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6]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2021. 3. 28. 03:42

성경본문 : 요한복음 9:1-41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꿀 수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명한 명사들을 모셔와서 강의를 듣고 감상문 레포트만 몇 개 제출하면 Pass가 뜨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응당 인기가 좋아서 수강신청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저는 그 과목을 4학년 2학기 시절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매주 오는 강사들의 면면은 말 그대로 각계각층이었습니다. 유명한 명사들이 꽤나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중 제 기억에 남는 강사가 두 명입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아프리카TV의 서수길 대표였습니다. 저는 당시에 꽤나 분노를 표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속칭 음란한 방송을 유도하고 그로 말미암아 돈을 번 사람이 대학강단에 명사로 선다는 것이 수긍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이 참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유튜브, 트위치, 유튜브. 마리텔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실시간 인터넷 방송이 오히려 공중파로 진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공중파 방송은 수많은 인원이 달라붙어서 나름의 체계를 갖고 잘 구성된 제품을 만들어내는 형태입니다. 반면 인터넷 방송은 약간의 비급감성으로 시청자와 함께 참여하며 제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형태입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시대로 말미암아 저희 같은 목회자들 또한 이러한 인터넷 방송의 흐름, 문화, 기술을 배워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습니다. 당연히 10년 전에는 그토록 인터넷 방송에 분노했던 저 또한 요근래의 트랜드를 읽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중 알게된 유행어 하나가 있습니다. ‘오히려 좋아’입니다. 실시간 게임 방송 중에서 터져나온 유행어라고 합니다. 게임을 하다보면 불리할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청자들은 게임방송을 진행하는 스트리머에게 실시간으로 ‘불리하다’는 논평을 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방송을 재밌게 끌고가는 스트리머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 유리할 수 있다는 늬앙스로 ‘오히려 좋아’를 남발했고 자연스럽게 일종의 유행어, 밈으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인터넷 게시판에 특정 스트리머가 남발하는 ‘오히려 좋아’라는 유행어를 따라하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긍정맨이 된것 같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뒤늦게 이 유행어를 배워서 아내와 서로 잘 써먹고 있는 중입니다. “뭐야? 어제 시켜먹다 남은 떡볶이를 아직 안치웠어? 오히려 좋아. 배도 고픈데 식은 떡볶이는 더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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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만 고대에는 선천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편견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태어나서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부모 혹은 가문의 잘못, 실수, 범죄가 그 원인이지 않을까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런 상상을 하는 이들의 대척점에는 결코 그럴리가 없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 상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 종교체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명확하고 뚜렷한 대답이 정해지지 않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과연 선천적인 장애는 부모 혹은 해당 사람의 잘못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선하신 일 때문일까? 이는 사실 장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닥칠 때도 우리는 이런 뚜렷한 해답이 정해지지 않은 논쟁으로 말리곤 합니다. “고난은 내가 했던 잘못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선하신 일 때문인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렇다면 날 때부터 맹인된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고 또 명료해보입니다. 바로 눈을 뜨게 만드는 일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과는 상반되는 언어구사가 등장합니다. “때가 아직 낮이다(4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5절)”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 묘한 방법으로 치유의 기적을 행합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는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진 실로암에 가서 물로 씻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유독 의아한 묘사입니다. 예컨대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치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말씀으로 치유하시지 않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에 가서 물로 씻을 때 치유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누누이 요한복음을 해설하면서 덧붙였던 주제로 이어집니다.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는 장면은 마치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를 앞에 두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씨를 쓴 장면과 같습니다. 우상숭배의 범죄를 범한 이스라엘에게 직접 손가락으로 십계명을 써주신 하나님을 흉내내셔서, 음행의 범죄를 범한 여인 앞에서 손가락으로 끄적인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에서도 친히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창세기의 하나님을 흉내냅니다.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처럼 예수님 또한 흙으로 다시 이 사람의 눈을 지어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14절이 말하는 바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이지 않습니다. 치유를 통해 사람을 고치기위해 이 땅에 온 사람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구태여 유독 논란이 일법한 안식일에 일을 행하십니다. 안식일은 인간이 일을 쉬는 날, 그렇기에 하나님만 일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태여 말씀만으로 하지 아니하시고 땅의 흙을 갖고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다시 빚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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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죄 가운데 났다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고대 랍비들의 책을 연구한 이들의 결과에 따르면 (제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죄 가운데 났다고 말했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유독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죄가운데 났다고 규정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눈을 뜨자 그에게 눈을 고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10절). 이어서 예수님께서 고쳤다는 대답(11절)을 들은 이후에 바리새인에게 끌고 갑니다. 그들의 관심은 맹인이 눈을 뜬 것에 있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신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16절). 하지만 눈을 뜨게 한 표적을 일으킨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단정짓긴 어렵습니다(16절). 그러자 부모를 불러 맹인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냐고 묻습니다(19절). 도저히 뾰족한 해답이 나질 않자 맹인을 불러 그가 “죄인”이라고 설명하며 윽박지릅니다(24절).

