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1) (욥 42:2-6)

2021. 2. 4. 04:1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2-6)

 

저는 조교였습니다. 발칸이라 불리는 20mm 대공포를 가르치는 조교로 23개월간 군에서 복무했습니다. 적어도 제겐 군생활이 매우 유익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교생활을 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7년도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요. 처음 육군훈련소를 도착하고 나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병영문화가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조교들은 분명 혼을 내고 엄격한 태도를 보였지만 욕설은 1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군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꽤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육군훈련소가 끝난 이후 제가 근무하게 될 ‘육군방공학교’는 ‘요즘 군대’가 아니였습니다. 도착부터 군에서 듣지 못했던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도 ‘육군방공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게 되면서 ‘요즘 군대’에서 듣기 힘든 ‘욕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대는 이등병에게 4주라는 기간 동안 [발칸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정형화된 문서로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모든 조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친구들이 우리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딱 1주 동안은 전심전력을 다해 갈군다는 점입니다. 이제 막 학교에 도착하게 되어서 발칸포를 배우러 온 200여명의 학생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있을 때 가장 선두에 있는 조교는 잘 보지도 않고 몇 마디의 말을 내뱉습니다. ‘뒤에 전투모 창 올린 놈 우로 열외’, ‘거기 전투화 덜 닦은 놈 우로 열외’, ‘저기 고무링 내린 놈 우로 열외’ 자세히 보지도 않고 몇 마디의 말을 내뱉으면 200여명의 학생들 중에 10명에서 20명 정도가 우르르 뛰어나옵니다. 그러면 엄청 갈구고 혼을 냅니다. 사실 디테일하게 보면 큰 잘못이 없는 친구들이 꽤 섞여있습니다. ‘뜨끔’해서 튀어나온거죠. 더군다나 교육이 시작되면 수시로 얼차려를 줍니다. 따져보면 디테일한 이유가 있죠. 하지만 사실은 이유가 단 하나입니다. ‘1주차니까’

 

갈굼을 통해 교육생들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는 조교부대다보니 군생활도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어떻게 하면 쥐어짜는지에 대해 다들 능숙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조교가 되기 전 교육생으로 입소했을 때, 그리고 이등병으로 막 들어와 어리버리 까면서 군생활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정말 욕도 많이 먹고 혼도 많이 났습니다. 디테일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이니까’ 긴장하라고. 실수하지 말라고. 속칭 ‘군기’를 잡는다고 더 엄격하게 대하는거죠. 그래서 훗날 저는 선임이 되어서 힘들어하는 교육생이나 이등병을 몰래 데리고 나가서 이런 얘기를 해줬습니다. ‘조교들이, 선임들이 왜 널 갈구는지 너무 신경쓰지마라. 사실 별 이유가 없다. 그냥 갈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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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부터 욥기를 펼쳐보고 있습니다. 욥기는 꽤 신비로 가득찬 책입니다. 무엇하나 명확하고 분명하지 않습니다. 온갖 역설의 베일로 둘러싸인 책입니다. 이를테면 욥은 왜 고난을 당하게 되었죠?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께 내기를 걸어서 그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신앙인들이 고난의 문제 앞에서 욥의 사례를 언급하며 ‘사탄과 하나님이 내기를 해서 고난을 주신다’는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사탄의 내기에 속아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요? 콘라드 슈미트란 스위스의 유명한 구약학자는 사탄과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기로 합의하는 장면 자체가 ‘역설’이라고 설명합니다. 조금 지나친 말로 하면 욥기는 첫 판부터 ‘구라’로 시작하는 겁니다. 언뜻 들으면 사실 같기도 하지만 꼬아서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말로 시작하는 욥기는 우리의 ‘고민’을 유도합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이후 의연하게 반응하는 두 문장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욥은 처음 모든 소유물과 자녀들을 잃은 후에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다’라는 멋진 고백을 합니다. 또한 모든 건강을 잃고 종기에 의해 고통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을 수 있다’는 멋진 고백을 합니다. 둘 사이에 약간의 온도차가 있죠? ‘주신 것을 가져가셨습니다’라는 고백에서 ‘복을 주셨으니 화도 능히 참을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한 칸 이동합니다. 욥기가 기록된 중동지방에는 욥기와 유사한 ‘고난당하는 의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딱 이 지점에서 끝이 나버립니다. 고난을 당하지만 의인은 고난을 이겨내고 멋진 신앙고백을 하는 장면. 만약 제가 유치부, 아동부에서 설교한다면 딱 여기까지 설교할겁니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신앙을 지키는 어린이가 되어요!’

