 찾아간 니고데모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정오에 우물가에 가면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불편한 유대인 남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불편했기 때문에 그는 신경을 긁는 발언을 밖에 없었습니다. 고결하고 위대한 유대인 남성분께서 하찮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는 미묘한 순간에 하고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기분 나뻐하시지 않고 대화의 주제를 전환해버립니다. “내가 누군지 알면 네가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목이 말라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을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유대인 남성이, 겨우 허세를 부린다는 정도로 사마리아 여인은 생각했던 같습니다. 그리곤 넌지시 자신이 하찮은 사마리아 아낙네처럼 보이더라도 나름 신앙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듯이 말을 내뱉습니다.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생수를 어떻게 구한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우물은 조상 야곱이 선물인데 혹시 당신은 야곱보다 큽니까?” 대화가 진전된 같고 진지해진 같지만 기본적인 어조는 비꼬는 늬앙스입니다. 허세를 부리지 말라는 겁니다.

 

분명 성령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받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물론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이중의미를 띄고 있습니다. 실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수, 성령을 받아 영생을 누리고 그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해갈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고백은 매우 진실된 강청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맥락만을 따졌을 때에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비꼬는 늬앙스입니다. 우물은 깊은데 그릇도 없는데 그런 물까지 능력이 있다면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아있냐는 겁니다. 한낱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냐는 겁니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제발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비꼽니다. 허세는 접어두고 물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것에 가까운 늬앙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늬앙스에도 굴하지 않고 대화의 주제를 바꿉니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남자가 있지만 남편이 아니라는 그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그제서야 사마리아 여인은 비로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목이 말라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부탁하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남성이라 생각했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비로소 그가 선지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물어봅니다.

 

유대인들 말처럼 예루살렘 산에서 예배해야 됩니까? 아니면 우리 사마리아인 전통처럼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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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하라(4:24)” 구절을 우리는 교회에서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개역성경에서는 이를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번역했습니다. 4 24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성령을 의미하는 프뉴마와 진리를 의미하는 알레떼이아 안에서 예배하라. 개역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번역은 많은 오해를 양산했습니다. 마치 대부분의 종교에서 제사의식의 요구처럼진정성 갖고 예배해야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론 그런 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영적 능력이 예배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치 요한복음 4 24절은 기도 빡세게 준비하고 금식도 하고 엄청 성결한 일사각오의 자세로 예배해야 된다는 것처럼 오해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24절에 기록된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하라는 말은 21절에 기록된 안에서도말고예루살렘 안에서도말고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곁들어 읽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핵심 질문은 하나입니다. ‘어떤 장소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질문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니고데모의 질문과 비슷한 맥락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 질문입니다. 하고 준비해야 하나님께 예배할 있느냐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장소가 사마리아 전통에서 고수했던그리심산 아니란겁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전통에서 고수했던예루살렘 아니란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장소에서 예배드려야하냐 장소는 오직 진리와 성령입니다. ,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엽적인 논쟁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중요한건 내가 어디서 예배하느냐, 어떻게 예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정말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은 무엇일까요? 23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나니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자꾸 장소를 묻는데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시간이 도래하면 어디서나 예배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 때라지금 시간이 왔습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배할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시간이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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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후렴구를 좋아하는 찬양입니다만 앞부분의 가사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이 있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라는 곡입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예배자 내가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이는 철저히 요한복음 4장의 메시지를 곡해한 가사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성을 다해 열심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분이고, 사람이 예배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런 열심의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이는 철저히 사역자의 마인드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갈 있을까?”라는 질문은 뒤로 한채로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이 예배를 똑바로 드리지 않고 신앙적이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역자의 스트레스와 사역자의 마인드가 고스란히 박힌 요한복음 4 본문에 대한 해설이 곡의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4 23절이 말하는 바는 매우 간명합니다. ‘인간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옳은 예배입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사마리아 여인, 여기다 덧붙이자면내가 어떻게 해야 신앙적인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니고데모와 같은 대다수의 종교인들의 질문이 모두 틀렸다는 겁니다. 인간이 어떻게 해야 예배자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핵심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나서시고는 그를 예배자로 세우신다는 겁니다. 예배자가 되는 문제는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문제가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세우시느냐 문제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4 23절이 말하는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아버지 누구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까? 바로 인간, 유대인 남성 예수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정오에 우물가에 찾아온 우여곡절의 사연을 가진 사마리아 여성을 만나서 예배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바로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요한복음 3장처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대화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마리아 여인이 전혀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는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한 대화가 요한복음 4장에는 결실을 거둡니다. 한낱유대인 남성 불과했던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선지자라는 고백을 이끌어냅니다. 걸음 나아가 예수님은 마지막 결론을 말해줍니다. 26절입니다. ‘내가 그라이는 25절에 근거하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걸음 나아가면 ‘I am who I am’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적에내가 바로 그라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여기 인간 예수로 나타났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결국 사마리아 여인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게됩니다. 사마리아 여인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마리아인들 모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4:42)”

 

요한복음 4장은 철저히 사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를 설득하시고 그를 믿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허세떠는 목마른 유대인 남성 따위로 오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대화와 화제를 전환하며 끈질기게 설득해내서 그에게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는 끝내 사마리아 여인을 예배자로 세우시는 이야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요한복음 4 23 후반부를 읽어볼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수라는 인간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직접 찾아나서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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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순절이란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매주 반복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 희생, 십자가,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이는 철저히 기독교 복음의 역설적인 측면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실 적에 영광스럽고 고귀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한낱 노가다꾼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찬란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지 않고 고난과 희생,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 요한복음은 역설적으로 고난과 희생,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장면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보잘 없는 인간을 통해 오신 하나님 사랑의 신비, 이러한 역설은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대조적인 장면을 통해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보잘 없는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종교 기득권을 가졌던 니고데모에겐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보이질 않습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복음의 역설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 또한 보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사마리아에 사는 여인,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같이 살고 있는 남자조차도 남편이 아닌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역설적인 하나님 사랑의 신비가 경험됩니다. 그를 만나셔서 차근차근 설득하시고는 예배자로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가 그의 삶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삶이 날로날로 흥왕하며 성공의 최고점을 찍고 있습니까? 다행입니다. 되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갈수록 삶의 우여곡절이 많으며 못할 사연과 눈물과 신음을 삼킬 날들이 늘어납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수치와 고난을 당한 장면이 어느때보다 영광스러운 장면이라 말하는 요한복음은, 사연많고 기구한 한낱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예배자로 세워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초라하고, 눈물과 신음으로 가득찬 사연많고 기구한 우리의 삶의 터전에, 사마리아 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방문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편애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편애하신 하나님께서 보잘 없는 우리의 인생 또한 편애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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