 

복잡하고 지난한 논쟁이 펼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한낱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위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체계를 흔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탁월하고 단단해보였던 당대의 종교 시스템이 결여하고 있었던 헛점들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며, 자신들을 반대하고 지적하며, 탁월하고 단단해보였던 당대 종교 시스템을 비판하는 예수님을 죄인이라 규정했습니다. 악한 자라 규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이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를 쓰는 이야기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습니다. 8장 5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돌로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만약 성전이 아니었더라면 정작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야기가 끝난 이후 10장 31절을 보십시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이 또한 명절에 성전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만약 정결해야만 하는 성전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애초에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9장 38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거치면서 이 사람은 자신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나날이 곱씹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결국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일로 말미암아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에는 (34절) 유대인들의 회당공동체에서 추방됩니다. 추방된 이후에도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곱씹었을 겁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이 사람 앞에 나타나셔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인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치열한 숙고의 결실입니다. 유대인 회당 공동체에서 추방된 기억, 날때부터 맹인으로 살았던 기억,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은 기억, 그리고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반면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심판은 끝내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더 나아가 ‘보는 자들이 맹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를 두고 바리새인이 자신 또한 맹인이냐고 질문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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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1살 5월 어느 날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묵직한 결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걸 예상하고 결심하기에 저는 너무 어렸고 또한 철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6월달에 막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청년이, 부모님도 여전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년이, 무엇보다도 모교회는 대구에 있지만 대학교 때문에 부산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또 다른 교회를 섬겨야했던 청년이 전도사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한채 목회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가 가장 오랫동안 섬겨왔던 교회는 2015년부터 5년 동안 전도사로 섬겼던 양정교회입니다. 그전에 모교회는 출석한 햇수를 따지자면 4년이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에도 1년 이상 섬긴 교회가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은 품고 있었지만 사실 저에겐 교회가 없었습니다. 여러 교회를 출석했지만 제 마음 속에는 사실 교회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한 교회를 섬겨온 청년들이 부럽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교회의 시스템이나 시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래도 어린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사람들이 머무는 교회가 있는 청년들이 부럽습니다. 태어나고 자라가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취직, 결혼, 출산의 전 과정을 함께 지켜봐주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기분이 상하지만 그럼에도 ‘고향’과 같은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참 부럽습니다. 저는 만약 전도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돌아갈 교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모교회는 떠난지 10년이 넘어버려서 알더라도 얼굴만 아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더군다나 돌아갈 교회가 없다보니 교회를 정할 때 항상 설교자들의 설교가 거슬렸습니다. 새가족부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거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는 제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떤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껏 헤아려보면 목회를 하기 전에 (군대에서의 교회를 제외하고) 5-6개의 교회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교회에도 정착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게 21살때부터 간절했던 기도제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영적인 멘토를 하나만 달라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어차피 목회자가 될 사람인데 내가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멘토, 나를 위해 간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멘토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금껏 멘토가 하나도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많지만 멘토는 없습니다. 올해는 이 사람에게 공급을 받고, 작년에는 저 사람에게 공급을 받았고, 그 전년 해는 또 다른 사람에게 공급을 받았고, 또 때로는 홀로 버티고 견디고. 그것이 제 신앙생활의 여정입니다.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신앙은 있는데 고향같은 교회가 없다는 사실이,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이나 멘토가 없다는 사실이, 더 나아가 어떻게든 교회에 정착하고 싶은데 어떤 교회를 다녀도 ‘내 교회’ 같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방황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늘, 이제서야 그때 그 시절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향교회가 없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다보니 배운 것이 많습니다. 