 

하지만 욥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고난이 닥쳐왔을 때 그 즉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썩 어렵지 않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말 정도야 꾹 참고 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말을 한 이후. ‘주신 이도 여호와, 취하신 이도 여호와, 복을 주셨으니 화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이후 모든 저주가 단숨에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동화 같은 이야기일까요? 안타깝게도 욥기는 그 이후에 지속되는 인간의 번민과 고통을 다루고 있습니다. 멋진 신앙고백을 했지만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멋진 신앙고백을 했지만 죽은 자녀는 여전히 죽어있고, 소와 나귀와 낙타는 모두 빼앗겨버렸고, 온 몸에 난 종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을 하긴 했는데 고난이 여전히 끝나지 않는 상황, 고난의 결과가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상황, 그 상황을 욥기가 정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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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당시에 고등부 전도사였는데 그 친구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5년간 교회를 섬겼는데 그 친구는 대학도 입학했고, 군대도 전역해서, 작년에 저를 찾아와 진로에 대한 상담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상담을 하다가 갑자기 우스갯소리 비슷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건넸습니다. “전도사님,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그럼 하나님은 인간을 단련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는 변태같은 그런건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난에 관련된 책들을 살펴보면서 제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답해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인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그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을거야. 다만 자기 나름대로 고난의 이유를 상상할 뿐이지. 고난 이후에 내가 더 성장할 것을 믿으면서 ‘연단하시기 위해’라고 생각한다거나 고난 이전에 실수하고 잘못한 기억을 회상하면서 ‘벌을 주셨거나’라고 생각한다던가” 고난 당하는 인간에게는 독특한 두 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 속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유’를 캐묻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이유를 알아봤자 별 해결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유’가 무엇인지 끝없이 묻습니다. 또 다른 하나가 있다면 반복적으로 인간은 ‘이유’를 잠정적으로 재구성해나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후일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욥과, 고난당하는 욥에게 계속 조언을 건네는 세 친구의 말 속에서도 똑같은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반복적으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불리던 욥이 고난을 당한 이유, 특별히 자녀와 재산을 잃고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받는 이유가 분명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 친구는 반복적으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네가 벌을 받을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벌을 받은거지 뭐” 자녀의 잘못이건, 욥의 잘못이건, 그 어떤 잘못이건 특별한 잘못이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불러왔다고 ‘고난의 이유’를 재구성한 이후 반복적으로 욥에게 캐묻습니다. ‘너 정말 잘못없어? 다시 한 번 생각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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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이 참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장애가 있으십니다. 고등학생때 한쪽 다리를 교통사고로 잃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은 히스테리가 있어서 저희 집은 분명 화목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목회자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 이후에도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저는 되짚어보면 끝없이 ‘이유’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내 삶의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고난을 주신 이유는 후일에 좋은 설교자가 되어 고난 당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다.’라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아가고 나이가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뚜렷한, 명확한, 무엇보다 무릎을 탁 칠만한 해답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교회에 처음 다니면서 저는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땐가 저의 배움이 깊다고 스스로 자뻑에 푹 빠져있을 무렵 저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내용도 알겠고, 기도를 하는 법도 알겠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대충은 다 알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저의 눈에는 세상이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신앙이 좋아질 수 있고, 저렇게 하면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고, 요렇게 하면 삶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고, 또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서 저는 그때 당시만 생각하면 이불킥을 하곤 합니다. 삶은 너무나 신비해서 몇 문장에 요약될 수 없었습니다. 예외와 의외의 사례들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리의 예상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또한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느순간부터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가 인터뷰에서 남긴 문장이 유독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 인터뷰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이 왜 이러냐고? 묻지마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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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청년회 여러분들께서 설문조사에 성실히 응답해주셨습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면 이런 류의 질문을 하겠다고 답해주셨습니다. 저 또한 이런 유의 질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은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 어쩌면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로 자녀와 재산을 잃고 온 몸에 종기로 고통스러워하는 욥에게 ‘고난이 끝나고 있는 시점’도 말해주시지 않으시고, ‘고난의 이유’도 말해주시지 않으시고, ‘고난을 끝내는 법’도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질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욥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2-6)

 

번역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욥은 그런 류의 답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긍했다는 사실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에도 욥의 온 몸에 난 종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며, 욥이 이런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온 몸에 난 종기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42장 10절을 참조할 때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에야 욥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이런 신앙고백을 했던 상황은 여전히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종기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는 시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G. K. 체스터턴이란 저술가의 아포리즘 모음집이 얼마 전에 번역출간되었습니다. 욥기를 묵상한 저자의 통찰에서 제목을 따왔는데요.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설명하길 거부하신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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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 제 삶이 수수께끼 같습니다. 앞으로 저는 어떤 사람이 되며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살다보니 목회자가 되었고, 설교를 잘 하고 싶은 사람이 되었으며, 또 살다보니 한 교회에서 5년간 섬기다가, 또 1년간 쉬다가, 어쩌다보니 이렇게 가나안교회로 굴러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언제까지 있을지도 도저히 모르겠고,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을 섬기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께서 저를 가나안교회에 보내셨는지 그 계획을 알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그 계획에 대한 설명을 거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내 계획을 설명하면 넌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니? 그냥 믿고 따라와.’

 

2021년입니다. 2021년 또한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서 울었던 만큼 2021년에도 울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서 좌절하고 실망했던만큼 2021년에도 여전히 좌절하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껏 살아오면서 거두었던 결실만큼 또한 2021년에도 동일하게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특히나 코로나가 창궐하여 여러 삶의 제약이 가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이 지나치게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아니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답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분 자체로 수수께끼처럼 여기지만, 사람의 얄팍하고 명료한 해답보다는 하나님의 묵직하고 신뢰감있는 수수께끼가 더 만족스럽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답하지 않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계획을 설명하면 넌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니? 그냥 믿고 따라와.’

 

2021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 답없는 인생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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