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2) (욥42:6)

2021. 2. 4. 04:12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욥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탄의 시험과 하나님의 허락이 서로 만나서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친구가 찾아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끝내 하나님의 말씀 끝에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비난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욥에게 임했던 고난을 거둬가십니다. 우리는 대충 이러한 욥기를 곱씹으면서아하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또한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 잘못 말하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실 이유는 바로 42 6절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이 무언가를 회개하고 고난이 끝납니다. 또한 욥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회개 하나님께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한 , 특별히 자신은 의롭지만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비판하며 고소한 욥의 말들을 떠올리며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 잘못 말하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해보세요. 둘은 서로 말이 안됩니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이면서하나님께 잘못 말해서 회개한 이야기 있을까요? 결국 욥은 의인인줄 알았지만 사실은 의인이 아닌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고난을 당하며 회개하던 이야기거나, 아니면 의인인 욥이 고난을 당하지만회개 이야기거나 하나일 겁니다. 그럼 어떤 이야기일까요? 오늘은 이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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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의 친구 중에서는 전도사가 있나요? 신학을 공부한 친구가 있나요? 저도 20 중반이 되면서 저희 교회에 부임한 전도사님들 중에서 비슷한 또래가 있다는 사실을 보며전도사님이 이젠 나랑 비슷한 또래구나라는 미묘한 감정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아는 형들이 전도사 사역을 나가는걸 보면서 신기해했던 기억도 나구요. 돌이켜보면 저는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던 때부터전도사 길을 걸었던 같습니다. 신비하고 특별한 경험도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저는 신앙을 가질 때부터 의구심이 많았습니다. 신앙에 대해 뭔가 명확하게이해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학교에 가면 이런 유의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저와 같은 유의 사람들. 신앙에 대해 명확하게 짚고 정리하고 논리로 다듬고 싶어하는 사람들. 두루뭉슬하게 좋은게 좋은 것이라며 대충 신앙생활을 하는 말고 정확하게 정리하고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좋은 학문이 바로신학입니다. 저는 가끔 신앙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 후배들, 혹은 청년들을 보면 농담삼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 그러다가 전도사 되는 수가 있어. 조심스럽게 질문해 ?’ 물론 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이런 전도사들, 그러니까 집요하게 신앙적인 질문을 하고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신앙적인 질문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두고 저는저주받은 사람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이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논리로 정리하지 않는다면, 명확하게 하고 싶어내지 않는다면, 신앙을 가질 없는 사람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해야만 밖에 없는 사람들. 저는 저를 비롯한 이런 유의 사람들이 바로저주받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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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유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질문이 많은 것만은 아닙니다. 살다보니, 인생의 험한 파도를 헤쳐나가다보니 어쩔 없이 생겨난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만약 욥기가 2 10절에서 끝이 나버렸다면 욥은 이런 곤란 속에 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란 멋진 고백, 그리고축복도 주셨으니 저주도 받지 않겠습니까?’라는 멋진 고백을 남기며 정말 멋진 신앙의 위인으로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에겐 고난 이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이유 어떻게든 해명해야 하는 상황 놓이게 되었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입이 드디어 열립니다. ‘아아, 만약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제 튀어나올 하나님께 대한 나쁜 말의 전조입니다. 만약에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거나, 욥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대한 나쁜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친구는 나름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만 공부를 했지 가슴과 삶으로 공부를 하진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혹은 교회에서 목사님께 배운, 얄팍한 지식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 그리고는 이걸 고스란히 욥의 인생사에 대입해버립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을건데 너는 벌을 받았네? 불순종했지?’ 물론 대화 자체가 깁니다. 감정의 변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욥이 잘못했는지 욥의 자녀들이 잘못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하나님께 잘못하지 않고서 이런 저주를 받을 리는 결코 없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욥은 친구의 틀에 박힌 ,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상황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어하는 답답한 양반들의 말을 들으며 속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대화를 해나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합니다. 처음에는나는 잘못한게 없는데정도에서 머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오해하셨나보다!’정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끝내는하나님이 불의하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앞에 나타나셔서 해명해야 한다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구와 욥의 대화에는 뚜렷한 전선이 하나 생겨납니다. ‘ 혹은 욥의 아들이 잘못했다 주장하는 친구, 그리고나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이 잘못이다 주장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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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잘못했을까요? 하나님이 잘못했을까요? 사실 틀렸습니다. 욥이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잘못하셔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쓸데없는 논쟁에 빠져있습니다. 