뚜렷하게 영향을 받은 멘토가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또한 책으로부터, 영상으로부터, 여기저기서 공급을 받다보니 배운 것도 참 많습니다. 이제와서 겨우 꺼낼 수 있는 말이지만 교회 또한 정하지 못해서 방황하고, 멘토조차 없어 기댈 때도 없고, 그럼에도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던 제 젊은 시절이 참 유익했습니다. 참 많이 배웠습니다. 힘들었습니다만  ‘오히려 좋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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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말을 무수히 들어온 사람입니다. 맹인에도 선천적 맹인과 후천적 맹인이 있습니다. 후천적 맹인은 그래도 ‘본다’는 개념을 압니다. 하지만 선천적 맹인은 ‘본다'의 개념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본다’의 개념조차 알 수 없었던 그에게 어쩌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타인들의 말은 너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애초에 다뤘던 요한복음 1장의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본다’는 말은 중의적인 말입니다. 꿰뚫어본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말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 일어난 참 기적은 그의 눈이 떠진 것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본다고 하는 사람들’, 이 또한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본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지도자란 이유로 하나님이 응당 내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실상 맹인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죄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좋아’의 복음서입니다. 아니 기독교의 메시지 자체가 ‘오히려 좋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긴밀한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끝내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봅니다. 사마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6명의 남성을 거친 여인이라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음행하다가 붙잡힌 여인은 성전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영광을 경험합니다. 음행하다가 붙잡혀 성전으로 끌려와 돌팔매를 당한 기회가 오히려 좋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천적 맹인이라 ‘본다’의 개념조차 없었던 그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정적이고 거리낄만한 모든 기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는데 있어서 오히려 좋습니다. 당대의 종교적 시스템으로 볼 때에는 결코 경건하거나 신실하다고 인정받을 수 없떤 이들이 하나님을 보게되는 이 이야기의 비밀이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장 3절을 보십시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사마리아 여인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입니다. 음행하다가 붙잡혀 성전으로 끌려온 여인 또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또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 이는 결국 앞에서 말했던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8장의 이야기, 10장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순절기의 마지막인 다음 주 부활절에 살펴볼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의 결말인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양일 수 있을까요? 왜 음행하다가 붙잡혀 끌려온 여인이 예수님의 양일 수 있을까요? 왜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예수님의 양일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왜 자신이 본다고 착각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명료합니다. 친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음행하다가 붙잡힌 여인에게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으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그들의 눈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지금껏 쌓아왔던 종교적 업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죽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즉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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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큰 대립은 바리새인들보게 된 맹인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바리새인들은 결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면 보게 된 맹인은 다릅니다. 그는 결코 예수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발생하는 갈등입니다. 저같은 교역자들을 포함한 종교기득권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행동은 바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천인공노할 짓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보게 된 맹인의 존재조차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껏 쌓아올렸던 신앙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보게 된 맹인은 다릅니다. 음행하다가 잡혀 온 여인은 다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 자신의 힘과 능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에 이른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며,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하나님, 음행하다가 잡혀 온 여인의 하나님, 날 때부터 맹인된 이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이들만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 양인 자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의 사랑으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화려한 왕관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조롱의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왕의 옷을 걸치지 아니하시고 벗겨진채 전시되었습니다. 화려한 왕의 보좌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거친 십자가에 메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참혹하고 처절한 모습을 바로 우리를 위한 희생이며, 우리를 위한 죽음이며, 우리를 위한 대속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모습이며, 왕이신 예수님께서 온 피조물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이 정녕 당신에게 필요하십니까?”

 

결단찬양 : 내가 예수를 못박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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