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겠는가? (욥기 41:10b)

2021. 2. 4. 04:12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있겠느냐? (욥 41:10b)

 

여러분의 기도의 힘을 믿으십니까? 기도를 하면 기도를 하고 있는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의 기도를 귀담아 듣고 계셔서 기도가 하늘의 보좌를 흔들 때에 비로소 세상의 문제들이 기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해결된다는 믿음이 정말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저에겐 그러한 믿음이 부족한 같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켠에는 의구심이 가득합니다. 아니 때로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할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 많습니다. 

 

지난 교회를 섬길 때의 일입니다. 매번 예배시간 30 전에 와계시는 어르신 분이 계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시는 어르신이지만 매번 예배에 보이는 성의와 마음은 온전함 자체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나셨습니다. 아마도 기억엔 폐지를 줍다가 자동차에 부딪혔다는 말을 들은 같습니다. 나이가 40 넘도록 어르신을 속썩였던 아들은 자신과 말다툼을 이후에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렸는데이런 불상사가 났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교회에선 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또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영적인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분은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걸 의심하진 않습니다. 다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치료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건지. 아니면 살짝 떨어져서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길 바랄 뿐입니다라고 기도해야 하는건지. 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모든 만사를 개입하셔서 해결할 있는 분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도에 따라 하나님이 만사에 개입하셔서 해결하시진 않은 같습니다. 경험상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기도보다 높고 기도보다 큽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기도 속에 담겨진 인간의 말들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도대체 어떻게 기도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숨겨진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까놓고 이야기를 뿐이지 대부분이 기도하면서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래서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기는 한데?’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음 없다는 꾸지람을 듣기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들 이런 생각이 마음 켠에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담겨진 문장이 실제 우리 앞에 현실이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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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욥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욥기 또한 기도를 배우는데 있어서 꽤나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듬어지고 정제된 깔끔하고 예술적인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정말 그대로 감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언어들을 담아낸 기도 문장들이 꽤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욥기에서 은혜받고 감동받는 문장은 이런 문장들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 혹은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말을 하게 이런 문장을 인용하거나 살짝 비틀어서 말하게 되면 좋을만한 문장입니다. 말은다듬어진문장이란 말입니다.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살짝의 겉치레의 작업이 묻어난 문장이란 말입니다. 조금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추구해야 신앙의 방향을 고백적으로 담아낸 문장이란 말이겠지요. 하지만 정말 우리가 저렇게 다듬어진 문장으로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이어갈 있느냐고 묻는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저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관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끄럽고 전쟁터고 곳곳에 대적들이 가득합니다. 눈만 떴다하면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매우 역동적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이 들이닥치자마자 멋진 고백을 하는 욥기 2장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후에 입이 튀어나와서 온갖 불평불만은 쏟아내는 3장부터가 바로 우리의 인생의 민낯입니다.

 

욥과 친구는 서로 논쟁을 시작합니다. 

 

욥의 고난이 어디로부터 왔냐는 질문 앞에서 나름의 논지를 펼칩니다. 욥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욥이나 혹은 욥의 자녀가 잘못해서 욥에게 벌을 주었다면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근데 아무리 따져보고 생각해봐도 심각한 잘못을 일으킨 일이 생각나질 않습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 욥은 정직하고, 의롭고, 악에서 떠나며,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님 뭔가 잘못된거 아닙니까?’ 

 

친구는 욥의 말을 들으면서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욥이 뭔가 잘못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중에 있습니다. 지금껏 세상을 살아봤지만 욥만큼 심각한 재앙을 경험한 케이스는 처음 보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욥은 그런 재앙 속에서하나님이 뭔가 잘못하신거 아닙니까?’라고 우기고 있으니 친구는 당황할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이렇게 말합니다. ‘니가 잘못했겠지 임마.’ 

 

우리가 흔히 식당이나 혹은 사업체에 걸어놓는 유명한 성경구절인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말씀 또한 욥의 친구의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만약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면 그때라도 용서를 빌고 다시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작이 미약하지만 끝이 창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욥의 상황, 그러니까 아무런 잘못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니가 잘못했잖아라고 밀어붙이는 친구와의 논쟁상황에서 이런 저런맞는 들은 모조리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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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욥이 세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내뱉은 문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유진피터슨의 메시지성경을 바탕으로 발췌했습니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낱 연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대등하지 않으니 분을 상대로 소송을 벌일 없구나.
동등한 존재로 같이 법정에 들어갈 수가 없구나.
(…)
중재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내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마십시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죄목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 내려지든 내가 감당하겠네
내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어가며 모험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
나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할 걸세.
비록 하나님께 호된 벌을 받았지만 분을 것이네!
두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것이야.
그분을 뵙고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분 앞에서 직접 나의 주장을 펼치련만
그분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분의 의도를 알아낼 있으련만
그분이 나를 물리치시거나 힘으로 누르실 같은가?
아닐세, 분은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실 거네.
누가 말을 들어줄 사람 없을까!
나는 답변서를 작성하고 서명까지 마쳤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일세!
그분의 기소장을 보고 싶군.
답변서는 누구나 있네.
내용을 종이에 큼지막하게 써서 동네를 생각이거든.

