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1] 나다나엘(요 1:43-51)

2021. 2. 21. 01:32

힙했으면 좋겠다.”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사고 기저에 있는 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식을 먹으러 때에도 힙한 식당에 가서 힙한 음식을 먹습니다. 데이트 장소를 선정할 때에도 힙한 장소에 방문합니다. 옷을 사거나 시계를 사거나 신발을 때에도 힙한 제품을 구매합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클럽하우스까지 다양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는힙한사람들이 있고, ‘힙하고자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물론 중에서힙한 돈으로 연결되는 아주 대표적인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있는 같습니다.

 

사실 우리 목회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같습니다. 젊은 목회자일수록힙했으면 좋겠다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저는 저의 유튜브 온라인예배가힙했으면 좋겠습니다다른 목회자들이 제가 송출하는 유튜브 온라인 예배를 보고 괜찮은데?’라는 반응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저는 저의 설교가힙했으면 좋겠습니다여러분이 집에 가면서 제가 내뱉은 설교들을 곱씹고 잔상에 젖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요즘 목회자들을 사로잡는 하나의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힙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힙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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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힙하다 표현되는 관종의 정서는 오늘날만의 것이지는 않습니다. 인간 본연의 것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관종의 정서는 발견됩니다. 특히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오늘날 유튜버와 같은 관종들이 득세했습니다. 그들이 배우는 최고의 학문은수사학이었습니다. 이빨만 털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살던 광장에서 일어나는 고대 민주주의 문화 덕분이었습니다. 광장에 입을 털면, 소위 힙할 있었습니다. ‘좋아요구독 구걸하는 유튜버들처럼 그들은언변 통해 시민들의 지지를 구걸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지지는 권력과 귀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잘하는 , 수사학이 최고의 학문이었습니다.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다종교사회였습니다. 다양한 신들이 있고, 다양한 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섬기는 신을힙하다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신전을 세우고, 드높은 신상을 세우며, 최대한 많은 돈과 사람들을 투자하며 크게 제사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이 힙하면 힙할수록 사람들은 힙한 신에게 메달립니다. 힙한 신에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대형교회가, 또한 대형교회 설교자가, 모든 것을 막론하고 점점 커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힙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돈과 사람들이 모인 곳에진리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공동체의 하나님이신 예수는 참으로 초라해보였습니다. 그저 명의 인간에 불과한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정치적 범죄자, 반란군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당시 시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십자가에 달린 반란군에게는 무덤조차도 만들지 못하도록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시체를 땅에 방치해서 개가 핥아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이미 수천명이 십자가에 달렸고, 특별히 요한복음은 절정이나 다름없는 로마-유대 항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무너지고 불에 타버리며 반란군들이 모두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에 기록된 작품입니다. 속칭 십자가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개죽음 당한 현실을 목도한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적어도 예수는 그들에 힙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힙할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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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느냐?” 예수를 소개하는 빌립에게 던지는 나다나엘의 물음은 당대 사람들의 힙하지 않은 예수를 향해 던지는 의구심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사람이 도대체 그리 대단하겠느냐? 십자가에 달려 개죽음 당한 사람이 도대체 그리 대단하겠느냐? 유대땅에서 한낱 사람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 도대체 그리 대단하겠느냐? 질문은 당시 요한복음을 기록한 당시의 질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결코 힙하지 않고 힙할 없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사태에 있어서 그릇 대응한 교회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란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진 우리들 켠에 여전히 머문 질문입니다. “나도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가 그렇게 대단한건 아닌 같아” “일단 나는 크리스천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수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까지는 모르겠어

 

잠시 나다나엘 이야기를 접고 요한복음 1장으로 살짝 넘어와볼까요? 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범접할 없는 영역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나눴던 모세 또한 하나님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뒷모습, 등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아주 담대하게 다음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보잘 없는 예수란 인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매우 혁명적이고 충격적인 선포입니다. 한낱 십자가에서 개죽음당했던 예수란 이름을 가진 평범한 인간을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이나 다름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본다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나아가 요한복음의본다 단순히 겉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보잘 없고 형편없어 보이는 예수라는 인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 그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본다라는 개념입니다.

 

