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2] 니고데모

2021. 2. 28. 08:22

하나의 가정을 해봅시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신앙적으로 교육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에게 신앙을 교육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배워왔나요? 어떻게 신앙을 우리 삶에 습득해왔나요? 유치부/아동부 시절에는 찬양을 부르며 율동을 했습니다. 또 성경암송을 했습니다. 어린시절 재밌는 이야기 형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중고등부 시절에 여러분은 어땠나요? 기타, 피아노, 드럼 같은 악기를 배우며 자라났습니다. 형, 누나와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중고등부 생활에 익숙해졌고 방학이 되면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매번 좋지는 않았지만 간혹 하나님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수련회도 있었습니다. 펑펑 울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결심한 그런 수련회도 있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청년이 되고 난 이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밟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끼친 교육의 사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교육전문가의 흉내를 내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교육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엉망진창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교리도, 삶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유치부,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신앙을 배워온 과정을 되짚어보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뒤죽박죽입니다. 가끔 그렇게 자라나다가 획기적인 신앙교육을 접하고는 눈이 확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교단체나 대형교회에서 진행하는 10단계 신앙양육 프로그램, 혹은 90일 성경통독 프로그램, 그 외에도 유아부에서부터 발달단계에 맞춰서 진행되는 단계별 신앙교육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신앙교육을 저렇게 해야 되는게 아닐까?’하고 눈이 확 돌아갑니다. 각 교육부서를 담당하는 목사님, 전도사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 기저에 있는 욕망은 간단합니다. “체계적으로 신앙을 교육해보고 싶다”

 

하지만 톡 까놓고 말해봅시다. 정말 체계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쌓아나갈 수는 있는 것일까요? 사람의 발달단계에 맞게 단계적으로 신앙교육을 배운다면 정말 제대로 된 신앙을 갖출 수 있는 것일까요? 교육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는 저 같은 전도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고민이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뒤죽박죽 중구난방으로 발달단계도 고려하지 않고 신앙을 교육한다는 것은 학생들에게도, 봉사하는 선생님들에게도, 무엇보다 교육을 진행하는 저에게도 혼란을 야기하곤 하니까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렇게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춰놓으면, 교육학의 연구결과에 따라 제대로 신앙을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러면 제대로 된 신앙인이 배출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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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3:1)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3:10)입니다. 당대의 신앙교육의 관점으로 보면 누구보다도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적 엘리트입니다. 율법을 달달 외고 있는 것을 넘어서, 율법과 하나님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이러한 종교적 지식을 통해 실제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 비슷한 신분으로 당대 정치에도 참여했던 전문가 중의 전문가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에게 나아와 했던 첫 번째 말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그는 선생 중의 선생으로 자신보다 더 높고 더 나은 선생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배웠고 가르치는 지식보다 한 차원 높은 지식을 알고 있으며 가르치는 선생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속칭 ‘한 수 배우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첫 마디는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어떻게 예수님이 자신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선생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2장에 있습니다. 2장 11절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사건’을 들려주고는 이를 ‘첫 표적’이라고 정의합니다. ‘표적’이란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단어입니다. ‘표적’이란 단어는 ‘방향표지판’에 가깝습니다. 병을 고친 사건 혹은 빵과 물고기로 기적을 일으킨 사건을 부각시키면서 예수께서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를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의 특수한 목적인 십자가를 향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2장 23절-24절을 보십시오.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께서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아니오, 요한복음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예수께 나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3:2)”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그의 찾아옴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그런 통찰과 혜안에 칭찬을 던져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표적만을 보고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표적이 가르키고 있는 올바른 방향에는 아직 닿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후에 나오는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결코 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맴돕니다. 불통 중에 이런 불통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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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신앙교육의 문제로 넘어가봅시다. 이번에는 신학교에서 일어나는 전도사들에게 일어나는 교육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신학교의 교육방식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불만이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 전도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불만입니다. ‘쓸데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불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신앙과 어떻게 목회를 통해 각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우고 싶은데 막상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그런 것이지 않습니다. 모세오경은 정말 모세가 썼는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참 인간이자 참 신이라는 고백은 어떤 논쟁을 거치게 되었는가? 물론 학교를 다니다보면 ‘현장에 필요한 가르침’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육은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쓸데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불만을 표출합니다.

 

반면 나머지의 불만은 교육을 가르치는 교수들 입장에서의 불만입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는 불만이 있습니다. 실제 교회를 건전하게 세워가고 올바르게 목회를 하려면 쓸데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모세오경을 지금껏 2000년의 역사 동안 학자들이 연구해오면서 모세가 썼는지 아니면 다른 누가 썼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쌓여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어떤 의미에서 공관복음과 다른지에 대한 학자들의 기나긴 논의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참 인간이자 참 신이라는 고백은 단숨에 결정된 사안이진 않았습니다. 오해와 갈등의 역사적 국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진지하게 배우는 과정을 통해 도리어 신앙의 깊이가 생겨나고 또한 목회의 기술이 생겨나는데 학생들은 배우지 않으려 한다는 것에 교수들은 불만을 표출합니다.

