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이유는 모른채 지났지만 결국은 성장했더라 (욥 42:14-15)

2021. 2. 4. 04:12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오늘부로 욥기 설교를 매듭지을까합니다. 

 

욥기는 사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 . 그는 하나님 앞에 경건했기에 그로 말미암아 많은 복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건강했고,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인생에 의문을 제기할 있을 겁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그가 하나님께 순종했기에 복을 받은 것이냐, 아니면 복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냐. 진지한 철학자의 캐릭터를 지닌 사탄이 문제를 하나님께 제기합니다. ‘만약 복을 거둬가시면 욥이 하나님을 욕하지 않겠습니까?’ 간단한 질문으로 말미암아 욥기라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욥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에겐 복이 먼저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는 멋진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건강을 잃은 후에도 그의 신앙고백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만약 우리가 아직 어린이라면, 또한 아동부전도사라면 여기서 욥기는 그만 읽어야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이 닥치더라도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요!”라고 말하고 끝을 내면 좋겠지요. 하지만 사춘기를 거치고, 청년의 때를 살다보면 인생을 알게 됩니다. 그토록 간단하게 길흉화복의 구도가 명확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어린이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현실은 더욱 거칠고 매섭습니다. 더욱 복잡하고 미묘하며 선과 악의 경계가, 복과 화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욥기 3장부터는 이제 인생의 , , 맛을 조금이나마 우리 청년들을 위한 이야기들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삶이 갑자기 들이닥친 고난과 함께 끝이 났더라면, 혹은 자신의 삶이 탄생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께 비토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고통을 울부짖는 순간이 오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날 있었다고 따집니다. , 이제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현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냉정하고 거칠고 매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욥의 절절한 외침에 하나님께서 바로 응답해주셨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그런 일은 우리 현실에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나긴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우리의 인생과 욥기는 닮았습니다. 3장에서 의문을 제기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38장에서야 나타납니다. 그것도 친구와 엘리후, 겉으로는 신앙적이지만 실제로는 깊이가 결여된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명료하지만 매서운, 신앙언어에 의해 난도질을 당한 이후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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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때의 일입니다.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 40일째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37 정도 어간에 이르러서 저는 크나큰 결단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목회자가 되겠다는 고백이 안에서 터져나왔습니다. 18살때부터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되었으니 생각보다 신앙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신학교에 가겠다고 기도하게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기까지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국해양대학교 출신입니다. 당시는 1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때 꿈이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해서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삶을 보며아버지의 투영시키곤 흐뭇해하셨던 같습니다. 그런 제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자퇴를 하고 다시 신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망치를 꺼내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버지가 무서워 3일인가 4일을 밖에서 떠돌았습니다.

 