 

욥은 친구와의 논쟁 속에서 나름 대화의 요지가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얼굴만 뵙고 고난의 이유라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혹여나 재판장에서 피고와 원고로 만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서로 대등하지 않아서 아쉽다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논쟁을 거듭하면서 그는 확신이 생겨납니다. 만약 하나님과 법정에서 만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과하지 않겠냐는 확신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어주지 않겠냐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결국 친구와의 논쟁을 겪으면서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에 출두하셔서 욥에게고난 내리신 이유를 해명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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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통찰 하나를 배울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 멋진 신앙적 수사가 담긴 수려한 편의 시를 올려드리는 것이지 않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와 같은 우리의 삶에서 헝클어지고 망가진 우리의 진솔한 마음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터놓는 것입니다. 욥이 있는 가장 모범적이고 신앙적인 기도는 애초에 이미 드렸습니다. ‘주신 분도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며복을 주셨으니 화도 받겠습니다 멋지고 신앙적인 기도는 애초에 이미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는 때만 멋질 뿐입니다. 실제 욥의 삶을 회복시키지도 못하고, 실제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교통을 만들어내지도 못합니다.

 

이제 욥은 가면을 벗고, 이제 욥은 신앙적 수사를 벗어 던지고, 경건하고 의롭고 멋지고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욥은 거리의 투사가 됩니다. 욥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진솔하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하나님보다 제가 정당한 아닙니까?’ ‘재판장으로 나오십시오. 제가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얼른 재판장으로 나오셔서 해명하십시오!’ 너무 솔직해서 읽는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너무 솔직한 욥의 기도가 사실상입술의 범죄 다름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솔직한 기도를 욥은 무조건적으로 회개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솔직한, 불편한, 적나라한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화가 나고 울분이 터지고 답답하고 막막해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는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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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진짜 기도가 욥에게 유익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유익이 있는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해명해달라고 진지하게 묻고 따지고 탄원서까지 제출했지만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이치와 창조의 질서에 대해서 알기는 아냐고 꾸짖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마치 욥이 뭔가 크게 잘못했고 그에 대한 꾸지람을 듣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욥에게 하나님은 욥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기도의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가 우리 뜻대로 응답되지 않더라도 얻는 유익이 있을까요? 

 

욥기 1 6절을 보십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그리고 욥기 2 1절을 보십시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마지막으로 욥기 41 10절을 보십시다.

누가 내게 감히 대항  있겠느냐? (욥 41:10b)

 

 

욥기에서 나타나는 이미지 중의 하나는천상회의입니다. 구약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영적존재들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회의를 하고 결론이 땅에서 실현됩니다. 욥기 1장과 2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여호와 앞에섰다 말하는 구절이 바로 천상회의를 암시합니다. 천상회의에는 무수한 영적존재들이 하나님 앞에 건의사항을 보고하고, 또한 세상의 일어난 일들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에 따른 지침을 지시합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섰다 말하는 단어가 욥기 41 10,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에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특별히 욥기 41장은 리워야단이라는 크고 거대한 악과 고난을 상징하는 괴물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말씀하시는 맥락인데요. 중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게 감히 대항 있겠느냐? (욥 41:10b)

 

여기서대항하다 번역된 단어가섰다 번역된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감히 있겠는가?’ 하나님은 욥에게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기원에 대해서 다루면서 욥이 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치 이는 욥의 기를 완전히 죽이는 하나님의 발언처럼 들리는데요. 하지만 이와 같은 지난한 이야기들, ‘내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고 니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꾸 깝치니?’라고 들리는 같은 이야기들 속에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문장이 바로 41 10절의 문장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감히 있겠는가?”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하나님 앞에 있는 천상회의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욥기는 발언을 통해서 현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아닌 바로 욥이 있는 천상회의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욥기 38 1, 40 6절에는폭풍우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폭풍우 속에서 어마무시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주는데요. 하지만 폭풍우 바로 욥을 천상회의로 소환하는 폭풍우입니다. 폭풍우는 욥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욥을 들어 올려 천상회의로 소환하는 은혜의 바람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지난하게 따졌습니다. 고난의 이유가 뭔지 해명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정당하지 않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바람을 욥에게 보내셔서 천상회의로 소환하십니다. 그리고는 세상 만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는 허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감히 있겠는가?”

 

이는 화가 나서 따지는 장면이지 않습니다. 헛웃음을 지으면서 한낱 피조물 주제에 하나님께 대하여 삿대질을 하고 얼른 재판장에 나와서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욥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말입니다. 욥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어떤 누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서 말할 있겠습니까? 욥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어떤 누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서 삿대질을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허허 웃으면서 욥의 특권을 인정해주십니다. 친구가 보기에,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도, 욥의 말들은 경거망동한 실언에 가깝고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절 발언에 가까워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십니다. 도리어욥이 아니라면 누가 하나님 앞에 있겠는가?’라고 허허 웃으시면서 그런 욥을 천상회의로 소환하십니다. 바로 은혜의 바람을 보내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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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도하는만큼 세상이 변화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를 한다고 해서 기도를 하는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밀을 가르쳐주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치열하게 묻고 따졌지만 하나님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욥은 자신의 고난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치열하게 묻고 따졌지만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쉽게 거두어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무능해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무의미해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철저히 무용한 신앙기술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이어줍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천상회의의 구성원으로 부름받습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뜻대로 세상이 변화되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하늘의 비밀이 내게 알려지지도 않습니다만, 기도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기도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서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삿대질을 때에도, 때로는 하나님께 분노와 울분을 모두 털어놓을 때에도,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는 것만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고 허허 웃으시며그래, 말고 누가 하나님 앞에 있겠는가?’ 말씀하십니다.

 

욥은 원하는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만족했습니다. 만족감 덕택에 자신의 친구를 용서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있었습니다. 기도의 힘이 있다면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차오르는 벅찬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곁에 있는 이를 사랑할 있고, 곁에 있는 이를 용서할 있고, 앞에 있는 고난과 어려움과 전쟁 같은 상황을 견뎌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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