다시 나다나엘로 넘어옵니다.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도저히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할 겨를이 없어 던진 말이겠지만 요한복음은 짧은 단어를 통해 나다나엘이 보게 암시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보셨다 말씀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기 전에 예수께서 먼저 나다나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매우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말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의 특성은간사함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속여 먹을 성경은 그를간사하다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는간사한 야곱 기억하시고는 나다나엘을간사한 것이 없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지금 나다나엘은 예수를 믿지도 않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란 사실조차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나다나엘의 미래를 꿰뚫어보셨습니다. 그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것을 꿰뚫어보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님은 놀라운 말을 던지십니다. “나를 어떻게 압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던진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봤다는 겁니다. 그제서야 나다나엘은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본다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존재와 정체를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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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 대학생 시절엔 한창 Again1907운동이 뜨거웠습니다. 1907 평양대부흥이 100 기점으로 다시 한반도에 몰아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교회청년이었습니다. 남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방언을 받았다고 말하고 성령의 강렬한 체험이 있다고 말했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이 없어서 성령 얘기만 나오면 쭈그리처럼 구석에 찌그러져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기도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성령을 강렬히 체험하러 이곳저곳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떻게든 방언을 하고 성령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 방언도 받았습니다. 나름의 성령도 경험했습니다. 군대에서 병장시절 하루에 1시간 이상 기도를 쌓아가며 많은 은사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은사경험은 매우 신기했습니다. 가끔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무언갈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기도하는데 느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저는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절절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생각보다 힘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은사경험만 있으면 뭔가 교회가 뒤집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성령이 찾아오셔서 교회가 힙한 곳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섬기고 있던 CCC에서 함께 기도를 하면서 성령을 경험하고 은사를 함께 공유하면 우리 공동체가 뭔가 힙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직접적으로 기도에 개입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내가 믿는 밋밋한 하나님을 힙한 하나님으로 업그레이드시켜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은사체험이 있다고 생각하며 가끔 기도 중에 그런 경험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은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은사를 추구했던 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 힙했으면 좋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결코힙함, ‘관종'과 같은 방식으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후의 세월동안 절절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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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다나엘로 넘어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예수께서 누구보다 힙하고 능력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드디어 절감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어떻습니까?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멋진 신앙고백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만약 진짜 예수께서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을 꿰뚫어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다나엘처럼 나에게도 보여주신다면 또한 저런 멋진 고백을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늬앙스가 어떻게 느껴지세요. “ 오바하지마라 느낌 아닙니까? 단순히 그의 삶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절절히 신앙고백을 하는 나다나엘을 제지시킵니다. 오버하지말라고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큰일을 보리라.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우리는 다시 나다나엘을 초청할 빌립이 던졌던 말로 돌아가봅니다. “와서 보라나다나엘은 보게 것입니다. 무엇을 보게 될까요? 요한복음 1 14, 바로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것입니다. 이런 영광의 일은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서 나타난 장면과 같습니다. 야곱이 형에게서 도망치다가 벧엘에 잠깐 누웠을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꿈에서 하늘이 열리고 사다리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봅니다. 야곱보다 야곱같은, 이스라엘인 나다나엘에게도 예수님이 약속하십니다. 진짜 보게 것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하게 것이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방식으로 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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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 30절을 보십시오. 참고로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 과정을 처참하게 그대로 묘사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뿜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대부분 절규와 비토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그려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깔끔합니다. 말끔합니다. 신사적입니다. 정돈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뱉으신 말씀도 매우 말끔하고 정돈된 단어입니다. ‘ 이루었다사실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리게되면 몸의 무게 때문에 과출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망하기 직전에 이루었다말씀하신다는게 가당키나 말일까요? (친구의 장동건처럼 가오가 입을 지배해서 그런 걸까요?) 

 

요한복음의본다 매우 역설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본다 앞에서 말했듯이꿰뚫어본다 가깝습니다. 현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기저에서 일어나는 실체, 본질을 주목하여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그저 나사렛이라는 비천한 지방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개죽음당했던 잘하던 선생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를보는요한복음을 기록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저 나사렛이라는 비천한 지방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개죽음당한 잘하던 선생의 현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는 개죽음당한 인간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봤습니다. 그리고 개죽음당한 인간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사람들이 보기엔 개죽음당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인간들 사이에 강림하셔서 거주하시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약속한진정한 ’, 사닥다리를 타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경험은 무엇일까요?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달려서 죽은 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달려죽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의 유대인이 반란군으로 모함당해서 혹은 반란을 꾀하다가 들켜버려서 개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는 혹여라도 자신의 가족과 친구 중에 십자가형을 당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죽을 때에 거기서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에 오셔서 사랑을 증명하신 놀라운 사건을 봅니다. 예수님의 피끓는 절규 속에서 세상을 향한 사랑을 넘치도록 부으시고는 이루었다 선언하신 예수님의 담대한 선언을 듣습니다. 

 

결코 힙하지 않은, 힙할 없는, 보잘 없고 비천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 사람들이 무시하고 괄시하고 천대하기 좋은 유대인 사람 예수, 하지만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인자 위에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와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영광의 장면을 봅니다. 비천한 십자가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의 수치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무시하고 괄시하고 천대한 말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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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목회를 하면서 자주 되네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 이거 되겠나?’ 20 젊은 청년시절에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도 공부를 하면 설교할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생이 되기 직전에도 교회에 나가서 얼추 열심히 하면 나도 교회에서 인정받는 목회자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목회를 시작한지 8년째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목회와 설교에 대해서, 경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안에는 회의감과 부정적인 마음이 커져갑니다.

 

온라인으로 설교를 송출하면 사람들이 들을까요? 아니오, 들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모아놓고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이 들을까요? 들은 척은 같습니다만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짜 기독교 신앙을 심어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여러 고민을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면 교회가 탄탄히 세워질까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안될 같습니다. 정말 안될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목회를 시작한지 8년이나 되어버린 제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같고, 성결한 것만 같고, 교회 안에서 살아남는 기술만 같이 느껴질 때에는 정말 현타가 옵니다. ‘ 이거 되겠나?’ 안될 같습니다. 솔직히 안될 같습니다. 설교한다고 사람 변할 같고, 목회한다고 교회가 온전히 세워질 같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점점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다가 어느새 교회가 사라져버릴 같은 두려움이 제게, 아니 대부분의 젊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여전히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못나고 부족한 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확신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고난, 희생, 이른바 십자가라는 얼토당토 않는 방법 통해되지도 않을 것만 같은 방법으로 저에게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미묘한 감격입니다. 어느새 저는 같지도 않은데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차피 안듣는 사실 알면서도 유튜브로 설교를 쏟아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차피 교회를 떠날 사람이 있는 것은 알지만 교회를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결코 대책없는 나에게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설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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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 아무리 따져봐도 이건 말이 안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치고는 너무도 어리석고 대책없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도 어리석고 대책없기 때문에 바로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셨으면 어리석고 대책없는 방법으로 사랑을 고백하셨나 생각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를 정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고난과 수치를 감내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리석고 대책없는 방법으로 단순하고 무식하게 하지만 어떤 방법보다 적나라하게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도 나다나엘의 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리스도인들의 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과 수치의 십자가,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을 목격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단찬양 : 그가 오신 이유(마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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