결국 21 마음을 먹었지만 신학교에 다시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마치자마자 신학대학원을 입학하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선교단체 CCC출신입니다. 2010 2학기부터 2011 1학기까지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나름 고민하고 생각하던 바가 있어서 나름 여러 시도를 많이 했던 같습니다. 그리고 2011 1학기가 마칠 때쯤에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없다 사실이었습니다. 또래의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순간 저는나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없다 자각에 이르렀고, 결국 바로 신대원 진학을 하게 되면 오히려 교회와 교회의 성도들을 망쳐버리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대원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신대원에 들어가는 대신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모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또한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잡는 과정 가운데서 상황이 풀리지 않아서 결국 거의 최소시급만 주는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카드빚도 밀려 있어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때 열심히 했다면 조금이나마 돈을 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있는 순간에 우연한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1년간 직장생활을 매듭짓고 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신대원에 진학하지 않고, 신학교 편입을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에 취직으로 말미암아 이사를 하다보니 결국 출석하는 교회가 없는 상황이었고, 신대원 진학 서류를 마련하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반면 신대원 편입의 경우에는 모교회에서 간단한 추천서만으로 가능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조마조마해 하곤 했습니다. 자퇴 입학을 꿈꾸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좌절되고, 졸업 신대원 진학을 꿈꾸다가 신앙적 방황을 하게 되면서 결국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서류 준비가 여의치 않아 결국 편입을 하게 되고그렇다고 수중에 모아놓은 돈이 있지는 않고사실 풀리지 않았습니다. 풀렸다고 보기 힘듭니다. 물론 기쁨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고 배운 것도 많습니다만, 상황 하나가 어긋날 때마다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신학을 하라는 소명을 주셨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소명을 감당하는 상황이 결코 쉽게 술술 풀리지 않았습니다. 고민도 많고 방황도 많았습니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그때 일들을 하나 하나 얘기할 있지만, 그땐 결코 웃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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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욥기 내에서 욥은 결코 알지 못합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 그는 천상회의에서 일어난 대화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이후에도 그는 천상회의에서 일어난 대화는 전혀 모른채 자신에게 매서운 말을 내뿜는 친구와 논쟁을 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그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고난의 이유 있는 천상회의에서 일어난 대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기 전에도, 겪는 과정에도, 회복된 이후에도고난의 이유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욥기를 읽는 독자인 우리는욥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사탄 때문이야라고 쉽게 말하곤 합니다만, 정말 그렇게 말할 있을까요? 만약 사탄이 없었다면 욥이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욥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욥에게 일어날 모든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시고 나름의 계획과 섭리를 통해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욥이 모를 뿐인거죠. 마치 땅의 기초를 어떻게 놓은지는 없지만 땅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난을 둘러싼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조금 유심히 보고 깊게 고민해본다면고난의 이유사탄 지목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고난 허락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고난 둘러싼 모든 사건을 통제하고 다스리고 계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의 등장인물인 욥이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욥기의 독자인 우리 또한 욥이 고난당하는 결정적 이유, 완벽한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고난당하는 이유를 결코 모르는 욥의 인생에서 고난의 시간이 결국 매듭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회복되자마자 그의 모든 형제, 자매, 이전에 알던 이들이 와서 음식을 먹고 위로를 하게 됩니다. 욥에게 일상은 매우 빠르게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양과 낙타, 소와 암나귀는 배나 증가합니다. 이제 무덤에 묻힌 아들 일곱과 셋을 대신 하여 새로운 아들 일곱과 새로운 셋을 낳게 됩니다. 욥의 이야기 속에서 유독 의문을 유발하는 구절 중의 하나가 새로운 아들 일곱과 새로운 셋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 낙타, , 암나귀처럼 이전보다 배가 증가했다면 감수성은 떨어지더라도 편의이야기 받아들일 있을 같습니다. 반면 이전에 죽은 아들의 숫자만큼, 이전에 죽은 딸의 숫자만큼, 새로운 아들과 딸이 생긴다는 사실은감수성 떨어질 뿐더러, 이야기의 완결성을 해치는 구성처럼 보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천국에 아들 7 3, 지상에 아들 7 3 해서 결국 배가 되지 않았냐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욥기의 문맥에서는천국과 지옥같은 개념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학자는 이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욥은 새로운 자녀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가 잃어버렸던 것을 돌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본문 내에서 적어도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 새로운 행복은 과장되어서는 것인데, 마지막 상태는 정확히 처음 상태의 회복은 아니기 때문이다.”