어떻게든 지금 욥에게 주어진 상황, 환경을 해명해야만 상황에서 둘은 두뇌를 풀가동해서 논리적인설명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먼저 힌트가 있는 내용부터 보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여기 너와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욥의 말과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의 말과 욥의 친구들의 모두가 틀렸지만 하나님은 분명 재판관이 되셔서 판단을 내려주셨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말은 틀렸습니다. 옳지 못합니다. 반면 욥은 옳습니다. 욥의 말은 옳은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옳은 말일까요? 욥은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자기 앞에 나타나서 해명을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재판장에서 싸운다면 자신이 승소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말들이잘못된 이며, 결국 이런 말들을 욥이회개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욥의 말을 그저 받아주십니다. 인정해주십니다. 아니 걸음 나아가서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욥의 불평불만을 고스란히 들으시고는, 욥의 앞에 나타나셔서말씀하십니다. ‘ 앞에 나타나서 설명 해달라 바락바락 우기는 욥에게 진짜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회개 번역된 다음 구절은 이렇게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티끌과 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요구에 응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 하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하나님은 욥에게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자였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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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설교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교회에 대해서 알다보니 예전만큼 신비감이나 존경심이 많이 사라졌죠? 그만큼 연륜이 생겨난겁니다. 저는 설교자들 또한저주받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언가를 말해야만 하는 자리에 매주 올라서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청년부에 욥이란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뭐라고 설교해야 할까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뭐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지어낸 별칭이 있습니다. ‘2입니다. ‘2 고스란히 본땄습니다. ‘2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겪는 증후군입니다. 기독교와 신앙에 관련된 모든 일을 알고 있고 설명할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있습니다. 마치 2들이 세상 모든 존재들과 맞짱떠서 이길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있지만 사실은 제정신이 아닌 것과 비슷하죠. 신학을 공부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2병의 세월을 지납니다. 2병을 겪을 때에는 신앙과 기독교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할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하지만, 2병을 겪고 이후에는 결국 자신감이 꺾여버립니다. 설명할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 ‘무지한 바로 2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설교자들의 헛소리 가르킵니다. 세상에 설명할 없고 해명할 없는 이들에 대한 나름 가능성 있고 설득력 있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헛소리들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코로나는 하나님의 심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니 어쩌면 코로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회개할 기회가 아닌가요? 그렇기도 합니다. 아니 코로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보라고 주신 축복의 기회인 것은 아닌가요? 옳은 말입니다. 근데 코로나로 말미암아 죽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무능하신건 아닌가요? 그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황희정승 같나요? 황희정승 같아도 어쩔 없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이해할 없는 일은 두루뭉슬하게 대충 크게크게는 이야기할 있습니다. 사실 코로나를 비롯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심판이기도 하고, 회개할 기회이기도 하고, 축복의 기회이기도 하고, 때론 하나님이 무능해보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두루뭉슬한 설명을 도저히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든 명확하게 깔끔하게 날카롭게 해명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욥과 친구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이유를 자신이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논리와 사고능력으로 이해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나름의무지한 덧붙였습니다. 나름의신학 덧붙였습니다. ‘아마도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나름 이런 저런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셔서 고난을 주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기나긴 말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을 문장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상을 내가 꼼꼼하게 다스리고 있단다.’ 글자로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임마누엘욥이 위로를 얻은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해명이지 않았습니다. 고난 가운데도 함께 계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고백합니다.

 

내가 무지한 말로 괜히 하나님의 섭리를 단정지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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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똑똑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또한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현대인들은 하나님마저도 똑똑한 지성과 논리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의 설교제목처럼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만족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아오셨을 겁니다. 때론 그게 답답하고 막막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까놓고 묻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명확한 플랜을 요구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명확하고 시원한 해답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다만임마누엘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미묘한 하나님의수수께끼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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