 

전혀 다른 양 극단의 불만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배울 수도 없고, 교육할 수도 없는 신앙의 독특성에 있습니다. 학교에서 체계적 교육과정을 통해 예수가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가르친다고 한들 그걸 배우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질과 성품을 기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아니오, 없습니다. 가르친다고 한들 그걸 배우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또한 목회자 세계 안에서 수많은 비리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가르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애초에 질문으로 넘어가봅니다. 한 사람을 신앙적으로 잘 교육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너무 단호하게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굳이 방법을 제안하자면 ‘산파술’, 이른바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에 곁에서 돕는 산파 역할 외에는 결코 없습니다. 신앙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각 개인이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를 맺는 과정 가운데 형성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배우는만큼 신앙이 성숙됩니다. 이는 마치 연애와 같습니다. 처음에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가르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가르친다고 연애가 성공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또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접근한다고 연애가 성공하지 말라는 법 또한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는 왕도란 없습니다. 정도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곁에서 산파가 되어 소극적으로 돕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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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선생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인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흔한 편견과는 달리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에 대해 가장 호의적이었던 사람이고, 성경본문을 바탕으로 추정하자면 아마도 훗날 그리스도인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니고데모조차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쫓아왔을 뿐이었습니다. 예수가 진정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릅니다. 말씀이 친히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영광 자체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예수란 사실은 전혀 모릅니다. 더 나아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임당할 때에 그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그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무지합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밤은 잘 보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밤은 빛이 희미한 시간입니다. 니고데모는 밤 중에 예수를 찾아왔지만 진정 예수가 누군지는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잘 배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껏 율법을 연구한 바에 근거하여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괴롭히던 다른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월등히 실력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등히 겸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우등생입니다. 시험을 쳤는데 한 문제 제외하고는 모두 정답을 맞추는 우등생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껏 살아왔던 우등생의 방식대로 예수님께서 갖고 신앙의 문제를 한 수 배우겠다며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시험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좋은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율법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서 이해하고 있는 우등생이지만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한 초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이 말은 사실상 니고데모에게 내리는 사형선고처럼 들립니다. 지금껏 율법공부를 열심히 해왔다, 지금껏 율법을 공부하느라 수고했다, 왠만한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불합격이다. 

 

즉, “지금껏 해왔던 공부라는 방법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진리에 이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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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앙을 가르칠 의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때문에 매번 고민이 많습니다. 예컨대 저는 여러분에게 압력을 넣고 살짝의 협박과 함께 여러분을 구슬린다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필사하는 프로젝트에 여러분을 가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설교 시간마다 반협박조를 하고 또 소정의 격려를 한다면 여러분 각자가 큐티를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이 예배에 빠지지 않게도 만들어갈 수도 있겠거니와 예배에 지각하지 않게 독려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이런 방법으로 목회를 한다면 ‘잘 하는 전도사’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고민할 때에 제 가슴 한 켠에서 들려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신앙인가?” 

 

겉으로 보기엔 매우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다들 큐티를 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기도생활을 합니다. 예배시간에 일찍 옵니다. 교회에 봉사도 합니다. 헌금생활도 잘 합니다. 사순절이 되면 필사도 합니다. 전혀 부족한 것이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진정한 신앙이냐고 물으면 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교회 교역자들을 만난다면 우리 청년부가 이런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자랑할지 모르겠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되짚어보고 그동안 공부했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이 ‘한 단계 높은 선생’이라고 유추하고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와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범생입니다. 사람에게선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선 지도자 노릇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아주 결정적이고 핵심인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어둡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외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가 하나님이신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사실 이는 우리 목회자들이 겪고 있는 고민의 영역입니다. 누구보다 더 신앙적인 것처럼 설교합니다. 남들에 비하자면 누구보다 필요하기에 기도하고 또 성경을 읽고 묵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 조언을 건네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누구보다 신앙전선의 최첨단에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후일에 천국에 간다면 누구보다 더 앞자리에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것인가 물어보면 자신있게 대답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신앙적이며 모범적인 모습이라는 확신은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만족하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위선적이었다고, 우리의 말과 글이 한낱 위선에 불과했다고 커다란 진노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만큼 정작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볼 수 있느냐면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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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니고데모는 서로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여기에서 니고데모의 반복된 질문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니고데모는 지금껏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배움을 통해 율법과 하나님을 알게 되며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이해되지 않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못하고 있습니다. 이해조차 하지도 못하면서 반복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니고데모는 마치 신앙을 배우는 것에, 더 높은 신앙인이 되려는 것에 강박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니고데모에게 하는 예수님의 일관된 요지는 간단합니다. 신앙은 배움으로 닿을 수 있지 않다는 겁니다. 노력한다고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신앙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지 않습니다. 배우고 노력해서 이를 수 있는 길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4-15)”

 

대부분의 성경에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붉은색으로 기록되어 있을겁니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3장 16절부터 21절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 저자의 덧붙여진 해설로 읽습니다. 16절부터가 요한복음 저자의 해설이라고 생각해보면 14-15절로 끝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난해했다고 여겼을 겁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이야기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끝이 났으니까요.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해설을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바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니고데모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더더욱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길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직접 인간이 되시고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이는 니고데모의 결단, 니고데모의 노력, 니고데모의 공부에 좌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결단과 하나님의 노력에 근거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세상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먼저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미처 영생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영생에 이르는 길을 선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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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노력을 통해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똑같이 교회에서도 노력하면 신앙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이 없는 사람, 혹은 신앙이 부족한 사람을 천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신앙적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겐 신앙이 있으십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말고 여러분의 영혼에 신앙이 새겨져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신앙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입니까? 곰곰이 되짚어보십시오. 신앙은 우리의 노력과 결실로 맺혀진 열매이지 않습니다. 공부를 통해, 배움을 통해 우리가 쟁취한 것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를 통해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결과로 인해 우리 안에 새겨진 신앙의 흔적, 은혜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희생, 십자가와 죽으심.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수치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배움을 통해 하나님께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니고데모의 오만함이 가득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친히 먼저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사순절 기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배웠다고, 깨달았다고, 배웠다고 자부하는 모든 일들은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더욱 깊이 자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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