 

욥의 회복된 삶은 온전히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삶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의 상흔이 남겨진 삶입니다. 그에게 새로 얻은 아들 일곱은 이전에 죽은 아들 일곱을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새로 얻은 또한 이전에 죽은 셋을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과거처럼 그는 동방의 부자로, 경건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셀럽으로 살아갑니다만 그의 회복된 멋진 삶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녀의 그림자입니다. 어쩌면 본문은 의도적으로 회복 이면에 드리워진 고통의 그림자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회복은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회복에도 여전히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고통의 흔적과 그림자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욥은, 이전에 하지 않았던 매우 독특한 행위를 하나 하게 됩니다. 바로 그의 새로운 딸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죽은 딸의 이름은 복자, 말자, 미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새로 태어나게 딸에게서 복자, 말자, 미자의 그림자를 보게 욥은 멋진 이름을 지어주기로 결심합니다. 태희, 혜교, 지현. 아름다운 이름만큼 후일에 욥의 딸은 아리따운 여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세 딸에게는 아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기업을 물려줍니다. 복자, 말자, 미자가 아닌 태희, 혜교, 지현이란 이름이 붙은 새로운 딸의 이름이, 또한 아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기업을 세 딸에게도 허락한 것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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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시계를 돌려볼까 합니다. 21살의 시절로 돌아갑니다. 저희 아버지의 반대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저는 22살에 신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됩니다. 아마 저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지금보다는 이른 나이에 목사가 되었을 같습니다. 25살이나 26살의 시절로 돌아가서 대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신대원에 진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지금보다는 이른 나이에 목사가 되었겠죠? 제가 생각하기에 좋은 점은 그것 하나 뿐입니다. 목사안수를 이른 나이에 받는 . 신학교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후 삶은 꼬이고 꼬여 7년을 돌고 돌아서야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당시에 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절박함이 정점에 달해있었고, 현대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21 혹은 26 어간에 저는 그저설교 잘하는 수련회 강사정도를 꿈꾸는 철없는 교회청년이었다면, 28살에 저는한국교회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공부하는신학생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하나님께서 인생을 7년간 신학교에 가지 못하게 뺑뺑이 돌린 이유를한국교회 문제를 고민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규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7년간 신학교 앞에서 배회하고 방황하게 하신 이유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크고 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배회하고 방황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릅니다,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는 지금 시점에 이렇게 고백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옳았습니다.’ 

 

욥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에게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도 모르고 독자들도 모릅니다. 고작 자신의 딸에게 복자, 말자, 미자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지 말고 태희, 혜교, 지현이란 이쁜 이름을 지어주기위해서 고난을 주신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7년동안 뺑뺑이 돌던 제가 한국교회를 고민하고, 신학과 성경과 인문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인격과 영성이 깊어진 사람이 것처럼, 또한 이유도 모르는 고난을 겪게 되면서 그의 삶이 한층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욥이 살던 시대는 여성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입니다. 남편 혹은 아버지의 소유물 정도로 취급받던 시대입니다. 굳이 이름을 예쁘게 지을 필요가 없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 복자, 말자, 미자와 같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하찮은 소유물에게 붙이는 이름을 자신의 딸에게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전히 여성인권이 없는 시대 속에서 우여곡절 많은 인생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예쁜 이름, 태희, 혜교, 지현의 이름을 주는 . 더군다나 아들에게 물려줄 기업을 동일하게 물려주는 욥.

 

물론 욥은 여전히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욥은 고난을 통해 이전보다 차원 나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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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 말이 때로는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유의 말을 남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계획과 섭리를 갖고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경험적인 사실과 더불어 성경이 말하는 선에서 정리하자면 인간은 고난의 이유를 미처 알지는 못할지라도 고난을 겪으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고난 속에서 자꾸 고난의 이유를 물으려고 합니다. 또한 타인의 고난을 지켜보면서 어떻게든 타인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짜깁기해서 조언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통해 배울 있는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인간은 고난의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할지라도, 고난 이후에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을 겪는 우리 모두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며 고난의 상황을 버티게 해주는 말씀이 있다면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혹시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있습니까?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계십니까? 실례지만 하나님은 말씀해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언제 끝날지 궁금해하고 계십니까? 실례지만 하나님은 말씀해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고난 이후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궁금하십니까? 또한 하나님은 말씀해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훗날 시간이 흐른 ,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하나님이 옳았습니다.

 

고난이라는 성장과 배움이라는 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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